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수님 그러하심으로 (마 26:36-46) 본문
제 26 장 ( Chapter 26, Matthew )
그래도
꽃은 피었다
지난 겨울 추위
그리 심했음에도
그래도
매화 피어난다
지난 밤 부는 바람
그리 거세었어도
그래도
십자가는 보인다
바람불어 흔들리는
가지 내눈 현혹해도
예수님의
그 큰 고뇌와
극한의 슬픔은
우리로 하여
사망을 이길
승리를 허락하셨다
결국
이
긴 겨울에도
봄은
오고야 말았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 he began to be sorrowful
and troubled.)
가끔은 '영어 성경'이 훨씬 더 뚜렷할 때가 있다.
그 분은 '슬퍼하고 힘들어 하기 시작하셨다' 라고 하셨다.
제자들을 겟세마네 동산까지 데리고 오시고
그들의 첫 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 , 그리고 야고보 세 제자만을 데리고
더 깊은 곳으로 오시면서
그동안 생각지 않으시던 '십자가'사건에 대하여
이제 '슬퍼하고 번민하기 시작하신 것'이시다.
이 글을 읽고 몇가지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다.
그 분도 사랑하는 제자 들중 더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게
첫번째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상급 면에서 ,
그 사랑하시는 자들 중에 더 사랑하시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단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다르다.
달란트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자들.
그럴 장래가 보이는 자들이다.
누가 주님의 사랑을 더 받을 것인가?
어떻게 받을 것인가?
그것은 내 주님에 대한 민감도와 평강의 정도에 따라
그 사랑 받음을
나와 '나의 하나님 '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 받음이 커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겠는가?
당연히도 '너무 기쁨이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난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한다.
그 체험 중에서 가장 큰 체험은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놀랍게 기쁘고 가슴이 뻥 뚫릴 때이다.
은혜 가운데 거하는 그 체험은
누가 '종교 있으면 좋죠...'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우습게 보일 정도의
체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같은 사랑 받은 소수가 된다면
그 천국에서의 영생의 삶은
어떠할까 생각해보는 것 만으로 도 기쁘다.
두번째로
그 분의 철저한 인간적 면모이시다.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신 이 이율배반적인 진실.
그 분은 자신이 돌아가실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것은 그 분이 '神性'을 가지고 계심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성경 곳곳에 그 분이 돌아가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도 계시고
그 기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그런 그 분이
'슬픔'으로 번민하기를 아주 심히 하신다는 사실이
그 분의 '人性'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여 주신다.
그 분이 인성을 가지셨다는 것은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 분은 당연히도 십자가의 산제물로
스스로를 설정하시고
성육신 하셔서 내려오신 것이다.
그 역할의 하나가 '인성'이시다.
흠이 없는 어린 양의 육신.
그 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성품을 다 지니고 계심으로
인간의 아픔, 그들의 연약함을
몸소 다 체험하고 가셨기에
더욱 우리 , 특별히 죄많은 주하인의 아픔을 체휼하시고
십자가 그 외로운 길,
누구도 할 수 없는
유사 이래,
아니 우주의 開空 이래 전무후무한
그 십자가의 극한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체험하심으로
그 분 하나님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신 것이시다.
이 얼마나 감사하신가?
그런 그 분.
그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그 하나님이 '괴로워 하신다.'
sorrow와 troubled라는 영어 표현이
더 절실하다.
Ace of Sorrow라는 옛날 명곡이 있다.
그 절절한 슬픔의 애끓는 목소리가
어찌 표현이 되랴마는
하나님의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이 주하인의 감정의 폭은
그 명곡이 뇌리를 스침으로 그 마음을 짐작해볼 뿐이다.
또하나 생각하는 것이 있다.
NIV에서는 'begain'이라 나온다.
슬퍼하시고 번민하시기 시작하셨다 한다.
KJV버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글 개역이나 개정 모두에서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 분 예수께서
그 분의 십자가를 아시면서도
누르고 계셨던 그 마음의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만일 나라면,
늘 삶이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하고 머리가 지끈하고
얼굴이 벌게지고 우울해졌을,...
그러다가 '자살'이라도 생각하고 싶을
그 극한의 두려움 속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예언의 능력이 있으신 그 하나님이
이제야 ' 슬퍼하기 시작했다'라고 나오신다.
얼마나 그 분의 인내가 초절하신가..
그 인내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셨을 것은
당연히도 짐작이 가능하지만
제자들을 데리고 와야할 극한의 번민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이제야 겨우 슬퍼하고 번민을 시작하 정도로
누르고 계실 또다른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들을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공생애의 사역에 마음을 더 쏟으셨던 것이다.
사랑 때문에 이제야 두려움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초절한 사랑.
그 예측불가능한 크고 깊은 사랑은
그 분 '人子 예수'를
슬플 기회조차
번민할 기회조차 스스로 주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을 성령께서 도우시고..
4번째로
'두렵다거나 불안하다거나
당신을 그런 지경에 몰아넣은
인간의 그 냄새나는 죄악성이 싫다시거나 밉다거나
바리새인들의 잔인함이
그리고 그들의 그 무지가 속상하거나.. ..'로 표현되지 않으시고
'슬프고'
'번민하고' 로 표현되어진 것으로 보아
그 분은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느끼긴 하시되
그 안에 '죄악성'이 없으심을 보이고 있다.
그 분의 괴로움이
단지 '슬픔'이라니..
