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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하시던 대로(막15:1-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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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하시던 대로(막15:1-15)

주하인 2011. 4. 21. 10:41

제 15 장 ( Chapter 15, Mark )

 

 

 주님

꽃이 적네요

그리 화사하지도 않네요

아니 

조금은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눈에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와 보이기 까지 함은

이슬 탓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우러져 있음 말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 만 으로 

자신 들 의 꽃을  

풍성히 피워낸 탓일 듯 싶습니다

 

저도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의 뜻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게 하소서


 적은 달란트지만

무리지워

어우러지는 꽃 

풍성히

피워내게 하소서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결박 당하시고

끌려 다니시고

동물처럼 넘겨지시고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취조 당하시고


 
3.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하는지라
 고소도 당하셨다.
 
4.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비웃음 당하시며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기이히 여김 받으시고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일체의 권리를 박탈 당하시었다.
그분의 의지랑 아무 상관없이..

 

그런데 특별한 것은

예수님은 전혀 저항을 하지 않으신다.

고민의 흔적도 보이지 않으신다.

마치 '양' 처럼....

가끔 TV에서 보는 '양'의 모습은 말그대로 양같이 순한 모습이다.

죽임을 당할 때 조차 반항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분명코 '인성'을 온전히 가지신 분이시다.

며칠 전의

'슬픔으로 고뇌하심이 죽을 것만 같다'는 표현이나

어리석은 제자들을 향하여 같이 깨어 있을 것을 종용하시는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시다.

그러신 분이 땀이 피같이 흐르던 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후에는

전혀 저항이나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신다.

마치 '자기의 일이 아닌 것 ' 처럼.

자아란 것이 있지도 않으신 분처럼...

 

아.

언제나 되어야 나도 이처럼 될까?

살아가면서 너무도 많은 갈등들..

매시간 매순간 눈만 뜨면 다가오는 고민들.

누구나 겪는 고난의 대부분은

'나'나 '내 것'이라는 개념 탓이 아니던가?

 

'자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자아'의 만족이 원동력이 됨이 맞다.

누구도 다 예수님 처럼 태어나서 부터 양같은 사람 만 있다면

어찌 지금의 모양이 되었을까?

즉, 자기의 원함,

자아의 생동력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리도 열심히 살아간다.

어쩌면 유한한 인간이기에

그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그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자아의 성취 내지 승화 때문에 죽지않고 그리도 열심히 살 수있을 지 모른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거기'까지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은 다르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죽음 뒤에 반드시 얻어지는 '영생'이 있다.

부활이 있다.

그러기에 살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영접해도 자아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음이다.

우리의 이 적은 육신과 영혼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돌아가심은

그 십자가에 내 자아가 같이 죽어

그 빈 영혼에 '성령'으로 채우사

예수님 같은 그런 '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가는 자 되길 바람이시다.

 그런데 정말 그게 되는가?

예수님의 구원으로 경험한 그 강렬한 '첫사랑'의 체험과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느껴지는

그 영생의 생명력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자아'가 눌려진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헌신과 헌금과 선교의 결심과 실행도 이루어낸다.

하지만 많은 부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조차도 '자아의 성취'로 ,

즉 자기 만족에 성향이라는 특질이 섞여

마치 하나님의 일인양 멋지게 시행해내는 경우가 없지않다.

선교사나 목회자님...

오래되신 중직자들...

착한 듯 소리 안나는 듯 많은 선행을 하시는 분들 중에

깊은 교만과 고집이 줄어들고 있지 않음도 목격된다.

그만큼 가죽줄보다 훨씬 두껍고 질긴 내 자아는

내 영혼의 주도권을 성령께 내드리고 죽기 싫어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자기 만족이 없어야 한다.

자기 만족은 한도 끝도 없다.

허겁증을 유발한다.

