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온 우주라도 받아 들인다(슥14:1-11) 본문

구약 QT

온 우주라도 받아 들인다(슥14:1-11)

주하인 2007. 4. 26. 08:41

( Chapter 14, Zechariah )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 세상과는 상관없이 난 주님의 평강과 사랑을 받아 들이렵니다. )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

 

예루살렘의 백성.

그들이 심하게 곤욕을 받는다.

믿는 자들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을 받는다.

 

 현재의 편안한 생활.

주님을 믿으며 누리는 평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눈을 낮추니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삶의 수단들.

 

그러나

한번씩 닥쳐오는 생각들.

애써 외면하지만 가슴 깊이 누르는 불안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도 있다.

 

애들이 반항을 하여 탈선이라도 하면..

지금처럼 큰 의욕없이 살다가 갑자기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아직 아파트 살 때 빌린 돈도 있는데 모아 논 것은 없고...

아내가 나랑 살기 싫다고 하면..

아플 때 아무도 안찾아오는 병실에 덩그라니 놓여 있다면....

.................................

 

이러한 생각들이 비단 내 생각 뿐일까?

 누구도 말로 표현 못하고 생각에 뚜렷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지 어느 정도 이런 불안감은 있지 않을까?

이런 불안감의 극이 '죽음'이고.

그러기에 좀더 뚜렷하고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여 재물과 힘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현세의 삶이 좀 더 '경쟁'에 매달리게 된다.

보라.

얼마나 많은 재테크 방법과 노후의 안락을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 지는지..

이처럼 두려움은 사람을 한 곳으로 몰아간다.

오직 이 땅위의 안락한 보장.

Fortress !

 

 시선이 땅에 고정되다 보니 위엣 것, 진리, 영원, 천국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진리이신 그 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우스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현 세대다.

 불안이 그들을 몰아가며 그 끝 이후에는 생각지 않으려 한다.

모르는 것은 묻어 버린다.

묻어버린 것을 들추고 끄집어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비밀이 캐내어져 진실을 마주하기 어렵도록 하는 것은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삶은 정신이 없이 돌아간다.

 새로운 거, 새로운 거.

서면 넘어진다하며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고

끝없는 쓰레기 같은 정보의 나열이 온 세상을 하나로 묶어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모를 틈을 주지를 않고

정신없이 휘몰아 친다.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을 기억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온 사회적 현상이

하늘 보다는 땅에만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문화적 조류가 비단 불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인가?

 세상을 살면서 '위엣 것'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를 지은 것이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는 주님의 선언이

너희의 죄를 위하여 내가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면서 피를 뿌렸다'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 귀에 제대로 들리고 가슴에 지속적인 감동으로 내려오고 있는가?

 매일 같이 사랑하는 그 분, 하나님을 위하여 그 분의 마음에 부응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삶속에서 부딪치는 자들에 대하여

주님을 생각함으로 한번 정도 참아 주는 ...이런 아주 가벼운 정성을 드림으로써

주님을 흡족하게 하는 그런 가벼운 멍에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는 하는가?

 

 아니.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소리소리 기도는 하지만

그 때 뿐, 세상의 삶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과 하나도 다름없는 삶의 행태를 유지하기 바쁘다.

아니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욱 옳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주님께 용서 받았다는 선민의식으로...

주님께 축복을 받고 잘 살아야 하는게 우리의 의무라고 가르치는 소수의 기복적 목회자 들의 직간접적인 인도에 알게 모르게 그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두에 써 있는 불안감의 실체 - 비록 뚜렷이 그러하든, 막연히 그러하든 -가 과연 믿는 자로서 피해갈 수 있는 일인가?

신자, 불신자를 떠나서 환란과 고통은 이 세상 삶의 필연일 진데, 그걸 어찌 받아들이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정말 예수님에게 더 매달려서 기도하면 없어질까?

나를 비켜갈까?

지금의 행복이 끝없이 유지가 될까?

내 근육세포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한없이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내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과 권위는 끝없이 유지될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내 죽을 때까지 내 곁에서 방끗 방끗 웃게 될까?

절대로 기도하는 나와 내 주위는 암이 비켜갈까?

열심히 일하고 복권 맞아도 늙어감과 그에 따르는 공허감은 줄어들까?

돈은 많아서 많은 젊은 여인들이나 이성들을 사귀어도 재미와 그 흥분 감과 참신함이 예전과 똑같이 유지가 될까?

 내 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 등걸같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

아이들은 변함없이 내 주위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띠우면서 존경의 눈초리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 아빠를 끊임없이 대할까?

