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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는 왜 부득이인가?( 삼상 13:1 - 23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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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는 왜 부득이인가?( 삼상 13:1 - 23 )

주하인 2008. 5. 29. 10:20

 

 죽을 때까지

하나님만

바라게 하소서.

 

 

 

 

제 13 장 ( Chapter 13, 1 Samuel )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 
 
  많이 기다린 후

왕이 되었다.

 

 이년 이 지나고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왕의 자리가 문제이던가?

너무 편안하고

교만할 수 있는 자리..

  
 실수를 하게 된다.

소몰던 시절과는 약간 다르다 .


  
 
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 하매  
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원칙을 어긴다.

번제는 제사장이 아니면 안되는데..

편법이다.

 

 그 편법의 논리가

아주 '현대적'이다.

 

 백성으로 이루어진 군대들이

하나하나 흩어지니

초조하기도 했겠다.

이해는 간다.

 

 오신 다는 분께서

오시지는 않으니

X 줄이 타고

속으로 속상하다.

 

 환경은 조여오고

두려워진다.

 

 왕으로서

체면도 있다.

 

 여러가지 조합을 해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일런 듯도 싶다.

주위에서

그러라고 권한다.

그게 합리적이고

그게 하나님의 뜻일수도 있다.

 

 주님께 '번제'드리는 게 중요하지

누가 하는지

그 형태가 무엇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사울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위태롭기도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세상에

이런 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히면

이해 못할게 하나도 없다.

 더구나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라고 까지 예화를 들이대면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지니고 왔던 '신앙의 틀'마져

흔들려 버린다.

이게

혹시

너무 미련한 짓은 아닌가?

너무 고리타분하지는..

 

 

 그러다가

머리가 뒤죽박죽,

에라.. 하고

일을 해치우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더구나

현대는

자아를 있는 대로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문화 속에 있다.

 

사울의

저러함이 이해가 가지 않나..

인간적으로 애정이 간다..의 논리가 펼쳐지면

꼼작 하지 못할

죄악 구분 불가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도

아직

사울은

첫 죄를 짓는 상태라

혼란 스럽긴 할 지 모른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솔직하게

이런

대꼬챙이 같은

어르신이 있어서

그 어르신이

'너 이거 잘못되었으니 고쳐라'하고

서슬 퍼렇게

야단이라도 치면

아뭇소리 하지 못하고

힘들어도

고치기나 하지..

 

 지금의 세대는

이러한 소리하면

큰 일 나는 세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그런다.

 

 ' 넌 망령되이 행했다. "

 

 망령이란 무엇인가?

어찌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적인 눈과

편협하고 보수적인 신앙관으로

매도하고

어리석고 구태의연하고

냄새나는 구세대라 몰아부치면

어찌 버틸 수가 있는가?

 세상이 마구 변해 가는데

혼자만이

옛날 방식의 '성령'운운 한다 매도하면

어찌 서 있을 수 있는가?

 한 번의 '성령 체험'으로 인한 구원과

그에 따른 얼마 간의 영적 열심으로

밤 낮없이

주린 사자처럼 찾아드는

사단의 궤변과 논리와 공격에

어찌하면 서 있을 수 있는가?

 

 사울은

사십살 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영적 훈련을 받고 났는데도

이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게

그가 바보라서 그런가?

망각의 최고수라서 그런가?

그가 부족한가?

 

 어찌 보면

그의 오늘 보이는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은

모든 인간 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약점일 수 있다.

누구나 다 그럴 수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주하인이라면 뭐 다른가?

사울을 삿대질 할 수 없음을

위에 길게 늘어쓴 글을 통하여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다.

 

 나

무서운 상황과

촉급한 상황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 - 분 ^^;;- 가 오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 사실을 빌미로

사울과 같은 일을

여지없이 해치울 것 같다.

지금 같아서는...

 

 그래서

그게 무섭다.

오늘 묵상이

너무 뚜렷한 잘못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그러지 않겠다라는 자신감이 없다는 게 문제다.

