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 그러지요(요일3:11-24 ) 본문
제 3 장 ( Chapter 3, 1 John )
주님
예
그러시지요
주님 말씀이시라면
그냥
그리하지요
비록
볼품 그리 없는 저라도
주님 하라시면
그냥 받겠나이다
주님
생명으로 흐르시어
제
타는 사랑
만개케 하소서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서로 사랑하라'
예.
'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맞습니다.
처음 부터 압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순간 부터
주님은 '사랑'이심을 알았고
주님은 사랑하기를 계속 권고하시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도
사랑을 회복하고 연습하는 과정으로 허락하심도 알았습니다.
요한 일서도 내내 '사랑'의 장임도 압니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렇지요.
주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질시를 받음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앎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들의 미워함이 가슴을 저리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을 아시고 주님이 또 이러십니다.
'미움 받음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예.
그러지요.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마음이 책망한다'
'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
마음이 책망한다는 것은 혹
'죄책감'으로 마음이 상함을 의미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아니면, 내 마음의 혼란으로 인한
미움이 불거져 나오면서 마음이 냉랭해짐을 말씀하시나요?
그러하여
그 마음이 우리의 '하나님 말씀의 순종하려는 의지 내지 의욕'을 꺾어 버리는
그런 '이전까지의 습관화된 현상'을 의미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그렇다면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이라시면
그 마음의 벽을 넘어서는 '내 말씀을 선택'하려는 결심을 통하여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역사하시어
진실을 보이시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렇다.
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게 우리의 매일의 존재적 진실이다.
그 경계선 위에서 내 영혼의 '선택'을 기다리신다.
마음, 그중에서도 '양심'이나 '상처'에 대한 반발로 인한
다양한 감정적 혼란에 의하여
'사단의 영역' , 즉 어두움의 영 쪽으로 선택하면
그때부터는 여지없이 마음의 흔들림 대로 폭포수처럼 감정이 쏠려 나가
'미움' , '속상함', '원망, '부정' , '우울', '짜증', '분노' , .......이 밀려 나오게 된다.
반대로 ' 하나님의 영역', 즉 밝은 영의 경계를 선택하면
하나님의 선한 영 , 즉 성령께서 그 선택을 기뻐하시며
폭포수와 같은 기쁨이 밀려오며 평강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경계에 섬은 '선택'의 개념이 확실하게 생기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늘 말씀을 하나님의 씨로 받아 들이고
나름으로 주님 안에서 '성령'의 체험을 하고
그 씨가 발아가 되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될수록
훨씬 크게 된다.
당연히도 '불신의 시절', 그 오랫동안의 어둠의 습관은
무 비판 적으로 '마음이 가는 대로 ' 만 선택할 수 밖에 없게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저처럼 들어와서 부터는
갈등을 하게 되었고
갈등은 승리의 경험을 통해 점점 줄어들고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습관이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마음을 리드하는 게 있고
마음 보다 큰 분이 있음을 체험케 된다.
그 것은 '사랑' 조차 내 '선택',
그것도 '주님 안에서' 의 '내 선택'에 의하여
반드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됨을 깨닫게 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룰은 아니지만 막연한 기대 수준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그러기에 그 막연한 수준에 올라서지 못하는 자들은
올라서기 위해 노력을 하고
노력을 하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포기 하거나 힘들어 하고
그를 넘어서는 자들은 나름대로 목에 힘을 주고..
이 .. 뚜렷하지는 않지만 막연한 기대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성공'이라는 가치를 향해
거의 불가항력 적으로 몸부림 치게 만들고
그것을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거나
사람들은 이 현대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달리기 시작하는 쳇바퀴' 안에서
허덕허덕이다가 죽게 된다.
그것은 진리이고 진실인 인생의 어떤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괴리'를 가져오게 되고
그 괴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부담이 오게하여
이 시대의 우리 중년들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 보다는 '불행'의 느낌으로 오게 한다.
