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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주하인을 묵상하며 [요19:31-4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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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주하인을 묵상하며 [요19:31-42]

주하인 2022. 4. 16. 11:07

(아침 ,텐트 창문을 향해 몰려오는 태백산중 햇살)

 

(지난 밤의 비는 멈추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정선 양떼목장의 캠핑터를 이루 어루만지네요.. )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요셉'
이 사람은 '공회'요원인 것,
그것도 아래에 복사해 놓은 대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것을 알았지만
ㅜ.ㅜ; 스쳐지나가던 구절에서
'예수의 제자이나'라 써 있는 것을
열두제자에 속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 .ㅠ,.ㅠ;;
아... 이 지력 미약함을 주여 용서 하소서.

어쨋든
그는 '두려워 했다 .
지금 현재의 신분이 아무리 열두 제자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고귀했던 과거의 신분(아...정체성의 180도 변화, 하나님의 역사의 기적!)의 흔적은
당연히도 그로 하여금
심한 두려움을 가져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길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밤에라도'
빌라도를 찾아 갔다 .

그의 마음
'두려움'
'마주함'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용기'
승리.......다.

아리마대를 통하여
무엇을 느끼는 가?

이상히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나.
정말 강한 '불신의 젊은 시절'을 보내며
매우 강한 자존감과 막막함과 갈등으로
세상을 바라다 보고 살다가
38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마주 하고 사는 자다.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
'예수님에 속한 자로 사는 지금'
두 세계는 너무 다르다 .
완전히 다른데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다 .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을 살면서
과거의 영향은 나를 당혹스럽게 할 때가 자주 있다 .
비교적 그 경계는
점점 더 옅어지고 엷어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남은
두려움......
과거의 배우고 생각해오던 논리적 우월감과 혼돈........이
조금 조금......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결단을 해냈다 .
일부분의 승리다.
그에게 온전한 승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부분까지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는
그 부분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스승,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최선으로 '예우어린 장례'까지가
그의 믿음의 한계 였던 모양이다.

두려움, 넘어서는 용기.........만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기대' 가 부족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그 부족함을 통하여
예수 께서는
그가 옮겨 놓은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이어짐과
성령의 임재하시게 함으로 인한
12제자의 온전한 각성과
폭팔적인 세상으로의 '사도행전'이 이어짐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 이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신가?

'아리마대 요셉'을 통한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알게 하심으로
그의 두려움, 공포를 넘어서는 결단과
그에 따른 나름의 기다림........부분까지는
많은 공감이 있게 하시며
내 그러한 아직은 미흡하지만
그마져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되어진
성장과정에 있으며
조금 더 있으면 완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 완전한 '성화'와
다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실 것임을
읽어주시며
격려하시며
기대하게 하심 같아 보인다 .

분명코
아리마대 요셉은
옳은 행동을 했으며
옳은 믿음의 성장과정의 막바지에 있으니
그의 흔들림은
위안과 더불어 '상급'으로 남게 될 것이다.
주하인... 나.
비록 그 처럼 대단하고 비범한 세상의 출신 성분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의 내 자존심 (자존감이 아니다..ㅎ .. 스스로만 그리 생각하는 교만과 비굴 사이인 자존심...이다^^;)은
산헤드립 아리마대 같은 자였다가
온전하신 예수님 첫사랑 구원의 감격으로
180도 다른 세상, 예수님 구원의 나라에 서 있는 자이다.
그런 자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수없이 많은 갈등 가운데
반드시 해야하는 어떤 접점의 시간을 드러내 보이며
그 마져 십자가 지는 결단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
그게 바로 주님이 기뻐하심이 될 것이니
지금, 그때의 흔들림, 갈등 조차
그리 큰 고민 보다는
감사와 기대로 할 것을
넌지시 보이심이시다.
감사하다 .


주님.
어제는 허락하심에 '정선 양떼목장'에서 하루를 쉬다 올라왔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많은 생각과 쉼을 누리고 있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비바람의 광풍에 서둘러 귀가 햇습니다.
느즈막히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 펼쳐드니
'아래마대 요셉'을 통하여
동병상련 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두려움.
그러함에도 '빌라도'라는 두려운 대상을 마주하며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스승 예수님을 무덤에 옮겨 드리는 역할을 하면서
그 안에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들이 그에게 밀려왔을 것을 요.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을 앞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붙드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그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그 마음을 묵상하며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는 일에는
잘못된 것이 없을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의 혼돈과 두려움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은
그가 옮겨 놓은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으며
그와 열한제자들의 동역을 통하여
세상에 주님 말씀이 전파 되는
바야흐로 사도 행전의 시간들이 벌어지는 것을 요.

감사합니다.
주여.
그 분과 제게 허락하셔서
이 세상의 헛된 가치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체성,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의미와 도우심을 허락하심을 요.

오늘
눈뜨고
주님 말씀 먼저 묵상합니다.
하루
주님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활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펌) 박영철 목사님

●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그 모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본문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치르는 고귀한 일까지 맡게 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한 기록은 성경 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그에 관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접근해 보도록 하자.

먼저, 요한복음 본문에 따르면, 그는 ‘아리마대’ 출신의 사람이었고,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휘’ 곧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던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즉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겠다고 요청하여, 니고데모와 함께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를 장사지낸 인물이다.

