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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문의 ( 스6:13-22 )

주하인 2009. 11. 20. 09:01

제 6 장 ( Chapter 6, Ezra )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불리울지

그 누가 알수 있을까?

 

하지만

있는 자리에서

나만의 크기로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꽃  피워내고 있을 줄

주님 만은 아시리라

 

확신한다

내 존귀하신

 주님이

얼마나 날

기뻐하시고 계실는지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들이 신속히 준행한지라
 '신속히'

그게 누구든

누구에 의한 것이든

주님의 시간이 여 빨리 오라.

나야...

아들들아... 

'신속히' 변화되길 원한다.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

     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어떤 상황이 바사 수도에서 벌어져가는 지 몰라도

유다 장로들은 '스가랴'의 권면으로

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하다.

 주님의 일은 '형통'이다.

그것은 '흐름'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잘 되어도 막힌 곳이 있다.

세상에 잘나가도 돈을 많이 벌어도 썩어가는 곳이있다.

  형통한 오늘을 보라 !!

'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  과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의 조서'를 좇아.. 라 되어 있지 않으신가?

옳게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들을 것이 뻔하고

거기에 '세상의 세력' 까지 '조서'를 내려 일을 도우지 않는가?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반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누군가?

세상의 원리에 짙게 사로잡혔던 자...가 돌아온다.

나는 아니던가?

내 아들들은?

세상의 흔들리는 신앙인들은 아니던가?

 그들이 돌아와 '유월절'을 지킨다.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지킨다.

신앙의 회복이다.

기초의 회복이다.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케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이 정결 문제.

'정결케 하여 다 정결하매' 라 나온다.  
 기초를 회복해야 한다.

기초는 무엇인가?

율법과 무엇이 다른가?

 똑같은 모양이되 율법은 '기쁨' 이 없고 형식 만 있으되

기초의 회복은 ' 열렬한 기쁨'이 동반되는 것이다.

 

 

 이 문제.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 날은 경건한 복장이 중요하다'라  설교하셨다.  

거두 절미하고 '넥타이'를 메고 검은 양복을 메고

다리 꼬지 않고

손에 물병을 들지 않고  - 성장반 지도 목사님의 말씀으로는 갈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하지 않으려는 상징적 게으름이라신다.   - 예배에 들어오고

거룩 거룩한 분위기.. 좋다.

그런 경건함이 없음이 오늘날 개신교의 방탕의 이유이긴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수적 장로교의 지나친 거룩은

성령의 움직임까지 제한하려는 율법적 모습을 띄고 있음이 심히 우려스럽기도 하다.

 집 가까운 곳의 비교적 큰 교회는

소리내어 기도하면 뒤에서 잡아다녀 나가라 한다고 한다.

물론, 지나친 것은 안되지만 제한은 또 위험하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

다리 잘꼰다.

달달달 떨기도 한다.

물은 들고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래도 비교~적은 '영적'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매일 넥타이 매는 '의사'의 직분이다.

일요일까지 넥타이에 검은 양복에 발 아픈 구두면

난 어쩌라구....!!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예수님은 자유를 위하여 오셨는데... ㅜ.ㅜ;;

하지만 거꾸로 내가 그런 목사님이나 연조 있으신 장로님을 보면

마음이 안좋은 것은 사실이긴 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분명히 묵상에서는 '정결케 하여 정결하매'로 나와

형식적 갖춤을 강조하고 있는데..

 

나 , 유치원 때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 옛날 춥게 살던 때

머리에 교모 내지 유치원모자를 쓰고

늘 흐르는 콧물을 닦으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다녔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리라. ㅎㅎ

 중학교 고등학교

꺼먼 엘리트 교복 -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최고였다. - 에 목에

하얀 칼라들어가고 후크로 잠고

단추는 하나하나 금박 둥그런 단추를 열심히 꿰어 입고

교문 들어갈 때는 신발 끌고 다니지 않는 지

운동화 단속도 했다.

 명찰은 잘 꿰맸는지..

머리는 상구머리나 스포츠머리에서 2센티 이상 올라오면

머리 뒤를 바리캉으로 여지없이 밀어 놓아

박박 깎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수업시간에 행여 졸기라도 하면

참으로 엄한 선생님들은 여지없이 대걸래로

엉덩이에 10여대 이상의 몽둥이..

그나마 마음이 좋으신 선생님께 걸리면

나무 걸상을 들고 복도로 나가 두손 높이 들고 있어야 했다.

그때 추위로 발발 떨던 기억....

그리 문제학생은 아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 나사하나 풀린 듯

규격이나 규제에 적응 못하는 ,

그러면서 나름대로 공부는 잘해

선생님들에게 이상한 아이로

너무 심하게 혼내기 보다는 약간은 봐주는 정도의

규제를 받아가면서 겨우겨우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니

이것은 완전 자율이다.

