발칙한 QT

우정에 대하여(삼하9:1-13) 본문

구약 QT

우정에 대하여(삼하9:1-13)

주하인 2005. 10. 16. 11:56

 

참고) 제가 말하는 요나단은 갈매기 요나단이 아닙니다.  ㅎㅎㅎ

      당신의 뜻이라면 - 다윗과요나단  

 

 

 

요나단이 부럽습니다.

 

오늘 서울 을 다녀오는 전철 안에서 멕시코 선교사 김선광님의 "우리는 하나님께 소모품이 아닙니다. " 라는 책을 읽으며 왔습니다.

 

  거기에 그런 글이 있었어요.

우리는 무리해서 투자를 해야 한다고요.

관계에 말입니다.

 

 꼭 관계를 맺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진정으로 내가 사귀는 친구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의 전심을 다해서 사귀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댓가는 바라지 말라는 것이지요.

 

요사이 점차로 관계를 좋게하라는 글을 더 많이 접하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뜻인가부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잠시 묵상하러 들어온 이곳에 요나단과 다윗의 절절한 우정을 보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한 자입니다.

모든 권리를 포기한 자입니다.

그냥 다윗이 좋아서...

다윗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실은 하나님을 같이 열정적으로 모셨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냥 아마도 그분의 카리스마가 다윗의 성품에 묻어 있음을 그는 느꼈을 것이고 그의 선한 성품과 지적인 판단 능력으로 보아 다윗은 언젠가 우뚝 설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

 

 

왕자로서..

다음의 후계자로서.. 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겁니다.

 

아버지나 주위의 모든 권력에 속해 있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틀림없이 그는 미친 어리석은 감상주의자 였을 겁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내가 이러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

혹시 홀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순간적 열정에 의해 다윗을 다음의 후계자로 인정했다고 해도 죽기 전까지 과연 자신의 기득권과의 싸움이 쉽게 포기가 되었을 까요?

 

그래서 그 요나단은 정말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진실한 인품의 소유자 였습니다.

 

짧은 인생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우정'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준수하게 도와주는 행위이며' 또한 자신의 '신의'임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유혹과 비판과 의혹에서 이겨낸 위대한 자입니다.

 

오늘 다윗이 보이는 과도한 듯한 친구 아들에 대한 보응은 그런 요나단의 깊은 인간성에 대한 감동 탓입니다.

 

 인간적 우정에 하나님의 기쁨이 더해지면 그 우정은 얼마나 깊고 돈독하겠습니까?

 

 오랫동안 깊이 생각 지 못하고 있던 친구를 돌아보고 연락을 해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좋은 친구로서 무리하게라도 우정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가져봐야 겠습니다.

 

 혹여 주님이 보여주시는 이웃이 있다면 또 관심을 가져야 겟습니다.

 

 

 

기도) 

 

주님 ..

 

요나단의 깊은 우정과 더 깊은 인간적 깊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분 처럼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세요.

그 진실을 쫓을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저를 좀더 낮출수 있는 겸손을 허락하세요.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긍휼과 우정을 허락하세요.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