어딘가 공허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어가면서도 점점 커지는 공허가 있으면

그것은 어쩌면 자아가 살아있음이요,

다시 돌아보면 '성령'이 운행하실 공간이 줄어 듦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사순절 모습을 묵상해 보면

그 분은 전혀 '도살장에 끌려 나온 어린 양' 같은 모습 뿐이다.

저항이 없으시다.

입을 닫고 계시지만 고집센 자들의 '묵음'의 저항이 아니시다.

고민이 없으시고 갈등이 없으신 듯하다.

아예 생각 조차 않으신다.

 

 그렇다.

자아가 죽음은 그렇다.

내 주장, 내 것이 나올 이유가 없다.

내 고민, 내 갈등, 내 삶... 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이유가 없다.

 그냥 무감각하신 듯, 감정에 흔들림이 없으시다.

자아란 개념조차 없으신 분이시다.

우울한 자들 - 이들은 자아가 극도로 움직이다가 현실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마비되어 기능을 정지한 상태다 -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 무기력이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고요'와 '평강'이 있으시다.

호수의 고요함이다.

 흔들림없는 평강의 고요함이다.

 그런데도 그러하신 분도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는

정당하고도 확실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의 영에는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뜻' 만이 살아 있으시기에 그렇다.

아니다 .

오직 '하나님의 뜻'이외에는 다른 것 생각지도 않으시기에 그러시다.

'성령' 이 온전히 잡으시기에 그러하시다.

 

 나.

많이도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요새는 자주 성공한다.

흔들릴 때는 많이 아프다.

그러나 성공하면 기쁘다.

성공이란 동일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받아 들임을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약간이나마 느끼게 되고

영적으로 위로가 느껴짐이다.

난,..

그래서 주님을 지금도 기뻐한다.

기복은 적지만 잔잔하고 흔들림 덜하는 기쁨.

 

 그러나, 그러한 기쁨과 기복이 덜한 발전도 한계가 느껴진다.

변함없이 되풀이 되는 지점.

똑같이 또 싸워야 하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의 오늘 보여 주시는 저런 모습들..

거기에 날 대치해 본다.

 힘이 빠진다.

여지없이 화가 나고 성질이 올라오려 할 것이다.

그리고는 좌절할 것이고

또 곧 일어날 것은 분명하지만

내 나이 적지 않음에도

동일한 영적 싸움을 또다시 되풀이해야 함이 당혹스럽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갈 육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는가?

내 남은 나이든 삶의 시간들에서

점점 저항할 버퍼는 줄어 들 텐데 동일한 자극에

계속 지금처럼 버티어 나갈 자신이 없다.

솔직히 두렵다.

그게........

 

 무엇이 문제이던가?

아직도 내 자아가 기세 등등하기에 그렇다.

아직도 내 것에 대한 욕심이 자리를 놓치 않고 있기에 그렇다.

너무도 당연함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열심히 자아의 그 날카로움을 깍아내려 (絶差濁磨)하였던

신앙 초창기의 그 열렬함이

어느새 편안해져가며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자아가 살아 있는지도 잊어 버리고

고민 조차 덜하며

마치 자아의 성취가 온전한 신앙인양

멋진 도덕적 명분이나

감성의 개발을 해가며 교묘히 자아의 강팍함을 숨겨가고 있어왔음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나의 그러한 부분을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기에 ~~

이처럼 말씀으로 자꾸만 찌르고 깨닫길 원하시는 것이시다.

맞다.

그 분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고 길의 빛이 맞다.

그러시기에 난.. 내 자아의 서슬 퍼럼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길 만이 내 스스로 온전하게 삶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새벽기도를 가려고 그리 맘먹고 금식의 생각은 했지만

이 어리석은 자는 그렇게 하지 못함을 죄송히 생각해

어제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 갔다.

말씀을 준행함이 그나마

나 만의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과 만의 교분 ^^* 으로 생각되기에

난 자주 그런다.

그러하심을 주님은 기뻐하심을 난 안다.

내 자아는 피곤하고 자라고 몸부림치지만

난 아주아주 약간씩의 드리는 헌신으로 그런다.