머리는 장발이라 눈이 덮혀 보이지 않아

머리크기가 누가 언뜻 보면 바구니 하나 이고 다니는 것 처럼

더부룩하고 크게 보일 정도.

 의대라 한시간 빠지면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데도

수업은 느즈막히 일어나 11시경에 어슬렁 거리고 나가고...

겨우겨우 의대공부를 마치고

다시 레지던트 되기 위하여 인턴 시절 부터

치열한 경쟁이 알게 모르게 시작되더니

레지던트 되니 매사에 당직이다 선후배다

엄청난 규제가 따른다.

 그러다가 겨우겨우 전문의 따고 세상에 나오니

누구하나 잔소리하는 사람없다.

이제는 철저히 '세상에 혼자 '놓여져 홀로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그 판단에 따라 환우의 생명이 심지어 왔다갔다할

절명의 외로움에 놓이게 된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세미나 '찾아다니고

더 나은 지식을 얻으려 이리저리 분주하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원장 소리 들어가며

배운 지식 가지고 있어도 건물 몇채씩 소유하게 되는

운좋은 분들은 그렇지 않은 분이 있을 지 몰라도..

 

 저 이야기를 하는 이유.

'규제'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려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 고등학교 까지 점차로 규제하다가

대학교 이후 자유화다.

그 후 다시 레지던트 하며 규제하더니

또 다시 전문의 따고 세상에 풀어 놓으며 완전 자유다.

단, 책임이 따르는 무서운 자유.

레지던트는 사고내면 '과장' 전문의가 책임진다.

병원에서 진다.

하지만, 그 후는 모조리 본인책임이다.ㅜ.ㅜ;;;

 만일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그 규제를

모든 세대에까지 다 적용하려면  그것은 '율법'이 될 것이다.

반면 초등학교 아이를 방치하면 그 아이는 타락과 무식의 극치를 달리게 된다.

'방종'이다.

한번 풀어 놓고 그냥 끝이면 '나태와 천박'에 빠지게 된다.

언젠가 한번 - 레지던트 시절 처럼 - 자신을 조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어놓아 방종에 빠지니

바사에 끌려가게 하여 강력한 신앙 훈련을 받게 하고

다시 출바사하여 이스라엘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한후

그들을 열심도 보이고 가만~~히,  잠잠히 - 진짜로 '잠잠히 있어' 다.- 인내도 시켜

신앙의 성장을 도우신다.

 이 정결하고 정결할 시간.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평범하게 살 사람이나 특별히 다른 사명으로 , 이유로

못다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제'는 필요하다.

 그게 타력에 의한 이유이건 자신의 이유에 의한 절제이던

정결케 하려는 스스로의 노력은 '기쁨'을 초래한다.

 형통하게 된다.

그 형통은 세상의 것과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자주 이야기 했지만 수도적 성향의 교단에서 신앙생활 시작했다.

신앙의 초보를 탄탄하게 쌓았다.

주님의 십자가 속죄제사의 원리도 정확히 배웠고

절제와 인내의 타당성에 대하여도

그 안에 있는 자유로움에 대하여도 배웠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성장에 따라 ,

사람 특성상 차이에 따라

하나님은 ' 그 분의 하나님'이고  ,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교단 분위기는 주님 안에서 '흐르는 것'을 몰랐다.

 오늘 묵상은 주님 기뻐하시는 순간에는

다리오왕 들도 조서를 보내어 일을 격려하지 않는가?

일방적이고 일률적인 성경해석과 적용은

마음 속에 짐으로 다가오고

그 짐은 자유를 앗아가는 듯 했다.

형통 보다는 '자아'만 커지는 듯 했다.

기쁨은 없어지고 차가운 자기 만족만 키워 갔다.

그게 '천주교'의 수도원의 결국이고

개신교의 탄생원리인데..

 

 우리 목사님의 경건한 옷 문제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강요할 일은 아니다.

목사님은 권고로 교육하고

자신의 영적 상황에 맞추어

그 문제가 반드시 하나님이 노하실 일 아니고

이웃에게 실족하게 할 일이 아니면

조심스럽게 따르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게 율법과 방종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을 방법이다.

 

오늘 묵상은 '형통'하다.

그 형통의 기본은 '정결하고 정결함'이다.

그 정결하고 정결한 자들은

온갖 방종 후 하나님의 허락하신 맹트레이닝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과정이다.

그 과정 중에 '하나님의 전' 건설이 들어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어서 세상의 모양새까지 갖추어 주신 것이다.

그것이 형통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흐름의 원리다.

너무 일방적인 정결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정결 마져 주님의 때에 주님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주님의 때에 올라타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때 어떻게 정결의 노력을 해야 율법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

그런 원리를 깨닫고 그런 때를 알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고착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영혼이 봄바람에 꽃피워 내듯

시원한 가을 바람에 익은 곡식 , 그 흐름에 맡기우듯

자연스럽고 기뻐야 한다.