아내의 수술.
목사님 한분께서 정말 아내의 자연쾌유를 위하여 열심히 작전 기도하시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한차례 들으셨다 하며
' 남편인 ' 나 때문에 수술하게 하셨다 하시며 조심 스레이 말씀을 건네신다.
나.
몇 번 고백한 바 있지만
성령의 손가락으로 아내의 동맥류 목을 지지는 상상을 하면서
자연 치유를 기도했지만 허락하지 않으심을
절절히 깨달았다고 했다.
친구와 그 아내와의 오해의 풀림.
자식들과의 관계 설정을 정립함.
우리의 걱정보다 훨씬 많은 '위안자'들의 도움을 확인함으로
잘 살지는 못했을 지 몰라도 열심히 살려 노력했던 증거를 주님의 보여주심.
남편의 위치로 차분히 일을 진행하게 하심.
내 괜한 걱정 마져 내려 놓고 주님 말씀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심... 등 참으로 많은 부분을 깨닫게 해주셨지만
더 귀중한 깨달음이 있었다.
나이 들어 아프다는 것이 그렇게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과
그 타격의 기본은 '나의 위치에서는 이렇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나름의 기대치였고
그 기대치를 벗어남을 두려워 함이 었다.
그렇다면 그 기대치를 낮추면 두려움이 낮아질 수 있는 것이며
일단은 두려움이 낮아짐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
기도했다.
내 가치가 아닌 '주님의 가치'에 의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뚜렷이는 아니지만 내 깨달음을 주님은 아실 것을 기대하며
작전기도 중 한번 씩 외워 드렸다.
그래서 인가?
참 편안히도 아내의 질환에 대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수술 부분조차 받아 들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어
나의 사회적 체면 부분도 생각 보다 훨씬 풍성히 채워주셨다 . ^^*
그러니 당연히도 위에 서술한 나름의 기대치와 현실의 괴리에서 찾아올
두려움 대신 주님의 위로로 느낄 만큼 많은 도움의 손길을 허락하셨다 .
주께서..
그러나, 내 속상한 부분을 끝까지 파고드는 부분이 있었다.
친한 친구들의 무관심( 중년의 기대치에 의한 내 착각일 수도 물론 있다.)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허락 받음이 실은
이번 아내의 일로 통하여 가장 많이 받은 주님의 선물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이해할 수 없었다.
친하지 않았던 분들의 그 귀중한 관심이 넘침에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아주 오랜 지인들의 무관심은
날 아프게 했다.
그러나, 들여다 보니 어쩌면 그것은
내 젊은 시절에 그들에 대하여 내가 잘못한 것들의 반증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셨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세상의 인심은 그렇게 돌아가는 게 진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내 속'에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오늘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 , 모든 사람들을 움직이는 어떠한 모티브는
다 '마음'이라고 규정지어지는
감정의 흐름이 일차다.
그런데 그 감정의 많은 부분들은 '왜곡'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그것을 인식할 수도 없고 인식하여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할 수도 없다.
마음.
실은 그 부분을 통제할 수 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공을 할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 아닌가?
감정은 '일차와 이차감정'이 있다.
일차는 우선드는 마음.
이차는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는 마음.
따라서 의지가 강한 자는 마음 마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생각이 깊어지면 감성까지 달라진다.
하지만, 이 감정의 영역의 마음은 생각으로만 누르면
차갑고 냉랭하고 무서운 자가 될 위험이 많다.
바리새파가 그렇다.
그러기에 '사랑'이 전제가 된 선택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그 선택을 하기에 '사단'의 방해가 너무도 많은 것이 물론이지만...
나.
서운함의 정체가 내 문제에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려놓고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았다.
말씀에서 '약하고 곤란한 것을 주님을 위하여 기뻐하라' 하시기에
선택할 결심을 하고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가서야 마음이 많이 가라앉는다.