 내가 아프면 자식들은 회사를 안다니면서까지도 내 곁에서 날 위해 있어 줄 수 있을까?

내가 배고프면 그 아이들은 최대한 정성껏 잣죽을 끌여서 며느리와 함께 와서 무릎꿇고 날 위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오늘 묵상 처음 부터 이렇게 나온다.

"여호와의 날" 에 예루살렘, 즉 믿는 자들이

재물을 약탈 당하고, 부녀를 겁탈 당하고....

몸서리 쳐진다.

이것을 읽으면서 난 우리 아내, 내 자식들의 그러함을 상상해 보았다.

가당치 않은...

난 내 현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더욱 발전하기를 주님 안에서 오래 기도하고 바래왔다.

그러함에도

그게 반드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믿는 자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고통.

심지어는 어찌하면 가족까지 ...

충격이다.

불안의 실체가 눈에 들어나는 것 같다.

가끔은 믿는 자로 이래도 되나 하였지만 그럼에도 너무 오래된 습관이 날 물고 늘어질 때는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였던 것.

그렇다면 어찌하는가?

 이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게 오늘 묵상의 화두이다.

 

 

 

 얼마전 '카네기의 성공론'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불안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그 불안의 끝까지 가정을 한 뒤 그 것을 받아 들인 후 그 바닥에서 대처해야할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고 되어 있다.

그런 후 즉각 대처를 하라고...

그러면서 몇가지 예를 든다.

링컨은 젊은 시절 굉장한 비방가요 비평가로서 적이 많았다.

그러다가 대결직전 죽음 직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멈추어진 후 부터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여서 나중에는 정적을 요직에 앉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큰 인물이 되었다는 얘기,

어떤 사업가는 수백만 달러의 부도난 후에도 그냥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얘기.

나치에 사형당하기 직전의 유명한 간호사가 남기는 유언 중,

'나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난 온 우주라도 받아들인다.'라는 예화등이 감동스럽다.

세상적인 성공론의 책도 이렇다. 

 

 

 '현실 요법'에는 이런 게 있다.

가짜 갈등.

진짜 갈등은 남들과 나 사이의 갈등으로 남들을 고치려 하여 생기는 갈등으로 진짜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가짜 갈등은 갈등을 내 이유로 돌려서 받아들이고 나를 바꾸어 버리면 되는 것.

세상의 90%는 다 가짜 갈등이란다.

그냥 내가 받아 들여야 할 것으로 치부하고 받아들여 버리면 갈등이 그 순간 사라진단다.

이게 정신 건강의 기본이다.

 유대인인 아들러라는 의사가 만든 현실 요법도 이렇게 성경적이다.

 

 성경은 이렇다.

 

고후12:10)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외에도 많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주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신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도리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

 

난  주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다.

얼마 전 부터..

그리고는 그 말씀이 내 모든 인지와 판단의 기준이 되기로 맘 먹었다.

그 분이 내 속에 빨대로 끼어 넣어 말씀으로 부어 넣으신 후 들어온 말씀이 패악과 엉뚱한 생각으로 가득한 이내 심령에 녹아들어가서 하나하나 내 눈을 통하여 입을 통하여 심령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하실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감당키 어렵다.

내 아내가 내 보는 앞에서 .............................

내 얼마 되지 않는 재물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뛰려한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귀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지금의 주님의 평화의 틀 속에서 전혀 또 다른 옹벽을 쳐가고 있는 것만 같다.

 

주님은 아침에 나에게 그 벽을 한번 깨보길 원하시는 것 같으시다.

 

그래서 예전에 그 불안의 정체를 한번 확대시켜 받아 보고 싶다.

그리고 아프고 힘들지만 그걸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가만히 묵상하며 기도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비단 그것 뿐이 아니다.

오래 동안 내 속에 금기처럼 만들어 왔던 여러가지 터부를 하나하나 내려놓고 받아 들여 보아야 겠다.

그것을 내 가짜갈등으로 돌리고

최대한 바닥으로 가져가서도

주님의 기뻐하시기에 내가 감내할 약함과 핍박으로 받으면서 의도적으로 기뻐할 노력.

그러다 보면 그게 내가 약해진 것이 주님이 쓰실 강함으로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문제는 이 수많은 터부들과

그것을 하나하나 주님 앞에 내려놓는 데 대한 시간과

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다 이루어 질 때쯤

나는 많은 나이가 들어 있을 것이고

그때 쯤이면 내 영혼은 아주 투명해져 있을 거 만 같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

   이실 것이며 
 

( 상상속의 물가를 표현하는 사진 찾기가 어려워서 그만..ㅎㅎ )


 작년에 이 스가랴서 장면을 묵상하며

난 마치 동양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가

좌우로 생수가 흐르는 천국 강변에서 코끝에 싱그럽게 들어오는 정자에 누워 - 어디 놀러 나가도 텐트치고 누워서 하늘 보다가 잠자는 게 내 취미다. ㅎㅎㅎ- 물소릴 들어가며 잠을 소롯이 들다가

주님의 안위하심 속에 한없이 편안하게 쉬는 것을 연상한 적이 있다.