 역시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기뻐하신다.

많은 은혜와 깨달음으로 날 잡으신다.

  나.

기도원에서 기도하며 많은 것을 여쭈어 보려 애썼다.

누구들처럼 직접 말씀하시듯

천둥치듯 그리 말씀을 주시지는 않으시지만

은헤로운 깨달음이 동반되는

가슴 떨리는 흥분..

아주 귀한 분의 칭찬을 받은 후의 그러한 마음이 들어

그 사랑스러움으로

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어제도 마찬가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고난들.

평생을 날 막아서는 그 터부.

최근에 또 자꾸 생겨나는 현실적 고민들.

자식과 몇년 후 현실 적으로 있을지도 모를 장래의 무거움들.

내가 떠 맡기는 힘들기에 주님께 내려놓고 기다리지만

막연히 그냥 기다림이 날 태만으로 몰고 가고

매너리즘으로 몰고가기에

이도 저도 어찌할 수 없던 바 자꾸만

아버지 앞에서 조잘조잘 대듯한 마음으로 기도하곤한다.

그러니..

그러시는 것 같이 기쁨 가운데 느껴져 온다.

 

' 우선 첫번째 기도 방법으로

고난에 대한 대처와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방법이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조금은 어린 자의 그것이거나 응급한 자의 기도이다.

 아니면, 자식에 대한 중보처럼,

 타인을 위한 중보의 기도일 때가 맞다. '

 

 ' 또 다른 하나는

 고난을 받아 들일 수 있음을 기도함이다.

  고난은 유익인 것이 맞다.

 그 고난이 내 잘못인 것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올 지라도

 그래서 주님께 뜻을 여쭙지 못할 죄송함이 들어도

 그것 마져 아시는 주님이시다.

 그분이 날 모르시는 가?

 태 중에서 날 만드시고 복 중에 날 지으셨다 하신 그 분이?

 그러기에 그 고난을 모조리 받아 들임이다.

 받아 들이려면 몸부림치는  이 억울함은 어찌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대처를 보라.

  그 분은 전혀 저항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분에게는 '자아'가 승할 기회를 주지 않으심이다.

 내 것이란 개념이 없으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실 뿐이시다.

 어찌 그게 그러나, 나에게 가능할 것이던가?

 태어나 영접후 오랫동안 난 역기능의 훈련을 받아 왔다.

 내 아픔.

 내 고민.

 내 갈등....

 그러기에 깨달음과 인식이 필요하다.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것 만 기다리고 받음이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을 치고 날 붙들려 해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만 자동으로 생각되면

 거기에 어떠한 고민과 갈등이 필요한가?'

 

 고난에 대하여 기도하려 할 때 몰려오는 의문들이다.

' 현실의 문제들이 과연 이런 형이상학 적 생각과 들어 맞을까?

  주님께 여쭈어가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껏 오랫동안 주님은 나에게 영적인 자원을 허락하셨다.

 사진.

 글.

 찬양.

 다양한 하나님의 뜻을 읽을 기회들.

 ........

 그것을 통해 후반의 삶을 이끌어갈 다른 전환점이 되어도

 주님이 당신을 물질적으로 이용함을 '혼내지 않으실 ' 확신이 선다면

 준비해야 함도 옳지 않던가?

  오래전 부터 생각해온 바가 있다.

 문제는 '자신'이 없다는 것과 주님이 허락하심이다.

 이 부분에 대한 혼란과 고난에 대하여는 

 자꾸 여쭈어 봄이 옳지 않던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여쭈어 보려 기도함은 너무도 자연스러움이 아니던가?

 내 삶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삶이

 얼마나 일상에서도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나와 세상에 알려 보이고

 그 모습을 내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어 보여줌이 아니던가?

 무엇이 두려운가?

 얼마나 힘이 있고 보람있던가?

 지금 가진 것의 조금 포기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가?

 준비할 것이다.

