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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요셉도 죽고 나도 죽고(출1:1-22)

주하인 2015. 1. 25. 09:44

 

 

6.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아무리 요셉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죽어가고

아무리 애굽의 건설에 어느정도 훌륭한 역군으로서

역할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후대로 지나가며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수를 줄여서 감시해야할 '위협적인 이방민족'으로 밖에 여김을 당하지 않는다.


'다 죽었다.'

오늘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다.


난.. 어떤가?

아직도 지난 10몇 년의 세월동안

안양s 병원에서 나름대로 이루어 놓은

내 흔적과 실적 만을 자랑으로 삼으려 하던가?

아직도 내가 가장이고 나이든 자로서

대접을 바라는가?

아직도 내가 우주의 중심인줄 알고 있던가?


나이들면 시들어 간다.

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월지나면 다 약해진다.

천하 영웅도

역사에 남을 자도

요셉 같이 대단한 자도

다........잊혀진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 안에서

그 옛것을 붙들고

"~해야 한다."

"당연히.." 라는 무의식의 관념을 붙들고 있으면

세월을 거스르는 '바보' 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것 같으시다.

이제 '고센' 지방에 가는 야곱 같은 나에게

더 이상의

하나님과의 씨름하던 시간을 붙들지 말라신다.

보디발의 유혹을 견디고

감옥을 이겨내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을 형제들을 이겨낸

영웅적 요셉은 버리라 하신다.


이제

가만히 C 고센의 뒷방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더 깊이 가져야 한다.

이제 스러져 가는 영광의 기억들을

다 죽었음으로 인정하고

더 약해짐을 기뻐하여야 한다 .


저녁.

내 서재에 앉아 기도하고 있으려니

큰 아들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나 저제나 인사하려 오려나 했더니

한참을 지 엄마와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래지나도 인사하려 안들어 온다.

'잊었나 부다' 하려지만

속이 부대낀다.

'얘가..'


복잡한 생각을 뚫고

말씀에 집중하려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약한 것들을... '

 가만히 생각나는 바가 있다.

내 속에는 ' 아들은  먼저 부모에게 다가와 인사를 ... 해야 한다'.........'하여야 한다.'

그 기준.

그 강력한 관념.

어쩌면 유교 문화에서 자라면서

너무 당연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굳어 버린 생각들.

그것을 벗어나면

그게 '본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황되는 ....


 어쩌면 '사단의 말'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살려면 어느 정도 '선'이 필요하다.

사회의 원칙.

그러나 그게 무조건.. 이 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정의...에 크게 어긋 남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의 그 관념에 굳혀질 수록

갈등의 소지가 될 '측량자'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묶기도

타인을 묶기도 한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길의 빛'이요,

'발의 등'이다.

생명의 소리다.

하나님은 로고스고 말씀이다.

그 하나님이 어제 말씀에서 그러하셨다.

기도 중..

' 약한 것을 기뻐하라'

그래..

아들이 비록 나에게 먼저 인사를 안오는 것도

어쩌면 유교 문화 권에서는 잘못된 행동일지 모르지만

살아가는데 문제될 것은 없다.

하면 좋고

모두 지키면 갈등이 줄 역할을 하지만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오히려 모두 성숙해서 

누구가 먼저 인사 하거나 안하거나 문제가 아니다..라는 사회적 약속이 있으면

영적 부대낌이 덜어질 소지가 많기도 한것.

서양인들이 그래서 더 자유롭지 않을까?


그러나,

그게 내게 '시험거리'가 되면

그 때는 그게 '사단의 관념'의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반면 너무 지킬 '도덕'이나 '선'이 없으면 야만인이 되지만..

또한 현대인은 '남녀의 구실' , '부모 자식'의 역할........

도저히 생물학적, 유전적으로도 해서는 안될

터부까지 넘어서는 것을

자유로히 하기 때문에 문제지만..


삼천포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

과연 내가 그런 '해야만 한다'라는 관념이 침해 당함을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자문 해보았다.

자꾸만 속에서 '울컥' 거리려 한다.

마땅히 우리도 그래야 했으니

저들 세대들도 우리에게 그래야 한다.. 라는 게

내 속의 오래된 저항들이다.

이게 과연 '평화'를 깨칠 만큼 큰 문제던가?
'성경'의 말씀은 분명히 '약함은 강함'이다... 라고 하셨다.

그 약함을

이런 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아들이 그렇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내가 약해지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특별히 중년을 깊이 들어서

힘이 노쇠해가는 우리 40-50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사회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더욱 그런 강함을

잃는 상실감이 커져 있을 수 있는 상황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됨은

내 오래된 '관념' 이 너무 키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깨려고 하니 속상하다.

답답하고 화가 나려 한다.

'왜...??" 한다.

