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와 남과 주님을 위하여 ( 눅 12:36-48 ) 본문

신약 QT

나와 남과 주님을 위하여 ( 눅 12:36-48 )

주하인 2008. 2. 14. 12:43

제 12 장 ( Chapter 12, Luke )

' 모두 저길 봐라..

 주님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 '

확성기 외쳐도

쳐다 보는 사람없는

냉랭한 세대올시다.

 나 만이라도

주님 만날 때까지

늘깨어

하늘을 쳐다보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켠다는 이야기는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또 삶에서

어떻게 하는 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는 것일까?

 전인치유도

아버지 학교 스텝봉사도

진리에 목말라 그토록 열심히 갈구하던 분들도 

수년의 시간이 지나면 다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남아 있는 자가 얼마 없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자들도

습관처럼

열기나 뜨거움은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해야

주님의 청지기로써 기쁘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모든 일 접어 두고 주님의 일 - 전도, 봉사, 구제... -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청지기는

누구고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나는 청지기는 맞는가?

청지기라면 자부심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자부심 더불어  확고 부동한 책임 의식은?

지치지 않을 방법은?

탈진하지 않고 매너리즘을 벗어날 방법은?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복'이 있음을 아는게,

아니

그보다 체험 하는 것 만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리라.

 그분의 청지기가 됨은 분명코 

천국의 질높은 삶 뿐아니라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까지 포함하는

복이다.  

 그 복은

주님이 직접 이뻐서 주실 물질적 복 뿐 아니라

삶의 흐름이 물같고 복된

그러한 복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의 상태와는 상관없는 깊은 행복함이다.

 그러한 행복은

깨어있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복이다.

 즉,

청지기의 삶이 기뻐서

복된 삶임을 영혼이 느껴서

그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되는

온전한 삶이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이런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것이냐?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물을 당시에

자신이 청지기임을 자신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럴 가치가 있는 자임을 전혀 믿지 못했다.

의식 조차 못했다.

어리석은 어부가 그가 가진 

자신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의 명령을 따를 자신이 생길 것이다.

그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다.

주님의 말씀은

나보고 청지기를 하라는 것이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상에서 다양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우리로써는

다양한 가능성의 업무를 지닌

청지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서두에서도

묵상을 진행했지만

꼭 교회 일 만 구분 짓고

세상일은 따로 생각하는 '이원론 적 ' 구분에 의한

헌신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형제로서

남편으로서

부인으로

직장인으로서

다양한 모습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습에서

위치가 어떻든

버스기사든

의사든

약사든

보험인이든

아버지든

딸이든

아들이든

주님의 말씀에 맞추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최선은

'내가'라는 의식이 앞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기에'

'주님을 위해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에너지가 충만해야 한다.

 그것 만이

지치지 않고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

유일한 길이다.

 끝까지

주님오실 때까지

주님 만나볼 날까지

지치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복있는' 자의 길이다.

그길이 '청지기'의 운명이다.

 

청지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청지기가 되면

이런 행운이 따르기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게 본질은 아니다.

비 본질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야 낫지 않는가?

 

 어제

한분의 전도사님을 만나 뵈었다.

일찍 끝나는 수요일.

바람은 세차게 불지만

생각이 퍼뜩 났다.

그 분과 많은 부분

공유할 부분이 있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비밀.

지평에 대하여도 이해를 하고

평강의 기쁨에 대하여서도 이해하고

영혼의 샬롬에 대하여서도

통렬한 기쁨에 대하여서도

기독교인으로서 선택 받은 것은 절절한 행운에 대하여서도

선택받은 소수자의 가능성에 대하여서도 

서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얼마 전 내가 깨달은 것이어서

눈 빛이 빛났고

나의 공감에

서로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기뻐할 줄 알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전화와

마침 그 때 바쁜 일을 마치고 나온 그 분과

각본에 없었던 만남은

마치 하나님의 위로와 같았다.

혼자만 기뻐하고

누구도 공감할 수 없다면

자칫 과대 망상으로 빠질 위험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 상황이었고

이것은

청지기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소수에 속하는

부류임을

주님께서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현상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것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큰

넓은 지평의 새로운 복의 개념을 깨닫는 자들로서의 위치를 부여 받은 것이고

그런 우리는

앞으로 주님 뵐 때

주님께서

모든 소유를 저희에게 맡길 것이라는 말씀이

절대로 성경이란 책속에

미사여구의 사멸된 글자로서

존재하는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 분이 주신다면 주시는 것이시다.

마음을 열고 받을 준비하라.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이 부분에서 걸린다.

선천적으로 게으른 나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죽도록 하라라면

�이 덜컥난다.

 

 어제 만나뵌 그 분 전도사님께서

아시는 어떤 엘리트 부부 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대학생 시절 부터

구제를 주님의 맡겨진 사명으로 생각하고

표현대로라면 1년에 400일  - 어떤 때는 두 팀 씩-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먹이고 용돈주고 재워주고

식구들 외식 나갔다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청년 들에게

아들 주려고 시킨 돈까스를 주고

아들의 푸념을 물리치며까지

그들에게 먹이고

지나가는 걸어가는 사람들 모두를

태워주려는 마음으로 넘쳐

아들을 pickup하는 걸 잊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던

상태의 분으로

이걸 주님의 청지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에서

괜한 분노와 울분으로

우울증까지 걸릴 지경이었던 분이 있었다는 얘길 들으며

청지기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어디까지가 '자아'고

어디까지가 '주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인지

구분하는 것인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님을 다시금 느낀다.

 

 오늘 주님의

조금은 거북한 말씀

'복'과 '징계'에 대한

선택 받은 소수자 들에게 하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대하여

조금은 더 지혜가 필요하고

조금은 더 충성이 필요하고

조금은 더 깊은 주님과의 만남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거기에는

날마다의 주님의 뜻을 상기하는

매일 같은 동행 , 즉

코람데오의 삶이 필요하고

주님의 주시는 열정과 기쁨의 체험이 필요하고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옳다 인정하시는 날마다의 체험과

그 행사가 남을 위하여 도움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여'서도

그것이 결코 어그러짐이 없는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의무를 행하는 자는

더 많은 기쁨을 주신다.

기쁨이 안되면

더 많이 가진 자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아'가 앞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청지기의 의무라는 점에

과도한 집중을 하기 보다는

자신과 주님의 원함 사이에서

조용한 조절이 필요하다.

가끔은

카톨릭의 '피정'이라는 제도가

힘있게 다가온다.

주님 안에서의 고요한 쉼.

관상.

안식.

 

기도

 

주님

자꾸만 주님의 말씀이 단절이 되어

깊이 있는 만남을 유지하기가 어렵나이다.

주여

부디 

주님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잘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제 뜻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주님 안에서

주님의 충분한 보육을 통하여

주 뜻에 맞춘

충분한 위안도 주시옵소서.

그리한 다음

남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사랑을 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청지기의 삶에 대하여

묵상을 진행하기도 전,

많은 다양한 생각들이 스치고 지남을 봅니다.

지치지 않도록 하소서.

때로는 힘이 들어도

주님의 말씀이 기뻐서

주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고 나가야할 선이심을 확신 하기에

청지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하소서.

이 땅의 삶이

복된 삶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주님을 준행하는 것임을 체득하였기에

청지기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하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알려줄 의무가 있고

입을 열어

듣지 못한 자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적임을 아는

온전한 청지기의 삶을 살게 하소서.

헌신도

전도도

봉사도

구제도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파할

도구가 되기에 그리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