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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홍옥 같은 내, 아침의 영혼(욥18:5-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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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홍옥 같은 내, 아침의 영혼(욥18:5-13)

주하인 2008. 10. 1. 12:44

 제 18 장 ( Chapter 18, Job )

 

 

곳곳에

아름다운 가을이

이리도 눈을 끕니다.

 

아파트 정문 앞에

가을이 이리도 소담하게 왔네요.

 

 


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참으로 끈질기게

빌닷이 열심히 공격합니다.

밑으로도 길게 되었지만

보기 싫어서 그냥 5절로 끊어 버렸어요.ㅎ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네요.

시간이 많아서

내 베란다 묵상처에 앉으려 해도

욥기의 무거움이

날 오래 앉아 있지 못하게 해요.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며칠전 부터 시작한

마사이 워킹 슈즈 - 가장 싼 제품 ㅎ -으로 갈아 신고

병원까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뒷문으로

개울가를 건너

그 곁으로 잘 닦여진 길을 걸어

시내로 들어서면 약 50분정도 걸리니

딱 운동거리가 좋습니다.

걸으면서

눈에 띄는 곳에 사진기도 들이대면서

혼자서 흥얼거리며

주님을 되뇌이는 길목은

복받은 길이라  생각이 될 정도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냥 육신과 감정이 가라앉는 것을 넘어서는

어떠한 상쾌함이

마치 샤워 하고 난 듯한 개운함 말입니다.

영적인 뿌듯함이지요.

 

 오늘은

빌닷의 소리가

마치 '내 속의 부정적인 소리들이 북쩍 북쩍 대는 소리'처럼 들려

묵상의 내용을 다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나왔어요.

무슨 뜻이신지 묵상을 하려 했지만

자꾸만 딴 생각이 들어서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사진 찍을 궁리만 하게 되었지요.

한참을 걸어도

머리는 복잡하고

집중이 되지 않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럴 듯한 논리

그렇게 세상을 보아 왔던 습관적 판단의 기준으로

나는 또 나를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빌닷 같은 사람들의 소리 높임이 있으면

어느 순간 쭈그러 들어

아무 소리 못하고

한참이나 복잡한 심사로 멍해 있다가

그것이 아닌 논리를 발견하면

그제서야 억울한 몸짓으로

분을 내곤 하였었습니다 .

 오늘 빌닷의 '권선징악'의 논리는

당연한 자연적 원리에 의한

한계 상황에 있는

자신을 고쳐야할 틀이긴 합니다.

 

빠져나갈 틈없는

씨스템으로 꽉 짜여진 논리였습니다.

거기에

그 자연의 원리를 넘어서는

어떤 힘을 전제할 수 없다면

단 한마디도 거부할 수 없는 논리가 맞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흐름을 제어할 능력이 없으니

자연적 원리에 가장 합당한

법이라는 틀 - 씨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근접한 판단자로

'판사'를 세워 놓은 것과 같은 거지요.

거기엔

진리라는 이름보다

타당한 이유라는 제목이 맞습니다.

 

 이 권선징악의 논리.

합리라는 이름.

이것은

그럴 듯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을

권선징악의 논리에 가져다 대입시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인간이 깨닫고 만들어 놓은

어떠한 틀에

아무런 힘을 제시하지도 못하시고

그냥

판단자나 방관자의 입장에 서 계시길

바라는 것이나 하등 다름없습니다.

아니..

그 분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사의 역할을 하고

그 이상의 것을 허용치 않겠다는 것은

피조물이 조물주를 마음대로 하겠다는

이 어이없는 논리가 아닌가요?

 

 이것이 '율법'의 무서움입니다.

이것이 '도덕주의자 '들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적인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에 내려 놓고

꼭둑깍시로 만드는...

 

어느정도 사람이 크고 성장하기까지는

배움이 필요하고 도덕적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권선징악의 논리는

조금은 영적 수준이 낮은 자들이나 어린 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논리이긴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주님이 매사에 밥숟갈로 먹이지 않는

비 지진아들인 정상 기독교인이 받아들여야 할

당연한 행태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논리로 꿰는 것이야 말로

율법의 위험성에 묶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위험하고

스스로도 마찬가지란 것을 느낍니다.

어떤 틀 안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그 틀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은

깨드려야할 '자아'입니다.

 하지만,

깨뜨려야 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이 있습니다.

그 최소한의 것은

날마다 주님을 묵상함이지요.

주님이 말씀 하심 안에서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유는 비단

남에게 대한 정죄의 칼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학이나 자책의 멍에에 대하여도 마찬가지고요....

  성경에 분명코 나와 있습니다.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개울가 도로를 빠져나와

도심으로 향하는 도로를 걸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눈 앞을 힘차게 걸어가네요.

점차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르겠는 현상이 찾아옵니다.

너무도 유혹적이고 고혹적예요.

아침 일찍 부터들 요.........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고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학생마져도

초미니예요.^^;;; 

 버스정류장,

길거리 서있는 여성들

등교하는 여중고생..........................

거의 모두미니스커트에다

꽉 조이는 옷에 한껏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이네요.

 싱싱해 보이고

자신이 있어 보여서 좋기는 하지만

모두 한결 같으니 당혹스러운 마음이 맘 한켠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민망스러워 시선을 어찌 할 바를 모르겠어요.

 고개를 숙이고 걷기로 했어요.

다양한 생각이 들려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못하는 어리석음을 이렇게라도 훈련시키시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차분해 집디다.

'그래, 겸손의 연습.'