 

 날이 갑자기

지독히도 무덥다.

진료실이 더워서

나가서 시원한 슬리퍼를 사다가 신고

옷을 벗고

수술 가운으로 바꾸어 입고

다리를 걷고 있어도

후덕지근한 것이

내 영적인 답답함을

그대로 보이는 것만 같다.

사울의

사무엘 선지자 기다리기 전까지의

답답한 심사를

그대로 그리는 것만 같아서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인간적 본성을

20년 이상의 연단 기간을

잘 거친 사울에게서

왜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왕이 되고 이년 동안이 문제다 .

너무 편한 상황

너무 ...

이 '너무'가 문제다.

'너무'가 '부득이'를 불러온다.

 

 어느 정도의 고난이 있어야

주님이 가까워진다.

말씀으로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변하지 않는다.

 

 몇달 전 부터

환자가 갑자기 늘며

수술이 정신없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시간이 줄어들며

전인치유 찬양도

손을 놓아서인지

마음이 답답하다.

 

억지로 억지로 글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하는 게

그나마

날 주님 앞에

붙들어 주는

유일한 끈이긴 하지만

이나마도

아침에 완성하고

하루를 시작하던

처음 몇년과 는 다르게

오후 늦게야

마치

신문 집필을 하듯

매너리즘에 빠져

그럭저럭 하고 있다.

그리고는 '해냈음'하고 있는 듯하다.

 

이게

사울의 영적 상태랑 무엇이 다른가?

그래

남들도 못하는 데

나라고 뭐..

이정도면..

부득이 .. 그럴수도 .. 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의 기쁨을 맛본

그래서

열심의 기쁨을 아는 자로

내 나름의 영적 소수자의 카테고리에

집어넣어도 무방하지 않는가 생각하던 자로

이러한 모습은

달갑지는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새벽예배를 가고 싶고

며칠 금식을 하고

밤을 새워 기도하고

중보하는 모든 곳에 찾아가고 싶다.

하지만

못한다.

못하면서

그냥 이럭저럭 시간을 잘라

세상의 흐름에 맡겨 버리고

나머지 남는 자투리에

주님의 일을 하는 것.. .

이것이

문제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자.

주하인

조금 더.....

 

수십년 되풀이 해온

리듬없는 생활은

결단을 힘들게 한다.

 

주님은

해이해지지 말기를 권하시는 듯하다.

영적인 해이는

사울의

부득이를 불러온다.

 

 부득이가

왜 부득이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부득이가

왜 부득이일수가 있는가?

 

이런

뚜렷한

신앙의 틀을 유지하고

그 틀이 주는

영적인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단 하루라도 게을리 하는 것은

사울의 부득이를 가져온다.

 

사울의 부득이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적용

 

1.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자

 일찍 출근한다.

 

2. 중보를 한다.

 

3. 아침에 묵상의 완성을 꾀한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난 늘 주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는다.

 

6.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달라 기도한다.

 

 

기도

 

주님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신앙인 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열심이 지나치면

어느새 '율법'으로 변해있고

겸손이 지나치면

교만의 다른 모습이 되어 있고

주님 성령충만을 사모하다 보면

방종의 틀에서 허덕이게 되고

자칫 열심을 내다가

이정도면 하고 잇다가는

부득이의 늪에

빠지게 됨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

간절히 바라옵기는

단 하루도

말씀을 놓치지 않게 도우소서.

바빠도

바쁜 만큼

주님의 시간을 더 할애 하게 하소서.

잠이 줄더라도

그리하게 하소서.

일찍 잠을 들게 하소서.

일찍 일어나게 하소서.

죽을 때까지

주님 말씀 가운데 살도록 하소서.

사는 동안

내 핏줄에

주님의 성령이 운행하도록 하소서.

내 피의 성분이

주님 예수님의 보혈과 같게 하소서.

주님

간절히 바라올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아시지요?....

주님..

아시리라 압니다.

주여

더 힘들기 전에

들어 주소서..

 

 

제 자식들도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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