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수님 생애 동안의 절대 고난[요12:20-33] 본문

신약 QT

예수님 생애 동안의 절대 고난[요12:20-33]

주하인 2022. 2. 12. 09:00

 

20.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궁금하다.

헬라인이라면 헬라에 사는 유대인이 아닐바 ( 아래 ''해온 글에 제 궁금증에 대하여 답이 될만큼 공감가도록 잘 정리된 글이 있습니다.)

왜 그들이 

명절에 예배하려 왔을까?

 단순히 유대교의 명절에 맞춘 이방신자들이라면 

굳이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


 
21.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즉 헬라식 이름이고 

제자중 그를 드러내어 '선생'으로 표시함은

예수님과 그 빌립을 동격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 '헬라인'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였음을 

상대적으로 '제자'들까지 우러러 보임을 비례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신', 하나님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를 다시한번 확신하기 위하여

주님을 만나뵈러 온 것임이 은연중 드러난 것이고

'빌립''그리스'.......등이 적나라하게 보여짐은

'이방'에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 아래에 인용된 글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해설 해 놓으셨다. )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인간'이시기도 하신 예수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기에 

피하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심을 아시는 

그 분께서 

'헬라인이 명절에 나타난 그 징후, 징표, sign'을 통해

드디어 

'십자가 프로그램'이 가동 (죄송, 너무 적나라하고 유치하게 표현해서요.. ^^;;;)됨을 아시고 

신음하시듯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 외치심이시다. 

아.. 

누가 들으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포함한 선언 내지 결심을 외치신 것 같아

그 아픔이 그대로 가슴에 오는 것 같이 

속상하고 아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갈무리 하신 주님께서

다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의 원리를 세상에 선포하신다. 

 

 한 알의 밀로 

세상의 영생, 

주하인의 영생을 위한 '십자가 구원'의 사역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신 후 

다시금 우리의 어찌해야함을 '가르치시고'  길을 인도하신다. 

 


27.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그리고는 또다시 이어지는

'고뇌에 찬 신음같은 독백'과 이어지는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직접적 응답'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신 '인자' 예수님.

 

 그분의 이 어이없고 부족한 '주하인'을 위하여

질 수 밖에 없으신 '십자가 ' 고난은 

자꾸만 잊는 그 분의 인간으로서의 속성을 통하여

모든 우리의 괴로움을 다 지고 가셨음을 

자주 잊고는 한다. 

 

 마치... 

당연히 죄지으면 사해지고 죄지으면 사해지고

어째도 천국가게 될 것 ......이라며

어이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취한다. 

 

 오늘

예수님의 고뇌와 

십자가를 향하여 치닫는 그 시간, 그 절대 고통의 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신다. 

 

 

 무엇일까?
무엇때문에 

오늘 내게 보여주심이던가?

당연하게도 위의 논리적 전개처럼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죄송하게도 자주 잊지만 알고는 있는 ㅠ.ㅠ;;) 이 일을 

오늘 보이심일까?

 

오늘 하루 더 겸허하게 감사하며 지내라심이실까?
주님 따라 고뇌와 고난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 받아내란 말씀일까?

 고난이 유익이고 

그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서 연단 받아 승리하라시는 뜻이신가?

 

 아.. 

그보다 더 크고 뚜렷한 이유가 있으실텐데................

 

하루 붙들고 지내봐야 할 문제인듯하다.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실은 그 고난을 다 아시면서도 하루하루 그 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 땅에 허락되신 인간 예수로서의 30몇년의 시간동안

내내 째각 째각 다가오는

그 고통의 시간을 

전혀 표현해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받아 내고 있으시던 예수께서 

마침내 그 시침이 딱 멈추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전 우주적 '십자가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증표로서

'헬라인들이 명절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남'을 통하여

그 두려움의 가시화가 드디어 

인간 예수님 앞에 현실화 됨을 통하여

폭팔하듯 다가서는 괴로움과 

그를 받아내시는 예수님의 절규와 기도,

그러면서도 끝까지 인생들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을 멈추지 않으심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너무 쉬운 십자가의 구원이란 길을 허락하시었음을 통하여

너무 안이하게 살아왔고

너무 쉽게 예수님의 고난을 잊어버리고 

당연하듯 구원의 권리를 남용하며 게으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

오늘 

드라마를 보듯

실제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감정을 읽어보게 하십니다. 

주여.

잊지 않게 하시어

감사하고 더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

주여.

주님이 제게 그러셨듯

저를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다 감수하셨듯

저도 

일단이라도 제 주변을 더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감내하는 일들이 늘어나게 하소서.