● ‘아리마대’는 예루살렘 서북쪽 30여km 쯤에 있는 성으로, 일반적으로 사무엘의 고향인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 소빔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사사이자 위대한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고향이니만큼, 올바른 여호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자부심이 높았을 것이며, 자연히 이곳에서 자란 아리마대 요셉은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요셉’이란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인데, ‘여호와께서 더하실 것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존귀한 공회원’으로 ‘부자’였다. 그의 집안은 아리마대 성의 유지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의 장로로서 공회원의 자격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공회는 산헤드린을 말하는데, 산헤드린은 유대 민족의 최고법정이다. 보통 산헤드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산헤드린이라고 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신헤드리움, 신에드리온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함께 모여 앉았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쉬네드리온’을 히브리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헤드린의 구성원의 수는 71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70명 혹은 72명일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산헤드린의 구성원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이 세 부류가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다수가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원을 선출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신중한 일이었는데, 도덕적,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만 선출되었다. 또한 그들은 법률, 과학, 언어에 능통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리고 각 가정의 아버지여야만 산헤드린의 공회원으로 선출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가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룰 때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긍휼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재판관으로 있어야 했고, 절기나 필요할 때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산헤드린에 올라가야 했다. 산헤드린 공회는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정착한 모든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교회법을 위반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재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었고, 사형선고도 내릴 수 있었는데, 예수님 공생애 당시 로마의 총독이 지배할 때는 그러한 사형집행이 로마의 집정관인 총독에 의해 확정된 경우에만 가능하도록 제한되었다.

하여튼 이로 볼 때 이스라엘에서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존귀한’ 존재였다. 이에 더하여 아리마대 요셉은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덧붙이기를,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휘’ 곧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유대인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갈릴리 출신의 이 젊은 선지자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유대인의 속담은 유대지역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을 깔보고 하던 말이다. 실제로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성격이 괄괄하고 안정감이 없으며 무례했다. 평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거의 이방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수준으로 취급했다. 그러니, 백성의 지도자들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며, 나중에는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불쾌한 이 무리들을 없애버리고자 시도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밝혀지게 될 경우, 그 사람은 공회원에서 축출될 것은 뻔한 일이요, 백성들 사이에서 매장될 것이 확실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러 밤중에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 요셉! 그는 자신의 심령 가운데 들려오는 진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했던 그의 심령이, 어찌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빛을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공회원들이 예수를 처형하고자 결의할 때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이제 결정적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지금까지는 예수의 제자임을 숨겨 오다가,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난 이 어려운 때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단호히 나아와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게 되었고, 온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자신을 위해 무덤을 미리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다. 물론 부자들에게나 가능했다. 요셉은 자신의 새 묘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다. 이는 예수께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을 예고한 사53:9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져왔다는 것은, 그 역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매우 컸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정도의 향품을 사용하는 것은 왕족에 대한 예우인데 이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왕으로 예우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튼 이들은 급박한 시간에 쫓기면서도 주저함 없이 앞장서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낸다.

금요일 저녁 일몰과 함께 안식일이 시작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안식일 예비일인 금요일 오전 9시였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신다.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6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3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언덕을 내려와 빌라도총독이 머물고 있던 관저로 달려가고, 다시 필요한 물품과 사람들을 불러모아 언덕을 올라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시 동산 자신의 무덤으로 옮겨 장사지내기까지, 3시간은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젊은 사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체통을 지켜야 하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다. 그의 분주한 움직임을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주목해서 보고 있을 터인데,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피범벅이 되어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만지면서, 자신의 의복과 손에도 피로 얼룩졌을 터인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다.

유대인들은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에서 빤히 보이는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에 매달린 시체를 보기 원치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하여, 그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만약 신속히 예수의 시신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로마 군인들은 일반적으로 범죄자를 처형했을 경우 보통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시체를 치욕적인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쇠몽치로 범죄자의 종아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아서 오래도록 그냥 두기도 했는데, 매달린 시체들은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훼손되기 일쑤였다. 실제로 십자가의 높이는 3m 이내였기 때문에 들짐승들이 매달린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은 예수의 시신이 그 같은 치욕적인 처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께서, 유월절 양처럼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

●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서 상당한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실제로 예수님의 은밀한 추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 상태에서 담대하고 용기 있게 예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공개적인 신앙 고백적 행위에 니고데모도 동참했는데, 두 사람의 합심은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을 극복한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다. 즉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자신들의 지위가 박탈될지 모르는,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반역죄와 신성 모독죄로 처형된 예수에게 호의를 보임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의 자세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제자들도 모두 도망쳐 버린 마당에 마지막까지 주님의 곁을 지켰던 요셉, 이기적인 욕심으로 약속과 신의를 휴지 조각처럼 버리는 세태 속에서 눈물겹도록 그리운 인물이다. 무릇 제자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진정한 제자는 스승의 지식뿐만 아니라 스승의 마음과 정신과 생활까지 본받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세례를 받은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생활 가운데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이 없다면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회피하고 숨어버리고 약속을 파기하고 믿음마저 저버리는 이 불신과 무책임의 시대에, 참으로 아리마대 요셉 같은 진정한 제자가 요청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 저력 있는 믿음의 소유자, 진정으로 충성된 일꾼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요셉과 같은 신실한 신앙고백과 아름다운 헌신이 넘치는 교인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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