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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닮지 않게 하소서(삼상 14:36-5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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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닮지 않게 하소서(삼상 14:36-52 )

주하인 2008. 6. 1. 08:31

제 14 장 ( Chapter 14, 1 Samuel )

 

 적은 자일지라도

주님의 원리 안에서

사는

그런 자가 되게 하소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이렇게도

멋진 노란색을

짙푸른 물감 같은

주님계신

하늘 앞에 꽃피우는

민들레 같은

그런 자가 되게 하소서.

 

 

 

 


36.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가로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가로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그냥 싸움에 나가려던 사울.

다행이도 좋은 제사장이 있어서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 나아가사이다'라는 말로

영적인 방향을 잡아준다.

 

 아직은

그에게도 올바른 사람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아무리 촉급한 시간이라도

주님 앞에 먼저 나가는 걸 잊으면 안된다.

그게 행위와 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께 나가는 게 기뻐서 해야한다.

주님께 나가지 않는 것 자체가 가슴을 찔러서 그래야 한다.

주님 앞에 나가는 것 만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기초임을 확신할 수 있어서야 한다.

 

 사울은 마지못해 그랬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사울이

멋진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하나님께 여쭙는다.

 능구렁이 같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속상하셔서 그런듯 싶다.

말하기도 싫으신듯하다.

그의 순수하지 못한 태도가

역겨워 그러실 수도 있다.

 

 사울이 역겹다.

 

 

  
38.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 보자
 

 사울은

표징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구하는 태도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죄가 자신에게 있음은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다.
' 이 죄

 즉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뉘게 있는가 알아보자'라고 한다.

 놀랍다.

모든게 남탓이다.

 

 신앙인의 모습은 띠지만

회개하는

참신앙인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아니

오히려 남에게 자신의 죄를 투사하는

저질의 감정을 보인다.

 

 이게 무섭다.

신앙의 형식을 갖추고

어디하나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는 타락했다.

 

 사울이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린다.

사울이 무섭다.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심지어는

자신의 죄를

요나단까지라도 내려 물릴

철저한 각오까지 하고 있다.

 

 정말

신앙의 이름으로 타락하는 자들의

냉정함은 고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의 행위로 정결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가로되 너의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 요나단이 고하여 가로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나이다
 

 요나단은 잘못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 사울의 명을 어기는 상황이 되기에

그는 순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인다.

 


 
44.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신행 일치

언행일치,

엄청난 신앙인 사울

대장부 사울

풍운아 사울...

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우리의 눈에는

잔인하고

미친 사람 같고

미련한 사람같다.

 

 사울이 걱정된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백성 들이 열렬히 변호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언된

왕의 행사를

감히 백성들이 변호한다.

 

 그 변호의 내용이 이렇다.

'요나단이 오늘 하나님과 같이 일했다.'

 요나단의 멋진 공적

그의 놀라운 믿음

그의 온전한 의지,

그리고

아버지 사울의 결정에

단호히 수긍하고 따르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가 '하나님과 같이 하는'

동역의 모습이 분명하였다.

 

이것은

아무리

그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직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서언'의 지킴이라는

절대 준수의 상황에서도

거부하는

놀라운 일을 유발하게 되는 것을 보아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

신령하고 신실한 자들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나단이 대단하다.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48.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이게 생각할 문제다.

 

사울이

신실한 신앙인, 대단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하나님이 역겨워 할

왜곡된 믿음의

냉정한 인격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전이 놀랍다.

그의 용맹이 놀랍다.

 

 이게 잘 믿는 자의 모습의 결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땅에서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며

강청해서라도 받아야할

축복을 강조하는

기복적 교단의 기세가 놀랍고

교세 늘리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고

예수님이 그것 만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양 오도하는

신앙인들이

승승 장구 하는 것을 보며

그게 대세이고

그게 올바른 믿음인 것처럼

변해가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사울의 승리가

정말 축복일까?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계없는

남의 자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 정서처럼

주님도 혹시

그냥 버려 두시는 게 아닐까?

 

우리의

세상적 관심이 유일한 것처럼 보이는

현 시대의 기독교인 들의 태도도

혹여

그러한 버림 받기 직전의 모습은 또 아닐까?

 

 


52.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사울은

큰 싸움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聖戰'을 외치며 독려하였을까?

