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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형통(눅23:13-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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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형통(눅23:13-25)

주하인 2012. 4. 5. 09:39

(눅23:13-25)  

이런 분위기는

싫었었습니다

 

외롭고

답답하고

메마른 듯하고

무엇인가 튀어나올 듯

그저

싫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아름다움을

깨달아 알기 시작했습니다

 

풍경은

변하진 않았어도

깨닫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허락하신 지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제 조만간

어느 상황에서도

막힘없이 깨달아지는

아름다움이

눈을 채우게 되면  

 

그제야

진정한 형통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듯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주의 사랑이

그분의 허락하신

이 형통함을 깨달음이

진정

감사합니다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아침.

아들을 데리고 새벽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옛날의 습관들이 아직도 내 영혼에 남아

휘적 휘적 저어지는 것들이

새삼 사순절을 맞이해 '크게 ' 느껴지는 것 만 같아

아침 잠이 많지만 그랬다.

 다행이도 그런 결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하면

그날을 감해 주신다는 약속처럼

'은혜' 가운데 편안하게 할 수 있음을

연륜으로 체험되어서 이다.

신앙의 경험보다는

나이 가 든.......^^;

 

 어쨋든 요번의 '사순절'은

고난은 변치 아니하고 되풀이 되되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진다는

진정 믿는 자가 해야 하지만

나 같이 부족한 자가 감히 그렇듯 큰 목표로 결단을 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말씀 가운데 조금씩 그래 보니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늘 묵상은

저들, 미련한 바리새인 들 - 자신들이 세상에서 젤 똑똑한 줄 아는 - 과

부하뇌동 하며 '호산나 ' 외치던 입에서 '죽이라'는 소리로 바뀌는

머리없는 '군중'들...

변호는 하지만 '자신' 속에 갇혀 우유 부단하게 흔들리다가

결국은 '십자가 ' 에 예수님을 달리게 할 '빌라도' 들이

그 뒤에서  그들을 움직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 사단' 의 준동을 보며

그 시간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

 

당연히도 '십자가' ,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을 아시며

그 고난의 길이 얼마나 힘듦을 미리 다 아시며

그들 어리석은 사단 무리들이 '착각어린 오해' 에 의하여

시간이 질질 끌어지는 그 고통의 시간동안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계셨을 까.. 하는 것이

오늘 묵상을 하며 드는 생각이었다 .

 

새벽예배를 드리며

다양한 제목으로 글이 떠오른다.

'예수님의 독백' ......

하지만

메마른 이 심사는

주님 허락하신 그 풍성한 감성을 놓치고야 말았다.

 

 돌아와 진료를 하고나서

틈틈히 올리려니

쓰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우며

몇차례나 구겨 던져 버리는

'시심' 떨어진 작가 같이

되풀이 하던 '묵상 시'를 결국 포기했다.

 

오늘 ' 예수님의 고난'은

위에 나열한 그 어지럽고 무가치한 듯한 시간이

질질 끌어지며 가중되는

'인간 예수님'의 심적 고통과 육신의 고통이다.

그러면서도 '인내'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심성에는 어떤 생각들이 돌았을 까..

아마도 틀림없이

성령님을 매개로 하신 하나님과의 대화가

세상의 번잡함과는 멀리 떨어져 관조하듯 바라보시며

그 어려움 마져

하나님께 맡겨 버렸을 것이겠지만

그 '고난의 시간' 동안

고난을 관조하는

예수님의 본질에

조금은 닮아보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고난을 굳이 피하려 하기보다

진정 그게 하나님의 뜻이시라면

고난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맞추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안'을 체험하길 바래본다.

 

어제 .

수요 전인치유 예배에서

시편 1편을 가지고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가며

새삼 잊고 있던 '진정한 형통'에 대하여 깨달았다.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요셉은 '옥'에 3년 간 있을 때도

10년간 종살이 할 때도  '형통' 하다고 나와 있다시고

진정한 '형통'은 고난이 없는 상황이 아니고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함' 으로 얻어지는 은혜와 이루어짐이라 하셨다.