엉터리같은 논리의 부대낌에서

난 한걸음 물러나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또 한번 자유를 누리게 된 듯합니다.

 

 

계속 걸었지요.

2001 아울렛 건널목을 지나면서

마주에서 오시는

오십대 아주머니의

단정한

그러면서 약간은 어두운 듯하고

고리 타분한 패션에

금색 브롯지 하나가

아침햇살을 받아 번쩍여 눈에 들어옵니다.

눈을 위로 들어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 이쁘시진 않지만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얼굴은 연륜으로 차분해 보이시고

그 연륜은

단정함으로 대표되는,

우리세대의 그 억눌림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내신 분의 알지 모르는 어떠한

자유로운 절제의 모습이

순간 확  느껴져 왔습니다.

그 분이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대비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능력을 최대한 내 보이고자 하는 신세대의 모습과

자신을 어떠한 틀 안에서 제동을 하시고 나서

그 틀을 넘어서는 어떠한 자유를 느끼는 아주머니의 모습.

 신세대는 신세대의 발랄함과 힘이 있지만

절제가 바탕이 되지 않은 그들의

무분별한 - 모두는 아니다.. 절대로..ㅎㅎ - 방임의 결과는

산부인과에 오는 젊은이들의 질병의 정도와 강도로

증거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젊음이 시들어 갈 때

그들은 또 어떤 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갈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구요.

 한편으로

너무 절제와 강요의 틀 속에

힘없이 시들어 가며

우울의 중년을 맞이 하고 있는

우리 세대들의 모습도

마치 오늘 빌닷의 변함없는 권선징악적 율법적 논리에 갇혀 버리는

그러한 모습처럼 보이구요.

자유롭지 못한 구속... ..

 

 하지만 아주머니의 영혼이

내 느낌과는 일치하시는 지 몰라도

나름 대로  절제 속에서

단정이란 어떤 원리를 발견하시고

그 절제 속에서 만족스러운 패션의 미감을 찾아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 만족스러운 자유는

촌스러울 지 모르는 그 분의 패션을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보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 안에서

말씀대로 살려는 규제의 연습을 통하여

어느정도 익어간 신앙의 습관의 모습이

굳어지기전에

주님 말씀의 참뜻

그 분의 그 어떠한 진실 안에서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 자유는

그 분은

어떠하심이라는 사실을

영혼 깊숙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 분은 어떠하신 분이신가요?

" 그 분은 사랑이십니다. "

" 그분은 날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

" 그 분은 어떠한 것도 다 알고 계시고

   그 분은 모든 것을 섭리하고 계시고

  그 분은 모두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진실로 이해하고 깨닫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그 믿음.

그 믿음은

어떠한

주님을 온전히 모르는 자들의 공격에서도

자유로와 질 수 있고

어떠한 불신적 상황의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믿음은

영혼이 온전한 자유안에서 기쁨을 체험하고 있기때문이고

고난은

그 기쁨을 얻는데 장해가 되기 보다는

더욱

주님을 놓치지 않기 위한 계기가 되기 때문이지요.

 

 아침.

힘들었지만

다양한 느낌으로

주님은 날 체험케 하십니다.

 

거의 병원에 다와 갑니다.

 

여름과 가을의 갈림.

걸어 출근하던 길에

좌판에서 파시는 과일의 칼라가 어찌나 눈을 끄는지

사진을 찍기 위해

거금 2000원 투자 해서

홍옥을 샀답니다.

다..

나누었지만요...ㅎ

 

 마지막 골목길에 들어서는 순간,

리어카를 세워놓고

좌판을 벌이시는 과일 상 아저씨의

홍옥과 참외의 노란색과 붉은 색의 조화가

내 눈을 찔러듭니다.

난,

가끔 이리

주님의 자유가 가슴을 감동으로 찌를 때

주님의 허락하신 자연의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던 발걸음을 확 멈추고 - 끼~~익~~하고.ㅎㅎ- 뒤 돌아서

사진기를 들이댔습니다.

아저씨 얼굴이 멍해지는 것 같아서

얼마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쯤 샀어요.

몇 컷을 찍었지만

늦을까 마음이 바빠서 인지

흔들려서

겨우 조거 한 두컷 남았네요.

오다가

night 번 하고 나오시는 '간호사 샘'들 두분을 만나서

하나씩 쥐어 주고

정문에 들어서다

경비서시는 S텍 직원에게

협력센터 간호사 선생님께도

한덩어리씩

빠~알~간 ~~홍옥 한알씩 안기니

가을을 받아든 듯

모두 함박 웃음을 지신다.

아마도

그들 모두

내 '자유'를 느끼셨을 듯 싶다.

 

 아직은 아니지만

내 속의 빌닷도

조금있으면 사라지리라 .

빨가~~~안~~ 주님의 보혈 안에서 .......

 

적용

1.  아무렇지 않기로 했다.

 

2.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리라.

 

3. 좌절도 물러가라.

 

4. 생각은 주님께...........................

 

5. 고개 숙이고 다닌다.

  겸손을 연습하자.

 

6. 말은 줄인다.

 

7. 성경을 여섯 장 읽겠다.

 

8. 수요 전인치유를 위해 기도한다.

  인도하시는 A 간사님의 영육 건강과

오시는 모든 분들의 하나됨을 위해.. .

 

 

 

기도

 

 

주님

어려운 묵상

오랜 시간을 거쳐

깨달음을 허락하심과

주님 안에서 말씀 으로 자유함을 얻을

또다른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주님을 믿습니다.

그 주님의 인도하실

자유함을 믿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붉은 색을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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