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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환란과 다윗의 찬송( 암 6:1-1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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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환란과 다윗의 찬송( 암 6:1-14 )

주하인 2011. 2. 15. 10:47

제 6 장 ( Chapter 6, Amos )

이게 지는 해던가

뜨는 해던가

 

이것이 절망이던가

혹은 희망이던가

 

불어오는 이 바람이

차가움이던가

봄을 예고하는 희망이던가

 

내 앞에 놓여진

어떠한 고난도

요셉의 환란으로

받을 수 있길 원한다

 

내 입에 불려지는

어떤  노래도

이제 부터는 

다윗의 찬양일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 시온에서 안일한 자.'

 '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나름대로 신앙이 깊다고 착각하며

현실의 편안함을 축복으로 착각하여

안일하고 마음이 헛되이 든든한 자.

 

 어쩌면 '나'도 그렇지 않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어제 식사 중 한방원장님이 '한끗 차이'에 대하여 글을 읽고는

끄덕였다고 말하였다.

 삶과 죽음.

믿음과 방종

......

안일과 평안.

헛된 든든과 평강.

그 조차 한끗차이는 아닐까?

 

 열심히 나가다가 한끝이 변해 버리는 ......

정말 주의해야 하는....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 다윗의 악기'에 대하여도 나온다.

악기는 찬양을 하는 도구다.

반드시 필요하고 너무나 중요하지만

자칫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끗의 위험이 아니던가?

찬양 대에 자주 서는 나.

특별히 찬양을 좋아하고

그 분에게 집중할 시 내려지는 그 은혜에 정말 뜨겁게 취함이 좋아

찬양올리는 것을 진정으로 좋아한다.

그런데 다윗처럼 올리고픈 그 찬양에도

자기 만족이 끼어들면

오늘 주님의 질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윗의 찬송같은 찬송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요셉의 환난'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고난.

그 누구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고난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할 수도

하나님의 뜻으로도 내려질 수도 있지만

고난은 피하고 싶은게 사실이다.

고난은 영적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아니던가?

하지만 고난이 진정으로 의미있는 고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받는

의미있는 고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요셉의 환난이다.

비록 그 고난이 시초는 '내 잘못'이 될 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가져올 때

그것은 '요셉의 환난'으로 바뀌고

그 결과는 '선'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환난' 만으로도

' 찬송' 으로 대표되는 감사의 달뜸으로 만 되는 것도

아니다.

'환난'과 '감사'가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일'과 '거짓 든든함'이 사라진다.

그래야 한끗 차이의 위험에서 나의 영혼을 지킬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은 다시 묵상하면 '고난'을 슬퍼만 할 것도

기쁨이나 세상의 축복을 너무 누리려 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늘 자신을 돌아보아

안일에 빠지지 않는지

비탄에 빠지지 않는지

이 정도면.. 이라는 헛된 든든함에 빠지지 않는 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사자처럼 늘 우리를 노린다.

 

 

 아침에 아내 MRA라고 MRI를 이용한 뇌혈관 촬영을 재차 시행했다.

그동안 아내의 우연히 발견된 '뇌동맥 류'를 통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할 기회를 얻었다.

 '환란'이긴 하지만 미리 발견된 병이니 축복이기도 했다.

 기도하는 분 중(은사자)에는 '회개'하라 하며 선지자같이 말씀하셔서

가슴을 아프게도 하셨다.

당연히도 회개할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은 죄만이 '고난'을 가져온다는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 밂은 '아픔'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

특별히 믿는 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할 문제라는 것.

 

 MRA 결과는 아쉽게도 차이가 없음이었다.

어쩌면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의사가 기도로만 ... 하고 기대하는 것도

믿음 부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술'로만 고칠 것을 기대하고

수술할 의사의 손길에..

수술받는 아내의 머리를... 하고 기도함은 

또 하나님의 손길을 너무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나름대로는 조심스레이 아내의 머리속을 지지시는 '성령'의 손길을 상상하며

조금 기대는 했지만

막상 '그대로'라는 실망이 됨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주님의 뜻은 그것을 통해서

다른 것을 , 다른 사람을 , 나를, 아내를 , 내 자식들의 효도를 ...

만지시기 위한 다른 수순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기에

그리 흔들리지는 않는다.