자꾸만 부딪쳐 오는 속상함의 정체는

그거 였다.

강하고 싶어하는..

그 선을 본질이 아닌 '오래된 관념'의 습관에 잡아오는 것.

그 선을 넘어간다 하며

나름의 위신, 체면(어른, 상사..)을 보이고 나타내기 위하여

과도한 액션을 취하고

그게 버릇이 되면 ' 화', 급한 분노로 나오게 되는 것.


비단 이것은 내 문제 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새 땅콩 회항, 모녀 갑질.. ... 의 수도 없는

사회적 강자이고 싶은 자들의 갑질 행태로 나오는게 아닌가?

그거..

본질과 비 본질을 구분하기 힘들게 만든

사단의 장난이 아닐런가?

얼마나 힘들면

점차로 그런 사회적 문제들이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가?


기도하고 그 문제만 가지고 집중으로 묵상을 해보았다.

울컥 거리련다.

아들을 불러 잔소리 하고 싶다.

잘못 가르킨 아버지가...하면서 위신을 찾고 싶다.

 

그러나...   말씀이 있으시고

난.. 말씀을 조금씩이나마 신경을 쓰고 있다.

말씀을 대입하여

'모든 이론을 파하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로.. ' 하면서

그 관념들을 십자가를 연상하며

가만히 집중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무렇지 않다.

깨끗하다.

화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 해야 할 것 만 같다. 


배운게 있다 .

감정 만 정확히 표현해주면

자식들은 알아서 배운단다.

다 큰 아들.

잔소리가 뭔가..

그래서 한참을 있다...제 방에가 노크를 조용히 하고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보고 나눈 후

"아들아..

내가.. 이래서 조금 속상했다."

아들이 반응이 조용하며 얼굴이 부드럽게 웃으며

아버지 소리가 안들리실래..주무시는가.. 하다가...한다.

그렇다.

마음이 좋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있다.

나.

오래된 이러한 역기능의 관념들이

아직 완전히 벗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인격적으로 온화한 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 말씀으로 , 성령으로 깊이 인도 받는 자가

이래도 되는 가 ..하는 초조함이 있다.

그거..

지나치면 '자아'지만

'죄송함'이면 회개하고 되풀이 주님께 나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아침에 묵상을 앞에 대하니

" 요셉과.. .다죽고' 한다.

그렇다.

그게 정답이다.

아무리 대단한 권세도

위인도 .. 시간 앞에서는 다 스러져 간다.

하나님의 세상에 지정해주신 불변의 원리다.

내.. 아무리 뛰어난 이룸을 이루고

혼자만 아는 것 같은 교만함도...

세상을 다 알아 칼로 재고 자르고 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을 것 같아도

결국은 '다 죽고'

기억이나 해줄 사람 얼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서 목숨을 바치고

왕위를 뿌리친 역사의 로맨티스트들도 '이혼'하고

삼개월 지나면 사랑은 감정은 식어 간다.


나.

이제는 '죽어야 한다'

자아가 그래야 한다.

더 이상 나를 드러내야 할 당위성은 없다.

하나님이 어제의 내 묵상과 얻음을 기뻐하시고

다시한번 도장 찍으신 모양이다.




하나님 아버지.

깨달은 바 이렇습니다.

'~ 을 해야 한다'는 것이

더이상의 내 속을 움직이는 '소리'들이 되지 않고

' ~ 할 수 도 있을 듯하다' 라는 부드러움으로 바뀌어야 할 것.

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약해지고 궁핍을 기뻐하고... '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 결과가 내 자아가 죽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오늘 말씀에

'다 죽는고'

다 잊혀져 결국은 세상에 시간에 파묻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세상에 머물다간 흔적이고

그것은 유사이래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봅니다.

이제 '히틀러'

그 희대의 악마가 '이야기 '거리 처럼 느껴지고

곧, '아베' .. 그 저주하고픈 대상도

'김정은' ... 그 불쌍한 사단의 이용대상도

결국은 몇 십년 후에는 스러지고 말것이며

그 보다 훨씬 존재가 적은

저 같은 자의

'존재 확인 받음'의 몸부림,,그로 인한

아들이나 타인에 대한 '갑질'의 헛됨도

모두 '다 죽어'  버리고 말 것이란 것입니다.

누구하나 저를 기억할까요?



오직 주님.

예수 이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것으로 영생의 한자리를 얻을 자격을 얻었음 만을

기뻐해야 할 듯합니다.


주여

부디 간절히 깨닫고 바라옵는 것은

이러함이 하루의 몇시간 기억으로 스쳐가지 않고

매사 삶속에서

각론 적으로 펼쳐지고 응용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 되길 빕니다.


특별히 새로운 시절이 내일 모레부터 시작됩니다.

새로운 삶속에서

예수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 자 되길 원합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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