 

 위의 저러한 평화가 다 이루어지는 날.

세상의 어떠한 일이 몰아 닥쳐도

어떠한 것이 나를 핍박하고 몰아쳐도

쉴새 없이 두려움이 눌러와도 난 천하의 왕 이신 그 분 곁에서 평안을 누리길 원한다.

 

 얼마 전

은혜가 내 마음에 그득할 때 마구 마구 수첩에 적어 넣은 구절이다.

 

" 난 이 생生에서 진심으로 무얼 원하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

그들의 눈치에 상관없이

주는 사랑을 하고 싶다.

베푸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 사랑이 거부 당할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맘껏 안아주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주가 주신 그 여유로

내 이웃을

내 가족을

내 형제를

내 부모를 포용하고 싶다.

여유가 되면

사회의 소외 받는 자들에게 맘껏 사랑을 붓고 싶다.

이것이 한풀이나 의욕이 아니며

주님께로 흘러 나오는

넘치는 사랑으로 그리 되길 원한다.

제약이 있지 않기를 원한다.

미움 , 걸림...이 없기를 원한다.

그것이 얼마 걸리던

어떤 루트던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리 되길 원한다.

가슴조임 없이

얼굴의 조임이 없이

흔들리는 정체감의 두려움 없이

손가락질의 흔들림이 없이

비교의 허전함이 없이

주님이 주시는

선한 폭포의 넘침 같은 사랑으로

그리하고 싶다."

 

 이게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원함이고 바램이다.

그러나, 은혜가 오니 내 속에서 끓어 넘쳐서 메모장에 마구 끄적인 글이다.

유치하다.

그러나 말갛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면 가능하다.

특별히 마지막에 선한 폭포 얘기가 오늘의 묵상의 '물'이 들어 맞는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은 참 맑았다.

날씨도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하늘은 청명하였다.

기다리는 버스의 정류장에 서 있는 학생아이들의 실루엣이 선명하였다.

지금 돌아서 생각하니.....

 

 주님이 주시는 세상은 아름답다.

그 분의 심성으로 보는 눈은 선하다.

 

 메모장을 펼쳐 읽어 보기 직전까지

난 어제 나름대로 겪던 시험에 의해 마음이 혼란 했었지만

이 글과 주님의 묵상이 또한번 날 정확히 교육하시어서 그렇다.

살아계신 하나님.

할렐루야.

 

 

 

적용

 

1. 어떤 일도 받아들인다.

  창피한 일도

  핍박 당할 일도

 그 어떤 일도 받아 들인다.

 주님이 허락하신 일이다.

 주님께 오히려 영광올린다.

 

 

2. 흔들리는 마음을 기뻐 한다.

 난 살아 있다.

 

3. 기도한다.

 특별히 날 미워하고 내가 싫어 했다 생각했던 자들을 위해서 중보한다.

 

4. 성경을 읽는다.   다섯 장

 주님은 말씀으로 살아있다.

 이제는 '로고스'가 하나님이란 뜻을 이해한다.

 

 

기도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 유난히 삶이 버거웠습니다.

아니

실은 주님을 알고 난 지금도 가끔은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만큼 더 기쁜 이 역설적 사실이 절 힘을 주게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만큼 더 명확해지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느낌이 저에게 힘을 줍니다.

주여

오늘은 특별히 감당키 어려운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눈물이 나려 합니다.

아니

내 속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터부들이 요동을 치기도 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이 깨지지 않는 강하고 질긴 자아의 틀에 주여 깨짐을 허락하소서.

부숴지게 하소서.

허나 주여.

너무 아프지 만은 않게 해 주세요.

힘이 들거든요.

아직은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간절히 간구하옵니다.

어제 묵상의

부어주시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저에게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가 막히다(시40:1-17)  (0) 2007.04.28
와라 (슥14:12-18)  (0) 2007.04.27
금처럼 은처럼( 슥13:1-9))  (0) 2007.04.25
하늘 땅 사람 그리고 주님 (슥12:1-14)  (0) 2007.04.24
잡아 먹힐 양 떼( 슥11:-17)  (0) 2007.04.2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