솔직히 '하나님의 기적'을 믿기에는 너무 기댈 구석이 많은게

현재의 우리 아니던가?

 

또..

아내의 아픔을 통하여 기도하겠다는 분들이 많았다.

외롭지 않았었다.

그러나, 진즉 가까운 친구들이나 모임의 일원들이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음에

어제 갑자기 출근하는 길에 내 속을 '서운함'으로 후볐었다.

하지만, 깨달은 바가 많았다.

내 잘못이다.

젊을 적 더욱 긴밀한 배려를 그들에게 했더라면...

그리고 , 그런 나를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한 나를 받아 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고..

어쩌면 아내의 수술이니 어쩌면 나도 내 친구, 내 아는 사람의 아내가 수술하는데

그리 큰 관심을 표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괜한 기대를 내려 놓기도 했다.

 이제 내일 입원한다.

큰 아들은 '중국'에 친구 만나러 갔다가 오늘 온다.

둘째는 억지로라도 휴가 내게 하여 내일 나오도록 했다.

난..

이일을 통하여 단합된 가정의 태도를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시대가 지나갈 수록 내 진료실에

머리 희끗한 노모를 모시고 오는 여성은 다 딸들 뿐이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내 먼저 가면 '아내'가 걱정이다.  ^^;;

그래서 요번 일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태도'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 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ㅎ

 

 그렇다.

생각하면 모든 게 '환난'들의 연속일 수 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하나님의 허락하신 ' 환난,

요셉의 환난이기도 하다.

요셉은 환난을 통해서 '국무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모든 것을 받았던 자다.

결코 안일하지 않았고

결코 헛된 든든함, 교만함을 유지하지는 않았었다.

 

나.

비단 아내의 병 뿐 아니다.

세상 살아가며 주어진 모든 기쁨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것이고

찬양을 드리길 그치지 않으련다.

그 찬양이 목소리로 나오기도 하지만

내 삶의 태도에서 나오기도 하며

그 열정으로 한마디 더 전도하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들 듣는 자들은 내 전도를

무언의 노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찬송'으로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찬송'을 글로도 표현할 것이다.

이글 을 쓸 즈음 갑자기 내 손가락이 춤을 춘다.

노래 하듯 운율이 느껴진다.

참 오래된 감동들이 다시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성령이 내 찬송의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게다.

 

 또,

고난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으련다 .

내 감정은 그래도

내 영혼은 중심 잡으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려는 결심을 하게 될 것이며

입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제 , 환난 중의 기쁨으로 주님은 날 채우실 것이고

흔들리되 흔들리는 폭과 기회가 줄어 들게 될 것이고

결국 , 난 승리하게 될 것이다.

 

 감사하신 주님.

귀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정말 한 끗차이에 대하여 묵상하나이다.

환난은 환난이되

기쁨의 그것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당신의 뜻,

당신의 살아계심을 인식함으로 그리되길 원합니다.

주님.

내 삶을 통하여 주님께 찬송을 올릴 수 있길 소원합니다.

주여.

살아계신 하나님.

 내일 아내가 입원합니다.

긴 시간 그리 긴장하지 않고 편안해 하던

평강 중의 아내를 보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고는 맑아지는 그 얼굴과 태도를 보았습니다.

주님.

환난 중의 요셉의 모습을 닮아가려 노력하였습니다.

아내는 그리 했고

저도 그리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 맡기고

수술 하지 않고 기적으로 낫는 것 조차도

주님께 맡겼습니다.

이제야 조금 원리를 알듯도 합니다.

받지 못한 기적에 대하여 흔들리며

믿음이 약해지는 어리석음도 범치 않게 되었습니다.

주님. .. 덕입니다.

요셉의 환난으로 받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탓이십니다.

저희 가족의 찬양을

다윗의 찬송으로 받아 주신 하나님 탓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내일 부터 회복까지 기적 베푸소서.

그 과정에서 엮여진 모든 인간의 갈등과 어려움을

주님의 손으로 풀어주시고

저... 어려움 아시는 주님..

옛적에 그랬듯,

바로 또 얼마전에 그러셨듯

하나님의 강력으로 절 붙드소서.

제 자식들 그리하시고

모든 엮인 자들 다 영혼의 짐 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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