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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자유롭다 (삼상 14:24-3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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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자유롭다 (삼상 14:24-35)

주하인 2008. 5. 31. 12:14

제 14 장 ( Chapter 14, 1 Samuel )

 

 하나님

예수님

어서 오시오소서

하늘 향해

확성기를 들고

마구 소리..

아니..

찬양을 하고 싶습니다.

가끔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자유로이 흐름을 느낄 때는요...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사울이

보기에 신실하게 행동한다.

백성들에게

금식하라 한다.

그리고

안들으면 저주한다고 까지 한다.

 

그러나,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라는 구절에서

그로 인한

그들의 고통이

슬쩍 드러나보인다.

 사울의 신실하려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한다.

 

 

 사울은

어딘지 모르게 버겁다.
  
  
 
 
29.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요나단이

아버지의 그 결단을

아쉬워 한다.

 

 이게 비단

현실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덜 처단한 것이 아쉬워서 일까?

 

 요나단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이 느껴진다.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채

      먹었더니

 

 백성의 죄를 행함.

마치 허겁거리는 아귀같다.

 잘못된 신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

더욱 큰 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3.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여호와께 범죄하다'라고

정죄한다.

틀림이 없는 죄이긴 하다.

그리고 나서는 여호와께 단을 세웠다.

틀림없이

잘 믿는 신앙이다.

어디하나

무어라 할 데가 없는 믿음이다.

 

그러나,

사울은 버겁다.

 

 

 요나단은

단도 쌓지 않고

주님 앞에서

훌륭한 행사도 하지 않고

금식도 행하지 않으나

자연스레 느껴진다.

 오늘

금식대신 꿀을 찍어 먹고

아비의 선언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외적으로 보아

그는

그리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든든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울의 영적 욕심은

무엇  때문에 그리 버겁게만 느껴지는가? 

 왜 인가?

 

 우선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금식은

전적으로 '자신'의 결단이라는 것이다.

주님께 응답을 받거나

기다렸다는 구절이 없다.

최소한 결단을 위한

가슴치는 고민이나 고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제 사무엘에게 질책을 받고

심적인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많다.

그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또 한번 실수를 거듭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백성들의 흩어짐을 보고

블레셋에 의한 두려움을 느끼고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야 마는

그의 심성과 틀림이 없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절대로 자신 속의 밀림에 의한 것이지

그게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의 그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자신의 意나 義'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빌었을 것이다.

 반면

요나단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영감에 의하여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다.

어제 묵상에서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이 나오면서

블레셋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일의 변이 '하나님이 하신다.'다.

오늘

꿀을 찍어 먹고는

눈이 밝아지는 것은

비단

육신의 영양분을 통하여

육신의 눈이 밝아짐을 뜻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연스레이 행하는

육신의 행보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일 수도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요나단의 자연스러움은

'하나님'을 늘 인식함에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려고하는

의지를 놓지 않는 자들은

설령

그 행위가

밥을 먹는 숟가락질에 지나지 않고

밥을 씹는 저작행위일 지라도

회사의 일을 하는 중이라도

고객을 면담하는 자리일 지라도

어디에서도

그의 주님에 대한 충성이 나오는 것이다.

 

 자기 의가 들어가면 안된다.

주님을 앞서면 안된다.

일상을 무시하는 영적 욕심도 위험하다.

 

그것은

이원론에 불과하다.

삶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인식해야 한다.

코람데오,

주님 앞에서 행하는 의식이

늘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게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남들에게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 길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아버지가 바라지도 않는 일들을

늘 벌이며

사고나 치는 아들이

달가운 부모는 그리 없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의중 대로 따르는 것이

진짜 효성이다.

 

 오늘도

주님을 의식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다.

비록

조금 느리고

비록

조금 초조하고

비록

눈 앞에 내 손 내밀어 해치워버리면

금방 될 듯싶고

비록

주님을 위하여

폼날 일일 듯 싶어도

 

주님께 여쭈어 보고

주님의 뜻을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는

그러한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것이라 짐작하지 말고

그러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런 하루가 되어야 한다.

 

 

 

기도

주님이시여

오늘 하루도 지키소서.

특별히

성격급하고 모질었던

저 주하인을 붙드소서.

이리도

남의 이야기를 통하여서는

쉽게 이야기 하고

잘 깨닫기도 하지만

제 일에 닥치면

마치 사울이 그랬던 것 처럼

마구마구 주님을 앞서가는 자가

바로 저 올시다.

그래서

남들에게 버걱 거리는 모습으로 보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았던지요.

주님

부디

가만히 가만히

조신하게

주님의 뜻을 살펴가며 사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게 제 영혼의 원리가 되어

요나단의 자연스러움으로

제 인격의 향기가 발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하루 지키소서.

내일까지

당직입니다.

일요일을 거치는

저의 영혼이

마치 길 잃은 고아 같은 일이 벌려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시는 환우 분들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게 하소서.

남들을 위한 하루가 되게 하소서.

특별히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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