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용납을 넘어서[고후11:1-15] 본문
1.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용납'하라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용납은 容納, 허용하고 받아 들이다는 뜻이며
NIV에서는 'put up with' 로
KJV에서는 'bear with'로 나오는 바
영한 사전에서의 뜻은
1. (불평하지 않고) …을 참다
2. 인내하다(bear) 라고 나온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검색하려고
용납, 용서를 치니
용납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용서는 '은혜'로 하는 것이라 설교 하시는 구절이 나온다.
좀.. 극단적이고 교훈적 해설인 것처럼 느껴져서
지나치려다가 가만히 느껴보니
정말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 아니고는 '용서'..
불가할 것 같은 게 맞는 것 같았다 .
용서한다고
서로 가서 얼굴 부대끼고 울고 와서도
심리학적 기법으로 (젊을 적 이곳 저곳 많이 찾아 다녔었다.^^;; , 하나님을 만나고 용서의 부담을 해결하기 위하여.. )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완전히 해결되어 아무런 남김없이 깨끗한 마음상태로
평생 유지될 수 있을까?
정말..?
작은 터치에도 불구하고
또 되풀이 올라오는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아련히 남아 있음이다.
그래서 '용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하시는
그 분의 설교 글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각설하고
오늘 말씀은 '용서'가 아니고
'용납'이었다.
허용.. 의 그 '용'자와
수납장.. 할 때의 그 '납'자를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
용납.
아마도 '받아 들여서(용)'
마음 한구석의 어느 곳에 넣어두는 (납)' 정도의
그런 개념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완전한 용서가
네게는 어려우니
용서를 모본으로 보이신
예수님의 '흉내'라도 내보는 게 어떻겠냐..
주하인아 !" 라시는 느낌의 말씀이다 .
오늘
특별히
용납에 대하여 말씀하심은 말이다.
아..
날
다 아시는 하나님 ~!
그러시면서
'나의
좀
어리석은 것' 이라 먼저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것.
'사람'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하겠으면
사람의 행위 만이라도 용서.. 아니 용납하라시는 말씀이시다.
그렇다 .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죄만 미워하라는
너무도 유명한 격언이 사실이긴하다.
행위만 보고 , 그것도 용서말고 용납하라고..
나의
부족한 것을
좀.. (좀이라신다..ㅎ ) 용납해보라고
명령 보다는
안되는 우리, 나를 향해
넌지시 전하신다.
그러시면서
다시
'나'를 용납하라 신다.
결국.. 행위를 용납하다 보면
그 사람까지 긍휼히 여기는 부분 까지 성장해
결국
'용서'까지 가게 되는 게 아닐까?
날..
우리의 어떠함을 아시는 주께서
특별히
오늘
'용납'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함이시다.
우리의 불가능한 매여있음...
그로 인하여 몸부림치며 좁은 길을 가는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특별히 오늘
요령과 방법을 가르치시며
어쩌면 있을지 모를 '용서'의 상황을
'용납'으로 시작해보라심 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똑같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죄에 매여있지 않기를 바라심이시다.
그게.. 감사하다.
주여.
용납하라 십니다.
부족한 행위를
좀
용납하고
결국 사람을 용납하며
그러한 부족한 나를 용납하여
용서의 길에 들어서길 말씀하시고 계시는 듯 하나이다.
주여.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주여.
힘과 지혜를 주소서.
죄를 용납하지는 않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버거움은 용납하여
더 이상의 끈에 묶이지 못하게 하소서.
구분하는 지혜를 주소서.
알고 나서도 용납할 힘을 주소서.
참을 인내를 주소서.
결국 용서로 바뀌게 하소서.
오늘 그리하소서.
내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신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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