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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다 / 부제 : 하양 까망(눅12:22-3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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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다 / 부제 : 하양 까망(눅12:22-34)

주하인 2008. 2. 13. 07:31

2006년

보르네오 섬

다약 족 방문 시 찍은

깊은 밀림의 야생란.

백합은 아녀도

주님이 주신

천연의 그 생명력이

오늘 비유의

백합과

다름이 없이 느껴져서....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까마귀는 까맣다.

보기는 싫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까마귀를 싫어한다.

그 소리도 거북스럽다.

까악..소리는 소름이 끼친다.

가까이 오려면 돌을 던지고 싶다.

안되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

 까마귀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

참으로 싫을 지 모른다.

누구도 싫어하니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 없으니

삶이 괴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이

까마귀는

자신을 모르는 짐승이다.

 주님이 그리 만드셨다.

 

 백합화는

참 아름답다.

청초하다.

누구라도 가까이 하고 싶은 꽃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꾸며도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긴 아니다.

 그래도

자신은 그리 생각 안할 줄 모른다.

그러기에 청초하지 않을까?

 

 두 전혀 상반된 예를 보고 있다.

하나는 동물이고 , 다른 하나는 식물이다.

하나는 거멓고,  다른 하나는 희다.

하나는 혐오스럽고, 다른 하나는 많이 호감이 간다.

하나는 역동적이고, 하나는 차분하다.

하나는 끄덕하면 배 고파지고, 하나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하나는 위험할 수 있고, 하나는 보호받고 위함 받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까마귀는 불쌍하다.

백합은 그 아름다움이 부럽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까마귀는 까마귀이고

백합은 백합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는 부러울 것도 좌절도 없다.

그냥

까맣고

그냥

하얗다.

배고픔도 가난도 큰 위협이나 삶을 중단시킬 좌절이 되질 않는다.

남들의 추앙도 그리 기쁘거나 으쓱할 것이 되질 못한다.

그냥,

까맣게 깍깍거리고

그냥,

하얗게 한들거린다.

 

 그냥 그렇다.  

 주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런가?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아상'이란 것이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을 너무 낮추어 보는 '까마귀 같은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을 백합보다 더 아름답게 착각하여 보는 ' 과대망상형 자아상'도 있다.

 사람의 행동 양식은

이 자아상에 비추어 결정되곤 한다.

 부정적 자아상을 가진 이 들은

매사에 소심하거나 혹은 반동 형성으로 오버하기도 한다.

구석 쟁이에 쪼그려 들어 앉아

온갖 걱정과 근심으로

자신의 생을 깍아 먹기도 하고

그로 부터 파생되는 스트레스로

이웃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삶이 허무하고 어두워진다.

 과대 망상형의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 자는

상황에 맞지 않는 행실로

주위 및 본인 자신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 삶에 진실이 없기에

표현하고 느끼지 않으려 하지만

삶은 늘 공허하고

곧 잘 지친다.

허무는 늘 과도한 행실로 보상받으려 하고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까마귀는 까마귀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다.

이들은 주님이 만들어 주심을 본능적으로 알고

거기에 만족하기에 그렇다.

주님이 전제가 되면

까마귀가 까만 것은 문제가 되질 않는다.

비교할 이유가 없다.

대상이 없어진다.

그냥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여

까악하고 울고

퍼드득하고 날다가

지치면 동료 까마귀들과

전선 줄에 앉으면 그만이다.

주님은 만드신 만큼 책임져 주신다.

불만이 없다.

혼란이 없다.

 

 백합은 백합이다.

과도한 자신감은

장미와 비교하게 하고

독초의 풀과 같은 자극적 향을 발하게 하여

백합의 청초함을

무뎌지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백합은 주님을 위한다.

백합은 백합이다.

백합의 모습을 기뻐하고

백합의 하얀 색을 그냥 발하며

백합의 한들거림을 바람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백합은 청초하다.

백합은 아름답다.

솔로몬의 어떤 보화보다도 귀하다.

백합은

주님께 눈을 맞췄다.

 

 까마귀와 백합은 다르지만

까마귀와 백합은 하나다.

까마귀와 백합을

우리는 저주하고 부러워 할 줄 모르지만

까마귀와 백합은 스스로 만족한다.

그들은

두려워 하지도

힘들어 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다.

 

 그냥 그들은 그렇다.

주님이 계시기에 그렇다.

 

 자아상 이야기를 하였다.

자아상은

남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내면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

'의미있는 타인'

즉,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나

의미있는 자들의 반응 속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평생 담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게 자기 인 줄 착각하며..

 

오늘 묵상을 하며

백합은 백합으로

까마귀는 까마귀로

자신을 투영하는 자들은

까마귀되 백합이고

백합이되 까마귀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님이 전제 되기에 그렇다.

주님은 온전한 '거울'이다.

주님은 온전하고 절대적인 '의미있는 타인이자 의미있는 나의 또다른 모습'이다.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자.

주님을 믿자

주님 만 바라보자 .

현실의 흐트러진 반영에 흔들릴 일이 없다.

주님이 아니시라면 아니다.

주님이 걱정하지 말라면

걱정하지 않으면 된다.

주님이 사랑하라면 사랑하자.

원수도 사랑하기 어려우면

주님께 기도해서 내려 놓자.

 끝없이 속상함과 비교와 걱정과 염려가 속에서 올라오면

가만히 주님을 바라다 보자.

안됨을 고백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분.

약속의 그 분.

온전하신 그 분이

우리를 왜곡으로 부터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면

힘들었던 내 삶은

구겨짐이 펼쳐지고

짓누르던 무게는

어느새 사라져

평강의 삶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까마귀면 어떻고

백합이면 어떤가?

까마귀면 까마귀 임을 인정하고

백합이면 백합임을 그냥 감사하자.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까마귀이되 백합이다.

난....

 

 그게 내 운명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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