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오직 주님 앞에서 울부짖다.(욥16:6-12) 본문
(욥 16:6-12)
아직도
내 자화상은
세상의 판단 기준과
하나님의 그것과
온전히 분리되지 않은 듯 흐릿할 때가 있다.
욥처럼
오직 하나님으로
오직 예수님으로
오직 성령으로
오직 주님 만으로
그리 모든게 판단되었으면 한다.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원망한다.
말해도 근심이 줄어들지 않고
잠잠히 있어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제' 그를 피곤하게 하셨고
온 집안을 패망하게하셨다고 한다.
평안하더니
그 분이 나를 꺽어버리시고
내 목을 잡아 부러뜨리시고.....................
라고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 원망하는
대역의 죄를 짓는다.
한편으로 어이없는 일 같고
한편으로 정말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욥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려는
기본 심성을 아는 우리는 ,
그리고
그의 결국의 주님 앞에서의 승리를 아는 우리는
이것이
꼭 패악 만은 아니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행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아침에 들여다 본
그의 변론에서
원망 보다는
아픔이 느껴지고
주님께 대적 하기 보다는
주님께 온전히 내 맡기고
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반어법'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오히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단어를 써도
불손하고
온전하지 못한 그들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심성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배반하고 돌아서는
그들과는 다르게
그,
욥은
원망조차도
주님 안에서
주님 앞에서의 원망이란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행동은
주님 앞에서 울부짖고
주님 앞에서 소리지르고
주님 앞에서 인내하고
주님 앞에서 긁고
주님 앞에서 서있고
주님 앞에서 주님께 맡기는..
세상에 바보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되고프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너무도 닮아 있다.
성인들,
성경속의 존경할 만한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적으로 다 바보다.
손해 볼 짓만 한다.
아니....
욥도
그 시간에
어디 치료할 자를 찾아가고
저주하고 도망하는 여편네 머리 꾸뎅이를 잡아채고
질 질 끌어다가 하나님 앞에다 던져놓고
회개하라고 혼내면서
분 풀이라도 하면
덜 속이 풀려지지 않겠는가?
친구들과
알코올 섞인 곡차..ㅎㅎ..나 한잔 하면서
자신을 위로 해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려도 보고
잘 위안하는 '상담가'를 찾아가 - 있다면.. ㅎㅎ - 해결해 보면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
죽도록 '하나님'께 매달린다.
아침에
예상치 못하게 터져나오는 분노와
폐경기 증상을 가지신
신실하신 아주머니 집사님 한분이 오셨다.
그 분께서도
사람들이 놀랄 만한 분노를 폭팔시키면서도
자신은 잘 모르고 있었다고하고
그러는 자신이 굉장히 자책이 간다고 오셨으면서도
전인적인 제시를 해드렸음에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시겠다고
돌아가셨다.
그래...
옳다.
주님 앞에 온전히 매달릴 수 있다면
그리하는게 최선이다.
영적으로
모든 육적 영적 심적 고통 까지
다 제어할 수 만 있다면 최선이다.
욥처럼... .
하지만
세상이 번거러워 지면서
놀라운 영역에서
다양한 영적도전이 있으면서
육적으로 심적으로 영적으로 다가오는 도전이
침몰시키듯이 누를 때는
이유없이 좌절의폭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
그래.
욥같은 지혜와
욥같은 처절한 인내와
욥같은 엄청난 주님 앞에 매달릴 끈기가 있다면
그러하는 것이 좋겠다.
한데 문제는
우리는 주님 앞에 만 가면
'그 분 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지 못하는 게 문제다'
가릴 것 가리고
좋은 것 만 보이려고 하고...
그러다가
주님 앞에서는 이쁜 짓만 하는 광대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더 깊은 좌절로
더 무거운 무게의 죄책감만 가지고 오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장의 정도에 따라
일반은총도 허락하심은 물론이다.
의사에게 조언도 받고
육신적인 것은 치료도 하고
심리적인 상담도 하고
영적인 목사님이나 영적 성장자들에게 조언을 받음도 좋다.
하지만,
진실로 빠져서는 안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주님 앞에 나아가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욥처럼 '살려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
가능하면
원망의 말을 하면 안되겠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도가 필요하다.
다윗도 그랬다.
'저 사람을 대신 죽여달라고.. '
' 왜 나를... '이라고도..
하지만 ,
그게 악한 심성의 발로가 아님은
누구도 안다.
기본은
'주님 앞에서'다.
그게 중요하다.
주님 만이 내 속을 아신다.
주님 만이 날 구원하실 수 있다.
주님 만이 가장 좋은 은혜로 날 이끄신다.
주님 만이 기쁨이다.
주님 만이 결론이다.....
이러한 영혼의 당연한 결국의 다짐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참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엉터리 같고
이 포학 하기만 한,
어디 하나 보아 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래서 하나님의 자식이란 것을
타당하게 꿈도 꾸어 보지도 못하던 내가
이제
하나님 안에서
당연하게 도 저리 고백할 수 있다.
어제다.
갑자기
자신 감이 확 솟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남을 정죄하고
분노를 쉽게 터뜨리고... 그렇지만
난 하나님을 정말 기뻐한다.
아..
그렇게 기뻐하고
그게 너무도 당연하여
남들에게 열렬하게 얘기하고
찬양으로 소리소리 질러 알리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해주신게
난
주님이 너무도 감사하였다.
난
주님 만이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다.
주님 앞이
아직은 최고로 평안함을
절대로
고할 수 있다.
그게 난 자랑스러웠다.
어제...
오늘
묵상이 역시 쉽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교류가 됨을 느낀다.
아직도
그
욥처럼 소리지르고 싶을 때도
한번씩 돌아온다.
그럴 때
그리 하리라.
기도원에가고
아버지 학교 중보기도 모임에 가고
가능하면 찬양하고
그러리라.
적용
1. 성경 여섯 장 읽겠다.
2. 기도한다.
3. 감사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늦은 퇴근 시간
그냥 가려다가
문득
죽을 때까지라고 다짐했던
큐티 일기를 쓰지 않았음이 생각났습니다.
그리하여
귀찮은 느낌을 뒤로하고 앉았습니다.
한 줄로 쭉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또 한번
혼자 흥분하면서
글을 써고
기도를 마치고 있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게
저 혼자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이기에
늘
전
주님의 인도하심과 함께하고
그것을 느끼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요.
주님
실은 욥처럼
저도 소리지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 못하는 막힘이 있사오니
주여
그마져 인도하소서.
없이하시던가
깊은 통찰을 주소서.
내 영혼의 벽이 하나하나 깨져나가는
놀라운 통찰...
그리고
평강....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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