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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이름인가(행3:11-26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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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이름인가(행3:11-26 )

주하인 2007. 9. 8. 10:18

제 3 장 ( Chapter 3, Acts )

 

( 가을 테라스는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 이름입니다.)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예수가 생명의 주로 확실히 느껴지는가?

살아나신 게 확실히 믿겨 지는가?

증인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지금 나에게 묻는 다면

서슴없이 까지는 아니어도

서서히 자신이 생긴다.

그분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 맞다.

다시 살아나신 건 배워서가 아니고

그게 아니면 내 삶이 의미가 없어지기에 맞다.

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러 다닐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방법론이 어떻든...

 

 


16.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름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그 이름에 함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사람을 특징 지우는 이미지가 형상화가 되고

그림이 그려지며

그로 인하여

감정 반응이 나와

사랑의 감정이 나오기도 화가 나기도 하게 된다.

 

 어머니

 아버지

나에겐 복잡한 이름들.

아내

아들

머리가 아프기도

기쁘기도

삶의 움직여야할 이유가 되기도 하는..

친구

그 친구 중의 몇 몇 이름은

되뇌이기만 해도

웃음이

편안한 따스로움이

안스러움이 일기도 한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그 대상의 정체를 믿음으로

난 그들에게 신뢰도 갈등도 느낀다.

 

 오늘

예수라는 '이름'이

묵상을 진행하는 동안 명제로 떠 오른다.

당연히

남들이 믿고

남들이 십자가의 위대성과 절대 없으면 안되는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여

머리로는 알고 있고

어느 순간

그 이름이

조금씩 동토의 얼음 같던 내 마음과 영혼이 녹아지게 하고

부르는 순간

녹아지는 구멍들이 생겨

그 아래로 운행하는 

내 영혼의 열정에 찬 기쁨의 숨결을 느끼게도하고

그 옆으로 파릇 거리는 풀처럼

장래에 대한 희망도 살아나오는 것을 느끼게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솔직히 고백하면

생명의 주

아픈 것을 성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리석고

미련하고

바보 같은 주하인 !

 

 이제 주님은

복잡한 논리적 과정이나

기도를 하며 한참의  집중의 시간을 거쳐야만 느껴지는

초보적 믿음의 차원 -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믿음이라 생각하는 - 을 넘어서는 믿음의 차원이 있음을 '이름'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생각케 하신다.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그 이름만 들어도 힘이나고

그 이름 만 들어도 아픈 게 없어지는..

 

어제 'ㅂ'님이 힘이 없는 업무 중 찬양을 들으니 이상하게 힘이 난다는 고백을 들으며

부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은혜의 기간 중에는 나도 그랬지만

그런 은혜를 받는 그 분이

잠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나에게 질투의- ㅎㅎ - 마음을 불러 일으켰지만

오늘의

'예수라는 이름'을 믿기만 하면

몸이 성해지는 원리도 비슷한 것 아닌가 싶다.

 

 그리 믿음이 커지길 원한다.

그 믿음이

예수란 이름 만 들어도

금새

친구처럼

다정한 아버지 처럼

모든 걸 이해하고 감싸줄 상담자 처럼

하나도 못고칠 것 없는 치유자처럼

해결사처럼..

당연히 그리 느껴지길 원한다.

 그게 실체화 되길 원한다.

그림이 그려지고

만져지고

생각 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길 원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야 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가을 하늘이름은 생각만 해도 시원하고 유쾌하고 높아 보입니다. )

 

 어떡해야 그럴 수 가 있는가?

위에서 고백한 대로

난 아직은 아닌데..

오랫동안 블로그에 묵상을 올리기 위해

그분에게 집중하고

가능하면 그런 집중에 장해가 될 죄악 부분을

하나하나 털어낼 선택의 시간을 많이 보냈음에도

아직은 요원하다.

 

 어떡해야 하나?

 

십자가 한번으로 이전 죄는 다 해결다 지만

아직 구석 구석 깊이 눌려 있는 죄악 들은

매일 매일  들어내어

십자가 앞에 말려야 할 것이다.

 오랜 원망 , 분노와 그 기저가 되는 깊은 상처와 생각의 오류에 집중하고

그 부분을 특별히 내려 놓아야 한다.

십자가 앞에 ..

 

 

유쾌하게 될 것이다.

땀 흘리고 시원하게 샤워 한 후의 개운함보다 훨씬 큰 유쾌함이

주께로 부터 온다한다.

은혜 중의 눈물나는 통쾌함이 가끔은 전율하는 강도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전 보다 은혜가 훨씬 더 은혜롭다.

유쾌라는 기분을 그래서 난 안다.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얼마나 개운하겠는가?

 

엊저녁 자려고 몸부림치다가

기도로 대치하던 중

복잡하던 머리가 정리되면서

누워서 코 골고 있는 아내가 갑자기 이뻐 보여

몇번 '아이구'하며 볼도 만지고 했더니

아내 왈

'제발 자중하세요...'

 

 상황에 상관없는 '유쾌함'.

내 의지와 감성체계를 배반하는 주님의 주권적 유쾌함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해도

이적이 나오게 하고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복을 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만사형통.

이 땅위의 것을 넘어서는

이 땅의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주시면 더욱 좋지만 - 내적인 천국이 이루어지고

하늘나라의 큰 상급으로

우리의 삶이 훨씬 기름진 상태가 복이다.

 

 이러한 복은

이러한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먼저 오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이름 때문에

자연스레이

우리의 악을 버리게 될 때에 가능하다.

 

 

적용

 

1. 이름에 대하여 묵상한다.

  친구,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아내, 아이들,...

 

2. 예수라는 이름은 과연 어떠한 의미인가 묵상한다.

 

3. 자꾸만 되풀이 되는 원망과 분노를 주님 앞에 내려 놓겟다.

 

4. 복.

 믿는다.

 

5. 성경 다섯장 읽겠다.

 

 

기도

 

주님

오늘 묵상은 이름에 대한 것이 었습니다.

주님

예수님이란 이름에

숙연하여 지며

어쩔 생각도 못하고

십자가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 믿어 오려 몸부림 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이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그 마져 도우소서.

십자가가 개념적 의미가 아닌

살아 있는 박동감으로 느껴지게 하소서.

흐르는 피가 영혼의 때를 온전히 태움이 느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인도하시고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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