얼마나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착각하기 위해 애썼을까?

 그러면서도

그는 성전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있는 사람,

용맹한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한다고 자기 명분을 세웠을까?

 그러면서

기세가 높아지고

승리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자신의 믿음이 성장한다고

착각을 했을까?

 

 사울을 보면서

다시금

신앙의 쉽고도 어려움을 보고 있다.

 

 하나님과 자신의 의.

하나님과 동행함과 하나님을 명분으로 하는 자신의 결정.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과 세상의 힘을 취함.

승리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짐과 승리를 함으로 주님을 높이려는 의지.. 사이에서

날마다

얼마나 많은

자기 반성과 돌아봄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장면들이다.

 

 요나단 같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동역하는 자들과

사울 같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 사이의 차이는

그 운행의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

강팍함과 여유없음으로

구분이 된다.

전자는 기쁨과 평강이 주 감정이 되고

후자는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강팍해져가는 감정이 그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사울은

어디에서 부터 잘못되었는가?

 바빠서 그랬다.

그러면서 마음이 분주해서 그랬다.

하나님의 기쁨을 놓쳐서 그랬다.

두려움이 그를 그리 만들었다.

 

 수술 및 외래 방문환자가 늘면서

시간이 없다.

아침에 묵상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블로그에 글 올리는 시간이 줄어들며

점심시간 이전까지

틈 날때마다

하나님을 묵상하던

꿀같은 시간이 짤리면서도

안타까움을

점차로 '할수 없어서 그렇다'라는

자기 변명으로 돌리면서

내 속이

점차로 답답해 지는 듯하다.

마치

사울의 변화가

내것인 양

가슴이 '철렁'하기도 하다.

묵상의 장면을 글로 옮길 때면

'렉시오디비나'

그 장면에 들어가 쳐다보는 듯,

어느 때는

내 눈 앞에 선하게 장면이 보이기도 하고

그럴 때 가슴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어느 때는

내 눈에 눈물이 스르르 스며나오며

장면과 상관없는

감사의 고백을 입으로 웅얼웅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었다.

 적용이 일상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그러할 때 얻은

영적인 감응과

놀라운 영감을

많은 글로서 표현하기도 했었다.

찬양을 하면

감미로운 소리가 나오고

내 목소리는 촉촉했었다.

 

그러나,

요새는

자꾸 힘이 든다.

묵상이 뒤로 밀리고

의무에서 하는 듯하다.

그나마,

모든 죄 중에서도

주님을 잊지 않으려는

잠깐의 노력을 보시고

주님은 날 기뻐하실 것임을 알기에

이나마도 놓치지 않고 있지

나의 매일매일 묵상 진행이

위태위태하다.

영상이 전혀 안떠오르는 빈도가 많아진다.

부담이 온다.

 

 사울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회개하자.

오늘은 일요일

당직이라서 교회는 못가지만

오후 2시에 있을 병원예배에 꼭 참가한다.

가기 전에

회개의 기도를 올릴 양이다.

 

남 탓을 하지 않겠다.

사울의 죄가 깊어지는 것은

자신의 죄를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남을 긍휼히 여기겠다.

남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마음을 가지겠다.

이해하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말을 열심히 쓴다.

 

성경을 여섯 장읽겠다.

 

세속의 성공을 부러워 하지 말자.

주님이 허락하시는 성공은

자연스럽다.

부드럽다.

주님이 허락하시길 기다린다.

 

 

 앞서지 말자 .

주님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린다.

 

 긍정적이 되자

단,

내가 목표를 정해 놓은 강청적 긍정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주님이 성령으로 인도하시면

순종하는 긍정이 되어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서두르지 말자.

 

 어이없더라도

남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면

요나단처럼 수긍하자.

 

 

 

 

 

기도

 

주님

걱정하고 고민하고

묵상집을 들 때마다

피하고 싶던 이유에 대하여

사울이 극명히도 보이네요.

사울 닮지 않게 하소서.

 그의 강팍함을 닮지 않게 하소서.

 

자연스럽게 하소서.

주님

말씀에 눈물과 기쁨을 회복시키소서.

렉시오디비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환상처럼 만나게 하소서.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길 소원합니다.

주님 도우소서.

 

주님

잊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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