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완전한 기쁨(삼하19:31-43) 본문
34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35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
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36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줄어들었다.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싫은 것인지 조차 실은 잘 분간이 가지도
않는다.
음식을 먹어도 맛도 없다.
아무리 보기 좋아보여 입에 넣어도 크게 느낌이 없다.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자의 노래를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그리 좋던 여인의 달콤한
목소리도 나른한 지나가는 소리로
느껴지고 여인의 향취조차 맡을 수가 없다.
나이가 팔십세가 되니 세상의 모든 향락이 딴 세상의 것 처럼
느껴진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이럴까?
아무리 노력해도 오감 모두가 둔해져 있다 .
세상에서 들어오는 모든 지각을 뇌가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육신은 피곤하여 쉽게 지친다.
정신은 한곳에 오래 집중하기 힘들다.
재미있는 것도 없다.
흥미 있는 것도 없다.
크게 고통 스러운 일도 없다.
열정도 없다.
그냥 무미 건조하다.
마음은 서서히 지쳐간다.
아무런 자극없는 깊은 고독감에 점차로 우울해져 갈 나이다.
노인의 우울증은 깊다.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르다.
그 우울함 대신 그는 기쁨에 찬 모습이다.
열정보다는 잔잔한 기쁨이 느껴진다.
힘보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가 생각나면 진한 그리움 보다는 한줌 미소가 걸릴
듯하다.
무엇이 하나의 희망도 없을 노구에 힘을 주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봉사다.
그는 다윗을 지극 정성으로 도우며 깊은 기쁨을 느꼈다.
그랬다.
그는 도움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종이지만 김함을 다윗에게 천거하였다.
그에게는 아무 바램이 없었다.
단지 그는 기뻐서 할 뿐이었다.
오늘 묵상을 하면서 참 기쁨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았다.
참 기쁨이란 사심없이 남을 위할 때 생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기쁨은 세상의 물욕,명예욕 등의 정욕을 채울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것 보다 훨씬 시작은 약하나 지속적이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바르실래 같은 육적인 소망이 사라질 때 찾아오기 쉽다는 사실도 알았다 .
살다가 겪는 하나 둘의 상실이 내 소유를 줄여서 고통을 초래하지만...
상실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좀더 본질적인 곳에
관심을 가지면 그 고통은 고통이라기 보다 기쁨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러지 않으셨던가?
육체적인 것과 성령의 소유는 같이 할 수가 없다고..
고린도 후서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하셨다.
현실의 우리가 겪는 고통은 우리 육신의 기쁨을 낮추고 영적인 소망을 늘리시기 위한 주님의 작업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소유를 상실함에 대하여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기쁨... 더 높은 가치체계인 하늘 나라 소망에 한발 더 가까워 졌음을 기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오늘의 바르실래의 실례를 통해서 보여 주신다.
주님은 바르실래의 평온과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자식에게 지속적인 연단을 주신다.
" 나의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4:10)"
정금 같은 상태.
평화로운 마음
잔잔한 기쁨
남을 위한 헌신.
우러나오는 사랑.
......
기도
주님..
오늘 오랫동안의 연단을 통해 스며나오는 기쁨의 실체를 바르실래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통해 울고 웃던 저는 바르실래를 보며 부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그 상황에 갔을 때 과연 바르실래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에 고정된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과 평강의 실체를 보았으니 그 실체를 향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소서.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께서 오라 하실 때 기쁨으로 '주여 .. 제가 여기 있사오니
받아주소서 .. '하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저를 허락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웃은 나의 최후의 아성. 이웃이 잘 살고
튼튼해야 나도 안전한 법이다.
-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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