최소한 말씀과 깨달음이 있는 오늘 만이라도 그리되게하소서.

 

 제가 중심이 되지 않고

제 기분이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어왔던

이 어리석고 죄된 기준을 

주님 예수님의 임계 상황을 마주하는 모습을 통하여서라도

조금 바꾸게 하소서.

 주님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서라도 

모든 지축을 바꾸는 고통이라도 받아 들이게 하소서.

 

제 판단의 근거가 

스위치 눌려 시작된 주님 예수님의 사역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올바른 세상관으로 바뀌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하시고 놀라우신 사랑과 순종의 이름을 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왜 헬라인이 유대인의 명절에 나타났을까?

왜 그게 예수님께 '영광을 받으실 때'의 시작이 되었을까... 에 대한 다른 분의 소견

 

((펌))

https://392766.tistory.com/entry/요한복음-1220-33

 

헬라인 몇이 있는데

 

아마도 요한복음, 아니 신약 성경에서 가장 기이하고 이상한 본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헬라 사람 중에 예배하려 예루살렘 왔다는 것.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자들은 유대인이지만 헬라에서 산 사람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요한이 그것을 모를 리 없고 분명 '헬라인'(Ἕλληνές)이라 적었습니다.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짧은 묵상글에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을까요? 복음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도행전으로 가면 고넬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물론 구분은 필요합니다. 이 부분에 후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소위 경건한 이방인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이기에 유대인의 회중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즉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헬라인들은 그런 이들입니다. 요한복음이 신약의 모든 책들보다 가장 늦게(요한계시록 제외)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벳새다 사람 빌립을 찾아갑니다. 참고 빌립은 헬라 이름이며, 그는 헬라어를 능통하게 잘했을 것입니다. 빌립에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청합니다. 빌립에게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라 생각했는데 문맥상 빌립에게 '선생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맘에 들지 않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분명 κύριε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왜 '선생'이로 번역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주님'(κύριε)으로 번역해서 예수님과 구분하기 위하여 빌립의 호칭을 선생으로 의역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대단히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의역 정도가 아니라 반역 수준입니다. 헬라인들이 빌립을 주를 불렀다면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아마도 빌립이 헬라인들에게는 뭔가 대단한 사람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NA28 21οὗτοι οὖν προσῆλθον Φιλίππῳ τῷ ἀπὸ Βηθσαϊδὰ τῆς Γαλιλαίας καὶ ἠρώτων αὐτὸν λέγοντες· κύριε, θέλομεν τὸν Ἰησοῦν ἰδεῖν.

그런데 헬라인들이 왜 주님을 찾아온 걸까요? 예수님의 대답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영광을 얻을 때가 십자가의 죽음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과 십자가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선한 목자 비유로 잘 알려진 요한복음 10장으로 가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구절을 발견합니다. 즉 그들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입니다.

  •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밖에 있는 양들까지 인도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인도하는 것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염소는 주인을 앞서 가지만 양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통해 이전의 구분 자체를 없애고 십자가 아래 모든 것을 재편? 하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너무나 유명한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종종 헌신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헌신에대한 구절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아닙니다. 정신은 배울 수 있지만 본문이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의 죽음이 많은 생명을 탄생함을 자연의 비유를 통해 알리십니다. 유월절 시기는 늦은 비가 내리는 봄 절기입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겨우내 숨죽여 살던 보리와 밀이 급속하게 자랍니다. 이때 늦은 비가 내려 알곡이 잘 여물도록 만들어 줍니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몸을 썩여 거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밀알이 그대로 있으면 생명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후에 태어날 수많은 생명을 보고계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헬라인들을 향한 대답 속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부활 사건을 씨앗으로 비유합니다. 하지만 문맥 상 의미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 고전 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 고전 15: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주님은 이제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며 인간적인 심적 고뇌에 빠집니다. 이때를 면할 수 있다면 면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인 것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은 다른 복음서에서 게세마네 기도와 닮아 있습니다. 요한은 기존의 복음서를 인용하여 예수님의 심정을 드러내려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길임을 알고 흔들리지만 멈추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오직 자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을 알기에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언급된 곳은 몇 곳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드디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할 때가 되었다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줄곧 사망으로 세상을 지배한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입니다. 사단은 뒷꿈치를 물지만 주님은 뱀의 머리를 박살 내 버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9-12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마무리

예수님은 작고 초차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배신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너무나 무능한 모습으로 죽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아셨고, 고통스러워하십니다. 하지만 그 길을 향해 곧장 나아가십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 알이 썩지 아니하면 결코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출처: https://392766.tistory.com/entry/요한복음-1220-33 [Pensée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