하나님이 베푸신 세계 속에

하나님의 부시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에너지로 움직이며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기쁨 안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쯤 되면

옷을 검게 입든

청바지를 입든

주님께 죄송하여 다시 넥타이를 매든

지나치지 않을 간편한 옷차림이 되고

운동화를 신든 어떤 문제가 있으랴.

 그 원리 안에서 영혼이 온전히 흐르게 되면

'영적 전문의'가 되고

영적 전문의의 마땅한 '원리 안에서의 자기 노력'에 따라

더 큰 상급으로 완전성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때쯤

주님이 천국 건물 몇채 살 영적 부요함도 허락지 않으실까?

쏟아 부어주시는 축복안에서...

 

 

적용

1. 난 어떤 상태인가?
  당위성이야 빨리 성장해서 영적 성화된 영적 전문의가 되고는 싶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절제도 하고 싶고 금식, 금욕하고 싶다.

  하지만 서둘르고 싶지는 않다. 

  무섭다

  절제하려면 먹는 것도 자제하고 이쁜 여성들 훔쳐보는 것도 회개해야하는 데.. ^^;;;

  주님이 때가 되면 인도하실 것이다.

  일요 예배때도 마찬가지다  .

  한번 더 강력히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지만

  권고의 말씀이니 그냥 참조하기만 하겠다.

 

2.  기다린다.

  서두르지 말자.

  자식들의 장래도 , 무엇이든..

  하지만 주님.

  오늘 말씀 서두에서 처럼 '신속히' .....

  아시지요?

  기도한다.

 

3.  주님의 기쁨을 자꾸만 잊어간다.

  작은 절제는 해 보자 .

  아침 마다 여섯 시에 일어나겠다.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말씀 읽는 것은 습관이 되질 않는다.

  읽으려 할 때마다 마음에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온다.

  아무래도 영적 방해인 듯 싶다.

  하지만 적용에 이렇게 다짐이라도 해놓으니 가능하다.

  이것은 주님이 정결케 하여 정결케 되는 원리 중 하나인 듯 싶다.

  감사한 주님..

  열심히 준수하겠습니다.

 

 5. 주님의 축복은 '영육'간에 온다.

   통합적으로 온다.

   하고 싶고 해치우고 싶은 유혹적인 일이 와도

   주님의 시간을 기다린다.

   주님의 말씀과 세상의 도움이 함께 올 때까지 가능하면 기다린다.

 

6.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내 젊음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주께 맡기고 기도한다.

 

7.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아침에 좀 일찍 당직 방을 나와 출근했다.

  출근해서 기도를 하다 보니 진료실 문이 열려 있었는 줄 몰랐다.

  아기 환우가 앞에와 조잘 댄다.

  이쁜 참새처럼.ㅎㅎ.

  아.. 이쁜 아기들 사진 열심히 찍던 것 잊어간다.

  내 영이 메말라가는 증거다. 

  주님의 영감이 더 필요하다는 증거다.

 내 올바로 서지 못하고 있는 게으름의 증거다.

  회복.. !!    기도하자.

 

 

기도

 

 주님.

말씀이 감사합니다.

정결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다시한번 묵상해 보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늘 느끼지만

율법과 방종 사이에서 '절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기쁨을 놓치지 않는

주를 위하고

이웃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자신에게도 자책이나 좌절을 유발하지 않을 원리이라 생각합니다.

주여.

주님이 인도하셔서

빨리 정결한 결심을 하게 하시고

그 결심을 인도하시어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되는 현상과 폭팔적으로 함께 하시사

절 주님의 길로 인도하소서.

주님.

주님 안에서 '정결하려는 노력'의 '기쁨'을 아는 자입니다.

체험한 자입니다.

그 정결하려는 주 안에서의 순종이

얼마나 귀한 성품인가를 잘 아는 자입니다.

놀랍게 체험했습니다.

이제 게을러지지 않게 하시고

앞서지도 않게 하소서.

절제할 자신감을 주시고

주님을 위해 절제할 지혜도 주시고

충성도 주시오소서.

그리하에 세상이 놀랄

영육간의 축복이 제게 임하게 하소서.

제 자식들도 그리하소서.

이곳에서 말씀을 같이 나누는 모든 분들께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다윗과 요나단 베스트찬양 20곡모음*
    01) 요한의 아들 시몬아
    02) 친구의 고백
    03) 고백
    04) 담대하라
    05) 해같이 빛나리
    06) 쓴 잔
    07) 오늘 이 하루도
    08) 주님여 이손을
    09) 주님을 느껴봐요
    10) 주만 바라 볼찌라
    11) 주님 손잡고 일어 서세요
    12) 사랑은 사랑의 응답
    13) 이사야 41:10
    14) 이런 믿음은 안돼
    15) 오호라 나는
    16) 우리의 만남은
    17)기쁨의 노래
    18) 푸른 감람나무
    19) 누가 아는가
    20) 주님 사랑 온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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