맞지 않던가?

너무나도 잘알고 있지만

너무 자주 잊어 버리는 것.

내 묵상을 통해

내가,

내게 주님이 진정바라시는

옳은 인생은

'매일 말씀'을 통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영이

나에게 주시는 '현상'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흐름'을 체험해가며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고

그게 초지일관 내 블로그의 글을 채우는 핵심 논리 아니던가?

 그런데 어쩌면 '각론'인 삶속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무너지고야 말았던가?

 

오늘 예수님의 자리에 '날' 대입해 보았다.

전혀 똑같을 수는 없지만

비슷한 '억울한 '자리 속의 삶에 들어 갔을 때

나도 예수님처럼 되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 때, 난 예수님처럼 '묵묵답답'으로

마치 '자아'가 없는 '로봇'처럼 있을 수 있던가?

그게 '내 절대의 결심'의 결과가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리고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사단이 기승을 부려 이기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예정 ' 속에서 지어야 할 '십자가'를 지는 일임을 알아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게 될 수 있던가?

 

그런 예수님.

본래 하나님이신 신성을 지니셨기도 하지만

인성을 지니신 인자 예수님으로서는

그 엄청난 고난의 세력 앞에

두려움 없이 입을 다물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견디신 것만은 아니시다.

그분의 견디심은 '겟세마네 기도' 이후로 끝이시다.

성령님과 하나님의 절절한 동행으로

그 분은 '참 고요'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은혜'의 상태를

자주 자주 .. 경험하곤 한다.

머리는 터질 듯 복잡하고

환경은 어렵지만

'기도원' , '골방' 앞 십자가 아래가서

소리내어 기도하면

순간 물방울 터지듯 터져 나가는 고민과 불안들......

그 후 깨달아지는 말씀 속의 진실들..

그리고 안구 뒷쪽이 습해지는 듯한

눈물어린 평화.................

 

 그렇다면,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가?

고난 중 예수님의 그 묵묵함을 닮길 원하신다.

고난 중 임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신다.

그래서 '진정한 형통'의 의미가

고난이 없음이 아니고

그 중에서도 '평강'을 누리는 것임을

내 영혼이 깨달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

예전과는 조금 다른 삶의 패턴을 취해 보리라.

주님이 그것을 조금씩 인도하심을 본다.

힘들어도 '결단'할 때가 되면

결단하기를 '사모'해보는 것이다.

주님 기뻐하심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인내하자.

그럴 때 더 하늘 보자.

모두 , 하나님이 하셨음을 기쁨으로 깨달아 보자.

모든 것, 하나님의 '선'아래 있음을 믿어보자.

 

 

 

기도

 

내 하나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오늘 새벽을 깨웠습니다.

비록, 제가 바라왔던 그럴 때 허락하시는 강렬한 '정서적 기쁨'은 체험하지 못했고

뛰어난 영적 결단의 당당함을 내세울 만하지는 못했지만

주님........

예수님의 하나님 안에서 흐르시는

그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주여.

간절히 소원할 것은

그런 고난 시 내 마음 속에 치달아 들,

각종 혼란을 잠재우소서.

아니..........바라옵기는 예수님이 보이시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어

그들의 어이없는 행동은 판단하고 알되

그 사람들 자체는 이해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자동으로 그리되게 하소서.

논리적 싸이클 을 거쳐 얻어지는 노력을 하지않아도

이제 인격으로 익어가게 하소서.

그러지 못하는 나의 미숙이 발견되어도

'당황'치 않게 하소서.

성경의 영웅들처럼

당장의 '자아'없는 사람들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닮아가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나에 대한 스스로의 실망에 대하여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녹여내고 받아 들이게 하소서.

주님.

사모합니다.

안되는 부분 조차 인도하셔서 가능케 하시고

그렇지 못하며 남는 잔해들은

성령의 용광로 안에 넣어 녹여 버리게 하소서.

그래서 점점 새로운 인격으로 성장하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흐르는 '형통'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과 나만이 아는 내밀한 그 축복을

'형통'으로 간직하고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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