 준비하기 위해서는 '내 많은 시간을 빼앗는 정욕적 행위 - TV, 영화.. -를 조금은 줄인다.

 더 기도해야 한다.

 금욕적 삶의 분량을 조금 더 늘여야 한다.

 영적 육적 비만은 피곤과 나태를 말한다.

  질타하고 괜한 손해 마져 주님을 위해 참는다.

 아니다.

 참기 보다는 자동으로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습관의 기회로 삼는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아픔은 주님의 뜻이 아니시다.

 주님이 성령으로 임하시면 그것은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아마도 육신은 고통스럽고  마음은 어쩌면 혼돈의 기간이 될 수 있으시지만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기쁨으로 평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계실 것이시다.

 그분은 피가 토해지는 기도를 하셨으니..

 길이 열리는 눈물의 기도를 하셧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 '

 

 

 길게 썼지만 깨달음의 시간은 짧았다.

내가 얼마나 또 인생의 짧은 시간에

주님의 허락하신 그 느낌들을 , 깨달음이

강한 영혼의 흐름으로 받아 들이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 되풀이 하여 강한 흐름으로 내영혼의 습관이 될 것이다.

기대가 된다.

 

 

 

적용

1. 기도한다.

 주님 뜻만 알게 하소서.

 모든 상황 다 주님의 뜻만 생각할 기회되게 제 생각을 바꾸소서.

 그게 내 생각의 흐름이게 하소서.

 

2. 준비한다.

 내 후반전을 준비해도 되는 지 ..

 나에게 허락하신 달란트로 삶을 살 준비를 해도 되는지

 더 많은 금전을 위해 기도해도 되는지.. 여쭙는다.

 

3.  성령으로 내 생각을 모조리 사로잡길 기도한다.

 성령으로 내 모든 생각 사로 잡으소서.

 날 비우소서.

 내 자아 죽게 하소서.

 십자가 나도 지게 하소서.

 그 십자가가 그리 아프지 않게 하소서.

 주님 예수 생각하여 그리하게 하소서.

 

4. 성경 세장 읽는다.

 죽도록.. 그리하게 하소서.

 

5.  난 죽고 주님 만 살아나게 하소서.

 제 영혼에..

 

6 . 중보한다.

  아침에 내 진료실에 유방암 말기의 아내와 동시에 자궁경부암 어머니를 한 병실에 모신 보호자가

자궁암 환우이신 어머닐 모시고 내려 오셔서 치료 중

내  방에 액자를 보면서 맘에 드는 것을 가르키신다.

'저것과 저것을 아내의 앞에 두면 참 좋겠습니다.'

 당장은 빼어 버리면 이빨 빠진듯 허전할 것 같아

 드리겠다는 소리를 혼쾌히 하지 안했지만 올라가신 후

 아무래도 마음이 움직임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 중 하나, 십자가가 아침 하늘에 드리워진 시화 사진을를 들고

 두분이 계신 - 한 병실에 입원해 계신다. - 8층 병실로 올라갔다.

 한쪽에는 매직 펜을 들고..

  누워 계시는 부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날 알아본다.

 그래서 그 앞에서 '작가로서 싸인해요.. '라는 농담과 더불어

 내 전인치유 찬양인도의 수년 전 경험에 대하여 얘기하고

 작품 설명하니 많이 좋아하신다.

 병실 한 구석, 환우 분의 침대 옆에 걸어놓고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게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리가 맞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주 좋다.

 그 분.

 모든 환우 분들이 고난이겠지만

 보호자는 또 어떻겠는가?

 그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과 어떠한 관계일지

 부족한 머리로는 깊이 모르겠지만

 그들을 위해 내 달란트가 조금이 나마 위로의 도구가 된다니

 마음이 좋다.

 이제  조금 더 긍휼한 마음으로 고난 속의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리라.

 

 기도

 주님

어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어찌 저러한 상황에서

저같이 급한 자아 등등한 자에게

양같은 반응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 닮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제 뇌리에 떠오르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

자존심이란 단어는 생각나지도 않게 하시고

부끄러움은 기억나지도 않게 하시고

걱정은 남의 이야기로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가능성이 있음 만을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이시여.