그 분의 그 고뇌가 땅을 뒤엎을 두려움이라 표현 되지 않으시고
'번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감정의 온화함이 어디까지이신가?
남에 대한 원망이나 악한 표현은 하나도 없으시다.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다.
특별히 악한 생각을
추리라도 하듯이 사슬엮듯이 엮어가길
습관적으로 하는 이 죄인 주하인은
이 주님의 극한 상황에서도 보여지시는
그 선한 감정의 모범을
가슴 깊이 담아야 한다.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My soul is overwhelmed with sorrow
to the point of death)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 감정이 읽혀지며
그 분이
전혀 그럴 능력이 없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아직은 개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인간적 결점덩어리들인
3제자들에게
'얘들아 , 내가 죽게 되었으니..' 라 하시며
위로를 구하신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신 말씀이시던가?
이 분 예수님의
이 철저한 '인성',
그러면서 순하기가 말도 못하는
가련한 고뇌가 그대로 읽혀진다.
NIV 영어성경의 표현이 더욱 절묘하다.
더욱 뚜렷하다.
' 내 영혼이 슬픔으로 차고 넘쳐 거의 죽을 것 만 같구나'
얼마나 힘이 드시면
이제 조금만 더 슬프면 돌아가실 것 같은 지점까지
극한의 슬픔에 와 있으시단 것이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인간들.
거기에 절묘하게도 드러난
인간 본연의 심성.
난,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지금이나 수천년 전이나
사람들의 극도의 이기심,
그보다 극한 지경에 가면
누구도 정상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을 보이지 못하는
공통점을 발견하며
성경은 살아 있는 글이란
성령의 감동이란 뜻을 이해하게 된다.
위에 네가지로 펼쳐 놓은
저러한 하나님의 고뇌
그 분 예수님의 극한의 슬픔을 보며
이웃집 동물이 죽어도 가슴 아픈게 사람의 도리거늘
어찌 옆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던가?
무슨 마음인가?
그 마음이 놀랍게도 아이러니하고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니던가?
아이들은 많이 혼나면 오히려 꼬박꼬막 존다.
잠으로 도피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은 '멍'해진다.
지독히 일이 밀려 있으면 잠이 더 온다.
이해하기 힘들 때는 잠으로 도피한다.
시험 때는 왜이리도 졸리던가?
극도의 슬픔은 무감각해진다.
인간의 방어기제.
거기에 '베드로 '등은 아직도 메시야로서
예수님과 그 분 제자로서의 성공에
기대를 버리지 못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신 반의 했을 수도 있고
무식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며
열사의 땅에서 행로가 피곤을 견디지 못했음을 이해는 하나
그들의 그런 반응은
절명의 슬픔의 '스승'님의 보이지 않으시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리어 같이 눈물이라도 흘릴 만한데
더구나 뽑혀서 오고 부탁까지 받은 저들이
잠을 잔다.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내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식들의 아픔은 그대로 이해하던가?
그들을 공감하던가?
의무로 사랑하지 않던가?
이웃에 대하여 어떻든가?
예수님의 저 처절함이
내 가슴을 찌르르 하고 울리던가?
그 시점으로 내가 들어간다면
나는 얼마나 눈을 뜨고 자지 않을 수 있던가?
농담처럼 '육신이 약해서'라는 소리로
웃어버리는 감정 마비자의 부류에 그냥 들어 있지는 않을까?
이제 사순절 막바지
주님의 그 고뇌와 슬픔을
조금이라도 도 곁에서
울어주고 기도할 수 있는 순수한 공감이 필요하다.
'주님 슬프시지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어찌하옵니까?
주님............'
적용
1. 예수님의 슬픔을 묵상한다.
아니.. 슬픔으로 표현하시지만 그 고뇌와 고난과
정제된 고통을 묵상한다.
그 분의 그 슬픈 고뇌를 위해 중보한다
이천년 전의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2. 웃음을 줄인다.
덜 크게 웃겠다.
주님은 슬퍼하신다.
주여 잊지 않게 하소서.
3. 십자가의 구원이 너무 감사하다.
주님이 그 슬픈 고뇌를 통해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그 외로움을 통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
그 구원을 통하여 주님은 내 모든 외로움과 괴로움 다 가져 가셨다.
4. 성경 여덟장 읽겠다.
말씀 만이 내 영혼이 사는 지름 길이다. .
5. 겸허하고 soft하게 지내자
주님의 슬픔을 위하여
조심하자.
특별히 집에 들어가 더 그러자.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오늘은 주님의 그 슬픔이 특별히 크게 부각이 됩니다.
주님 가신 길이
놀랍고 감사한 것은 늘 알지만
살아계신 분이
감정을 공유하는 것 처럼
이러하듯 친밀히 당신의 그 고뇌를 말씀하신 것은
처음입니다.
주여.
저 그 정제된 주님의 슬픔으로 인하여
저 그 인내하신 주님의 그 번민으로 인하여
저 그 고뇌를 뒤로 물리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인생.
정말 주님이 안계셨다면 상상도 못할 지금입니다.
그 하나님.
날 구원하시기 위해
저렇듯 피땀흘리는 고뇌를 감수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 생각하면
내 어찌 함부로 살 수 있으리오.
주님 오늘 하루
주님의 뜻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수술 방에서 큰 소리 내지 않게 하시고
찬양시 혼자 뜨지 않게 하시고
환우 분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지낼 수 있길 도우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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