한달 전에 미리 전화를 해서 귀뜸을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하고 기다렸다.
샘병원으로 옮긴 후 부부 동반으로 그들이 찾아왔다.
역시 주님은 '내려놓고 기다림'을 기대하신 것이시다.
'내 문제'를 인정하고 세상의 기대치,
친한 친구들의 의무에 대한 괜한 기대치를 내려놓길 선택하고
말씀 앞으로 가져가니
하나님의 씨가 다시 내 안에서 발아하길 시작한다.
'처음부터 ' 주님은 나에게 '사랑'하길 원하시고 계시었다.
그 처음부터 말씀하시는 '기본'으로 돌아가길 기대하신다.
친구 중 하나는 '독실한 불교 집안' 출신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예수님 이야기 하는 우리가 싫은가 보다 .
그 모임에 빠졌다.
연락도 없다.
서운함이 삐져나오려 한다.
모임 중에서 친구 중 하나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어렵다고..^^;
그래도 친구 아니던가?
서운하려 한다.
그러자, 기본으로 돌아가기 힘들 때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그러하지 않은가?
그 친구는 예수님 이야기 만.. 하는 자라고 우리를 미워할 수도 있다.
모임 중에 술도 먹고 세상적으로 신나게 놀아야 될 우리가 고리 타분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미움을 마땅히 '전화라도 한통해야 할' 친구 부인의 수술에
전화 한통화,
모임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게 읽혀지니 '속상하면서도' ,
그 뒤에 서린 사단의 장난이 너무도 뚜렷이 보인다.
그러니 쉽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 하신다.
당연히도 '나의 문제'다.
나의 결심이고 나의 선택이시다.
그렇게 결심하고 선택을 하면
이전 예수님 모를 때와는 너무도 달리,
'마음보다 크신 ' 예수님의 영이
사랑으로 채우시리라.
돌아본다.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감사하는 마음은 훨씬 증폭이 되고
미움은 훨씬 줄었다.
송곳 처럼 찔러 들어오는 '서운함'도
말씀 앞에서 그 예기가 줄어든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안음이지만
아직은 되지 않음이
그들의 송곳을 녹일 만한 내 내려 놓음이 덜한 모양이다.
주님은 '선'이시다.
자연치유를 허락하지 않으신 뜻도 '선'이시다.
그 사랑을 깨달아 앎고
앎을 선택으로 받아 들이길 기대하시는...
참으로 감사하다.
적용
1. 기도한다.
기도의 분량이 많이 줄었다.
아내의 수술이 무사히 마치면서 절절한 것이 줄어서인 듯 하다.
당직방에서 기도하리라.
2. 성경 세장 읽겠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은 모든 것을 이기는 씨앗이다.
3.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 순수한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자.
4. 세상이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자.
주님의 말씀이다.
혹시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을 당해도
이상히 여기지 않기를 선택한다.
최소한 오늘 하루는... 인내하자.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여러 생각들이 선하게 저를 스쳐 갔습니다.
그 과정과정 다 놓치지 않고 깨닫게 해주심이 감사합니다.
그런 과정을 하나하나 제 영혼에 습관으로 담아 주소서.
그런 기도를 전 선택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그리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으로 절 채우시고
제 마음이 이전의 혼돈에서
이제는 '평강과 평안과 감동'으로 늘 채워지길 원합니다.
큰일이 아니면 그리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큰일이면 담대함과 지혜로 절 채우소서.
그리하여 옳고 선하게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방향으로 가시게 하시사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강력했던 그 감동의 순간으로 매일 매시간
절 채우소서.
사랑의 사람으로 절 바꾸소서.
예.. 그러시지요.. 늘 인정하고 대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순종의 사람되게 하소서.
주님.
제 결심을 받으시사
제 영혼에 평강으로 채우소서.
제 자식들 그리하소서.
제 아내 빨리 회복되고 늘 그리하듯 영혼을 그리 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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