살아가는 자.

육신의 껍질을 쓰고

아직은 홀로서지 못하는 자식들의 아버지로

한참 더 도와주어야 할 유약한 아내의 남편으로

이제 쇠하여 주님 부르실 나라 가기 얼마남지 않으신 부모님의 자식으로

그나마 그들을 칼바람으로 부터 보호할 자로서

이 현실에 너무 과도한 어려움이 있지 않도록

유연한 삶의 전환시기에

주님의 뜻 가운데서 변화할 수 있을

삶의 패턴을 준비하게 하소서.

이제 시작하려 할 수 밖에 없으니

주님 힘을 주시고

자신감을 주시고

인내를 주소서.

 주님.

주님의 뜻이 모든 세상의 것을 다 포기하라시는 것이 아니신 바

저로 부르시면 손을 놓고 갈 수 있는

결단도 허락하소서.

모두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주님

 삶과 기도와의 이 조화를 진정으로 이루어가게 하시되

삶속에서 영성을 이루어가게 하소서.

주님.

저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뭉치게 하시고

저로 화합의 중심이 되도록

능력으로 이끌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시여.

간절히 빕니다.

주님 닮은 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 만 생각하게 하세요.

간절히 간절히 빌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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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고난 덩어리입니다.
잘나가면 잘나가는 대로 '비교'가 가만히 두지 않고
못나가면 못나가는 대로 또 현실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철옹성 같던 일본이
한번의 쓰나미로 동일 본이 쑥대밭이 되고 원자력 공포로 사람들의 밑바닥 부터 공포로 ..

몇년 전 아파트.. 그 아방궁의 속 대궐 같던 저희 집이 털리어
상당히 많은 돈이 없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그 강력한 철문은 전문 도적들로 반으로 휘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보강재를 파는 업체가 잠시
저희 집으로 호황을 누린 적도 있습니다.

가장 머리 좋은 KAIST 학생과 교수,
탤런트 최XX  .. 식구는 행복하지 않았기에 자살했겠지요.

 어디고 안전하고
누구가 행복하겠습니까?

이토록 세상이 불완전하고 두렵고 갈수록 힘이 들어짐은 무슨 이유인가요?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그토록 자기 만족을 위해 처절히 투자를 함에도
'자아'가 상처입은 자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요?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정말 도살장의 양 같은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토록 힘들어 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와 고난은 없어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양같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은 요.
'자아' 부인이 되신 탓이신 듯 싶습니다.
자기란 개념이 없으시다고요?
아닙니다.
어제 그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가 죽겠다' 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온전하신 인성으로 오신 분이시지요.
그 분은 ..

그 분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탓입니다.
그것도 '성령' 때문에 가능하시지요.


우리의 '나'라는 개념이 날 행복하게 할것 같은 착각으로
마구 마구 살면서
심지어는 '성별'마져 무시하고 사는 세대.
그 세대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마지막을 살 뿐입니다.


주님.
예수님의 그 모습을 닮아 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봅니다.
누가 뭐래도 흔들림없고
내 부족하여도 부족함을 못느끼고
아픔이 있어도 아프지 않고 .. .......
오직 내 자아가 있던 자리에 들어와 앉으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잔잔한 평강으로 채우신다면

 난
세상을 살되
세상을 누리고

세상을 살되
천국을 살게되는

그 심령천국의 비밀을
늘 누리다가
주님 부르시면
그 나라에 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
이 사순절.
고난의 시절이
어쩌면 반드시 고난의 시간 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그득 채웁니다.


 의사라는 이 삶의 시간을 살며
불현듯
자아를 부인하며
마음에 부족하게 느껴졌던
환우분들과
형제같은 동료들에게
조금은 더 잘해주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듭니다. ^^*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 되고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 될 수 있길 기원해 봅니다.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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