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수님의 아심 (눅22:54-71) 본문
(눅22:54-71)
지난 겨울
그
절대의 괴로움을
그 분은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 분의 때가 되자
날
어루 만지셨습니다
푸른 위로로
그리하셨습니다
이제
나에게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 향한
내 터질 듯한 사랑을
꽃 피워
올려야 겠습니다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예수님을 잡아 끌고 갈 때'
인간 베드로는 세상이 무너졌다.
그의 온통 인생의 촛점인 '예수께서' 힘없이 끌려갈 때
그는 머리속이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멀찍이 ' 쫓아갔다.
그의 특성상 '의리'를 버리지는 못하나
두려움이 너무 커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인생이 무너진 그 허전함을
어찌 받아들이고 융화하고 포기할
마음의 버퍼가 부족하여
그는 '멀찍이 따라 .. 아니다. . 쫓아 갔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춥다.
불을 피우고 앉을 ㄸ대
베드로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두려움 보다 큰 절망은
그의 영혼을 춥게 만들었다.
세번이나 부인을 할 정도로 극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그를 그 자리에 붙들게 한것은
지옥의 절망과
정서적으로 파국의 지경에 와 있으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추위 탓이었다.
그는 '미래'를 확인하고
자신의 앞으로의 살아갈 방향을 확인해야 하는
절절한 욕구로
멍하게 있었다.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들.
예를 들어 가까운 친지를 잃은 자들,
부부 중 하나가 먼저 소천 한 경우
.....
그들은 무감각의 멍한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심한 통곡'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베드로가 그런 상태였다
베드로는
파국에 임했다.
그는 철저히 '외롭고
철저히 두려웠고
철저히 고통스러웠으며
철저히 '죄송스러웠다.'
그의 영혼은 서리내리듯 몸서리칠 추위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몸이 아프심이 더해지셨다.
제자들의 '배반'을 경험하셨다.
모든 사람들의 '놀림'이 더해지셨다.
불을 쬐어야만 견딜 수 있는 추위에 불 근처에 가실 수 없었다.
그런 그 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정서적 어려움'과 더불어 '육신적 고난'의 극한을 경험하시고 계신다.
하지만 베드로는
정서의 파국에 이르렀지만
예수님은 아니셨다.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그 보심을 보고
베드로는 '심령'에 큰 충격을 경험하고
마치 엘리야가 영적으로 깊은 우울을 경험한 후
더 깊은 회복을 하였듯
예수님은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계셨다.
그들을 통하여 '우주적' 결단이 '십자가' 사건이
수천년을 거쳐
영원까지 이어질 도구로 '베드로'를 만져가시고 계셨던 것이시다.
예수님과 베드로.
비록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기에 비교할 가치도 없긴 하지만
인간 예수님도
인간 베드로 뿐아니라
오늘의 모든 인간들이 겪을
영적 , 심적 , 심지어는 육신적 '극한'을 경험하고 계셨지만
베드로가 '나락'까지 떨어졌던 것 과는 달리
그 분은 흔들림이 없으셨다.
그 극한의 어려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를 통하여
그 분이 온전히 우리들,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반응의 차이를 보임은 어쩐 일인가?
정확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매일 매일 이 땅을 살면서 겪어나가는
그 풍파의 어려움을
담담히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당연하지만 '기도' 뿐이 없다.
검 둘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야 말로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내가 세상을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기도하면 '성령'이 임하신다.
성령은 모든 것을 감해 주신다신다.
그 분은 어려우셨지만 하나님에 온전히 매여 있으셨다.
그래서 그 분은 그러한 평안이 가능하셨다.
무엇이 옳은가?
이 어지러운 세상.
천정부지, 절대 불패할 것 같았던 '부동산', '주식' 을 의지하는가?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진 자들도 뛰어내려 자살 해 버릴 만큼
가치없는 재산과 명예를 의지하는가?
내 위치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금방 발돌리고 말,
허무하고 의미없는 '인맥'이던가?
나이들면 언제 먼저 가버릴 지 모를 소위 '우정'을 의지하는가?
위안하고 좋은 소리하는 '정서적' 이웃은
또 몇십년 더 그래줄 수 있을까?
답은...없다.
이 세상에는 없다.
베드로는 '영웅 예수' , '인간 예수',
하나님의 심성과 능력 유사한 '능력자 예수'만을 보고 갔기에
그는 흔들렸다.
그 결국은 ' 지옥의 경험'이었다.
누구도 손내밀어 위로할 수 조차 없는
극한의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 분 만이 오직 소망이어야 한다.
내 정서 모두를 경험하고 체험하시고
나에게 길을 제시하시는
그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
그 예수님 처럼 흔들리지 않는 절대의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성령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적용
1. 베드로의 '절대의 고독'을 이해하자.
인간은 누구나 그런 존재다.
그런 그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는 현상을 불쌍히 여기자.
그것은 혐오할 일이 아니다.
긍휼히 여길 일이다.
지금 웃는 자도 곧 늙어 갈 것이고
지금 부한 자도 곧 스러져 갈 것이다.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바라볼 일이다.
부러워 할 일은 아니다.
2. 목표를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한다.
세상의 부와 평안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된다.
극한의 순간에 결과는 드러난다.
' 세상을 살되 천국을 지향한다. '
지속적으로 사모하던 말이다.
잊지 말자.
3. 하나님은 나의 고독과 영육간의 힘듦을 다 아신다.
힘내자.
4. 기도 만이 살길이다.
주님 예수님의 그 담담한 시선을 기억하자.
모두 기도가 답이다.
5. 성경 세장 읽자.
기도
베드로의 흔들림을 봅니다.
그의 영적 '추위'를 봅니다.
너무도 절망이 깊어
그 추위가 뼈에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입장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분은 베드로보다 더 추우셨을 듯 합니다.
육신적으로는요.
하지만 그 분은 '베드로'의 심령을 어루 만지십니다.
아니.........
이 땅을 사는 '나'를 포함한
모든 아픈 자를 어루 만지십니다.
그분은 모두 체험하셨습니다.
절대의 고독과
극한의 아픔
거기에 '사랑하는 자들의 배반'으로 인한 좌절까지.......
세상의 모든 악한 감정들을
모두 몸소 체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를 봅니다.
그것은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절대 순종.
기도를 통한 절대의 순종을 이루어내신 탓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부족한 '나'를 사랑하신
절대 사랑의 결과이십니다.
놀랍습니다.
저.......
가능치 않은 저 사랑과 저 인내를 닮게 하소서.
성령님으로 도와 주소서.
그리고 , 그분이 절 저리도 체험하시고 아시고 계심을 믿게 해주소서.
감사하신 주님.
예수님의 그 눈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픔 가운데서도 눈을 들어 바라보시는
베드로를 향하신 그 시선.
잊지 않게 하소서.
내 폐부를 찌르고
내 영혼의 풍성한 위안을 주시는
그 눈을 잊지 않게 하소서.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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