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기가 막히다(시40:1-17) 본문
제 40 장 ( Chapter 40, Psalms )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오늘은 기가 막히다.
다윗의 그 고백이 어찌 내 속을 이리 잘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분 다윗께서 쉽지 않은 풍상을 거치면서
그것을 다 응축시켜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시와 노래로 토해냈기에 그런 듯하다.
오랜시간 묵상을 하며
생명의 삶 큐티 방에 내 삶에 대하여 부분 부분 올려왔다.
요약하자면
난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하여 나이 38이 되어서야 예수님을 영접했고
영접한 후 드라마틱한 내외적 변화를 가져왔으나 40여년 가까이를 지속해온 세상을 바라다보는 기본 틀인 부정적 생각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삶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후 시작한 이 큐티의 시작은 또한번 내 안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되었다.
2년 전 우연하게 시작한 이 큐티는 '기가막힐 웅덩이 ' NIV로는 '진득진득한 찰흙같이 불쾌한 웅덩이', KJV로는 '무시무시한 웅덩이' 처럼 불쾌한 삶의 틀 속에서 나를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내 발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걷게 해 주시는 느낌이었다.
쉽게 말하면 난 말씀 안에서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분의 말씀 만이 날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수님 믿고 수없이 많이 나오는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를 들음과 머리속에서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다윗께서도 그 찬란한 영광의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질곡과 풍파와 가난해짐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예외일 수가 없다.
주님을 믿으면 이럴 수가 없다는 그런 수없는 혼란이 늘 나를 뒤 따랐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침마다 하는 큐티 속에 살아계시는 그 분이 날 조목조목 집어 주시듯
정말 정확히 말씀을 주셨다.
혼란스런 머리 속의 생각들이
하나하나 끈으로 묶여서 정리되어 가는 듯 해보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펴시는 원리가 눈치 채이는 듯하다.
통합적인...
그러기에 예전에 크게 당황하던 일들이 큰 의미를 주지 못하고
너무 기쁘지도 않고 그리 슬프지도, 걱정 덩어리였고 의심덩어리였던 내가 별 걱정을 안하게 된다.
그러나,
항상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굴곡이 있다.
한번 씩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할 때 난 옛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희망이 보인다.
어둡지만 소롯이 스며드는 빛을 난 본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내 경험된 육체와 영혼은 그 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의 이 고백이 남처럼 들리지를 않는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난 내가 그처럼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지 못한다고 늘 회의적 생각을 해왔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 하찮은 나에게 귀를 기울이사
라는 것은 별로 기대를 하지 못해왔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은 오래된 부정적 사고의 틀의 다름 아니었다.
아무리 주님이 날 사랑한다 날 사랑한다 하여도 난 잘 못 믿어왔었다.
얼마 전 하나님은 살아있는 부모의 투영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 되어진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친적이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분은 무척 시키시는 분이시고 강권하시기만 하시는 분이시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받고 커서 그 양심이 부모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배반하기 싫어서 더 이상의 죄를 짓는 것이기도 하단다.
오늘 다윗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의 일단은 '사랑'이다.
그 분의 도우심을 꿀보다 달게 느끼는 자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표현을 그리 느끼게 되지 않는가?
주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모습에서 기다리는 그 분의 눈에 흘린 눈물이 보일 듯하지 않은가?
들으셨다는 말씀에서 때가 되기까지 듣고도 참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그려질 듯한 하나님의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분 다윗은 분명코 사랑받고 크지 못한 자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영적이 스케일이 그만큼 크다는 것-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정도로-거나 그의 하나님을 향한 회복의 의지가 강렬함으로써 주안에서 올바르게 회복되었거나 둘중의 하나이다.
난
오늘의 이 묵상구절을 보면서 다윗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예전에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느끼지 못했다 .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시편의 구절이 그리 느껴진다.
다윗의 느낌이 나에게 조금씩 크게 현실화되어 온다.
기쁘다.
살아계셔서 수천년을 묶어서 같이 공감하게 하는 것이 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 안에서는 세상의 비 절대적인 흐름과는 달리 절대적인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긍휼
잘못 생각되어진 탓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 자체를 봄 보다는 그 속에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역동을 보고 환경을 생각하게 되고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게 되기는 덕목.
내가 주님에게 그처럼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분이 주시는 이 긍휼의 감성이 내 영혼에 가끔가끔 전달되는 탓이며
내가 남들에게 베풀고자하는 이유가 주님이 주시는 그 긍휼을 그 들을 향해 뱉을 때
내 속에서는 더 할 수 없이 맑고 촉촉한 감성이 흘러 나오기에 그렇다.
다윗께서
' 하나님 ~
내게 주님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세요.
주님 당신의 인자로움이 그립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진리가 필요합니다.
나를 항상 긍휼과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여 주세요"라 부르짖는 마음이 절절하다.
더더구나 그 상황이 재앙이 스스로에게 넘치기 때문에 절실히 느껴진다.
스스로 짓는 내적인 죄악이 얼마나 괴롭기에
'나의 죄악이 내게 넘치므로'라 했겠는가?
이러한 안 팎의 혼란이 남 얘기같지 않기에 그렇다 .
그의 절박함이 머리털 보다 더 많다는 고백이 있기에 그리 가슴에 온다.
난 이런 상황에 도달하면
머리가 뒤죽박죽이 며 세상이 하얘진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오늘 따라 유난히 다윗의 고백이 내 고백이다.
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제 믿을 것은 주님의 은총 뿐이 없습니다.
속히 도와주소서.
가난하고 궁핍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모든 것을 단 하나라도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듯 '궁핍'합니다.
주여
이제 도저히 견디기 힘듭니다.
나는 궁핍니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주님 당신 만이 도움이십니다 .
주님 당신 만이 건지시는 자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도우소서.
적용
1. 무엇이든 주님 만 의지한다.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다윗의 인내를 배운다.
2.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3. 수렁과 기가막힐 웅덩이를 묵상한다.
내 인생에서는 어떤 것이 그런것인가 생각해본다.
4. 그리고 나를 건져 올리는 주님의 손을 묵상한다.
나를 반석위에 올리실 것을 믿는다.
견고한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기도
주님.
시간에 쫓겨 집중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그럼에도
주님은 당신을 생각하고 잊지 않으려 몸부림 치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실 듯 생각하기에
단속 되는 묵상을 끝까지 진행되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난 부족합니다.
그 중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는 이런 모습은 상상을 못해 보았나이다.
주여 믿어줌도 훈련해보지 못한 제 성품의 일종입니다.
오늘 주께서 보이시느 이런 말씀의 구절 하나하나
오늘 제가 느끼고 시행 하여 보기를 원합니다.
주여
당신을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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