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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먼저 샬롬하자 (눅 12:13-2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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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먼저 샬롬하자 (눅 12:13-21 )

주하인 2008. 2. 12. 14:59

 제 12 장 ( Chapter 12, Luke )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나무와

인생의 모든 삶이

주님의 생명으로

어루 만져지길...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물질적으로 '가난' 이란 무슨 상태일까?

왜 그리도 가난이 힘들까?

너무 어리석은 질문일까?

지금도 가난하다고 가정을 하는 게 두렵다

(죄송하다.. 정말 없으신 분들께...)

그러나,

그 두려움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난 알고 있음에도 그 상황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기 싫어 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나 뿐일까?

요새 사람들은

'재 테크'다 .

'노테크'다.

펀드, 부동산, 10억 벌기, 부자되기.....

온통 관심이 '부'에 가 있다.

모두들

가난을 극도로 싫어 한다.

 

 정말 가난은 그토록 힘든 것일까?

그토록 증오하고 물리쳐야할 惡일까? 

이 짧은 인생에 온통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전 시간을 다 쏟아야 할 만큼

그렇게나 '가난'은 '極惡'이란 말인가?

 

 요사이

차를 안 몰고 다니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내가 월급으로 벌어다주는 돈의

아주 소액만 용돈으로 받아들고

남들이 좋다하는 투기나 주식이나 펀드에

관심을 크게 안두면서

퇴근하는 길에 하늘을 쳐다보고

사진기를 들이대고

불어오는 바람에

콧잔등을 벌름거리고

걸어오는 강변길의 여유로움에

가끔은 심취하는 내 삶이

그리 크게 괴롭지는 않고

오히려 마음이 여유롭고 평화로움을 느낌을 볼때

'가난'을 연습시키는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이 정도면...' 이란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있다.

그럴 때

머리 속에서는

'아니, 그렇게도 무능해도..

 아니, 그러다가...

 아니, 너만...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불현듯 '경제학 잡지'를 들춰 보고 픈 생각도 없지 않아 있지만

'에이,

때가 되면... '이라는 생각으로 물리고 있다.

 그럼에도 막상 가난이 확 몰아 닥치면 견딜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있지만 말이다.

 어느 분은

가난은 '불편'할 뿐이란 얘기를 하셨다.

가난은 마음의 평온을 의미하고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행복지수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란 얘기도 있다.

 성경의 구절 구절을 보면

육체를 풍성하게 만족시키는 일련의 '정욕'은

성령과 반대된다고 하신 것 처럼

육신의 가난은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깊이 받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가난이 두려운 일 만이 아닐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극도로 싫은 존재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왜 일까?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부자의 비유가 나온다.

이 부자의 19절 혼자의 소리를 들어보면 

위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도 그런다.

영혼이 평안하다...라고.

이것이

가난을 싫어 하고

부를 기뻐하는 

한 원인이자 

아주 큰 이유일 듯 싶다.

 부자가 되면 아무때나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어

일시간 마음이 여유로운 듯 싶을 수도 있고

없는 자에 비교하여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유치한 감각이

얼마나 만족 되겠는가?

 오늘 부자의 고백은

그런 감각적 만족에 의한

심리적 위안을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박탈 당하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의 평안'을 빼앗기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진짜로 그런가?

영혼이 위의 부자의 고백처럼

가진 것으로 평안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행복지수 예처럼,

기독교인 중 선택받은 소수자들의 평강 - 평안을 훨씬 넘어서는 평안 -처럼

옛날 가난 한 때의 이웃 사랑처럼

없음은 오히려 평안을 크게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가?

 

 우선은

사람 들의 모든 관심이 '세상'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이 끝이라 생각하는 삶의 행태는

관심이 물질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한 16-18절 까지의

부자의 고백에서 보이듯

 '내'라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오는 데서

단초를 삼을 수가 있다.

 큐티를 인도하시는

원장님의 설명이 이렇다.

" '내가'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자는  직원으로 뽑지 마라'

" ' 내가'라는 단어는 침략의 대명사다"라고 하신다.

 맞다.

 오늘 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나'에게 가 있다

내 감정적 편안

내 물질적 부요

내 칭찬

내 평안

내 집

내 아내

내 재산

내 새끼

내 출세.................................................

거기에는 어떠한 동정이나 여유로움이 들어갈 틈이 없다.

남에 대한 사랑은 아예 있을 수가 없다.

 오직

남과 비교하여 성공하고

남과 비교하여 많이 벌고

남과 비교하여............

라는 명제만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라도

채워진 물질적 부요가

오늘 부자의 고백처럼 '평안'을 장담할 수가 있느냐이다.

 가난한 자의 행복에 대하여서 다시금 들 출 필요조차 없다.

 아침의 원장님의 말씀에서 처럼

타워 팰리스 60평에 살며 학교를 몇개나 소유한

친구 분의 고백이

' 부자라는 것이 외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 내려가는 기분이며 멈출 수도 없고

속이 타고 가슴이 터질 듯이 심장이 뛰어도 세우면 넘어지기에 그리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 '이라

하신다.

다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 부라는 것은 바닷물을 삼키는 것 같다.'

삼킬 수록 갈증이 커지는 것이다.

 세상의 것은 모두가

처음엔 달콤타.

그러나 끝은 짜고 힘들고 터질 듯하다.

 이것이 평안한 것인가?

 

 결론은 이렇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세상의 부 만을 추구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지 않으려는 자는

'어리석은 자 ' 다.

그들은 심지어는

단 하루에 , 단 몇분에도

평생을 쌓아온 업적이 스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주님의 시간 안에서...

 

 부를 추구함은

감각적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 근본이지만

실제로

평안은 '영육간의 평안'이 평안이다.

그것이

샬롬이다.

영이 먼저 샬롬하고

육은 나중에 따라서 샬롬하게 되는 것이

진짜 샬롬의 원칙이다.

육은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다.

내가 앞서 나가

물질의 부를 통한 샬롬을 구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주님이 그냥 두지 않으신다.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가난과 부는 모두 주님의 뜻임을 인정해야 한다 .

가난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도 큰 고통 만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받아 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주님께 고백해야 한다.

비록

아직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뛰어도.................

 

 가난은

반드시는 아니어도

주님의 평강에 다다르는 지름길이기는 하다.

그 가난이

특별히 주님의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의 원리를 아는 길이라면

달게 받아 들일 수 있길 원한다.

 오늘 묵상 구절에서 그러신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생명,

생동감 있는 삶.

살아 있는 삶

그 생명의 삶은

오직 주님이

 

 

 

적용

 

1. 가난에 대하여

 가난이 진짜로 두려운 상황인가 묵상하자.

 주님의 뜻이면

 어떤 것이든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주님의 허락한 가난은 기쁘게 받아 들일 수 있길 기도한다.

 

2. 부함에 대하여

 주님이 주실 것이면 받는다.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내려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직은 어렵다.

 

3. 성경을 여섯 장 읽겠다.

말씀으로 부요케 된다.

 

 

기도

 

 

주님

아시지요?

주님

주님 뜻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

실은

나보다는 남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마음

저에게는 없는 성품이오니

주님께서 절 인도하셔서

제 영혼의 질서를 바로 잡으소서.

주여

가난해도

주님으로 행복할 마음의 품위를 유지케 하소서.

지나친 물질을 사모치 않게 하시고

지나친 세상의 욕심을 놓게 하소서.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아직은 저에게 선한 구석이 없습니다.

주님의 평강을 받아 들일 구석이 없습니다.

주여

주님 뜻대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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