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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바리새인과 소수의 경계(눅12:1-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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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바리새인과 소수의 경계(눅12:1-12)

주하인 2008. 2. 11. 14:48

해가 지면

수 많은 사람들은

다 뿔뿔히 흩어진다.

그래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해가 지기 전

그 분이

내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인식해야 만한다.

그래야

긴긴 밤의 외로움에도

외롭고 슬프고 힘들지 않다.

오히려

지는 태양은

아름다운 석양으로 보일 것이다.

 

 

제 12 장 ( Chapter 12, Luke )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무리가 수 만명이면 무슨 소용이냐?

제자 들에게 만

주님은 주의를 주신다.

 기독교인 이면

다 똑같은 기독교인인가?

 

 일반 무리의 기독교인과

제자 기독교인은 무엇이 다른가?

 

주님의 대접이 다르다.

무리에게는 달콤한 것만 주신다.

치료를 주시고

방임하신다.

구원 만 주시고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으신다.

사탕을 주어도

이빨 썩는 것까지는 '교육'을 하지 않으신다.

주님도 '더' 사랑하는 제자들이 따로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시고

베드로에게만 여러 질문을 더 하셨고

신신당부도 더 하셨다.

막달라 마리아 식구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다.

 

 선택된 소수에게는

교육을 하신다.

사랑의 지도를 하신다.

교육을 받음은 귀찮다.

고통이 동반된다.

고통은 가차 없고 해결책 없는 것이 아니다.

발전을 위한 고통이다.

그 고통은 희열을 동반한다.

깨우침의 희열은 공부 잘하는 자 들 만이 안다.

모르고 아는 체 하는 자들은

'바리새인'이 되기 쉽상이다.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신다.

특별히 외식은

'군중 앞'

'무리 앞'

그리고 곧 이어 나올 8절의 표현에서 처럼

'사람 앞'에서 이루어 진다.

 

 사람들이 몇 만명씩,

그것도

과거의 인구를 생각할 때

지금의 수십만명이 모인 것 만 큼

엄청나게 대단한 인파였을 것이고

그 중심에 서계신  '예수님'을 대장으로 모시는

제자들에게는

자부심과 더불어 옳은 선택을 했다는 안심을 넘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픈 충동이

그들을 사로 잡게 했을 것이다.

외식은

스물스물

그들 영혼을 사로 잡을 수 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예수님이  

그 신위를 통하여

카리스마를 통하여

자제가 되지 않고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들릴 듯 말듯 하게

아는 자들에게

소근 거리고 싶은 생각을 견디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나귀 귀'

얘기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나오는

사람의 죄성

어리석음이 분명코 자극되어서 일 것임이 분명하다.

 

 보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누구도

이러한 상황에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

왜 참지 못하겠는가?

 

 어제

재직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지론을

조금 강하게 (^^;;) 말씀 드렸다.

다니고 있는 교회가

수도적 성향을 띄는 교회로

조그마한 교회가 그러하듯

여러 사소한 걸리적 거림이 없지 않다.

사소한 걸리적 거림으로 부터

영적인 변종의 위험이

다분하다는 것을

늘 긴장하며 보고 있던 차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여 억제한 톤으로 말을 했으나

늘 나에게는

직설 화법이 문제가 된다.

그걸 난

스스로 느끼고 있다.

 

주님은 오늘 이러한 마음을

찝고 계신 것은 아닐 까 싶다.

분명코

잘못은 잘못이되

그 잘못을 지적하는 태도에

내 잘남을 증명하고 픈 욕구와

잘난 체를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겸비되어

그러한 것은 아닌가...

주님은 소근 거리는

내 속의 작은 마음 도 밝게 비취신다.

 

 ' 주하인

 선택받고 싶은 소수야.

네 마음을 들여다 보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조신하게 말을 했던가?

그 안에는

또다른 영적 바리새인의 외식은 없던가?"하고...


 

4.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

    하니라
 하지만

두려워 할 일 만은 아니다.

 

주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선택 받은 소수인 지..

외식을 하는 지

외식을 하려는 마음은 있는지

본의인지?

느끼고는 있는 지?

그 분은

우리 속의 스쳐 지나가는

죄악의 흔적 마져도

사단의 긁음도

그 분은 다 헤아리고 계신다.

( 느끼지 못하는 자

  느끼지 않으려는 자

  느낌을 터부시 하는 자..

  소수와는 거리가 먼 자 들일

 가능성이 많다.  )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그 분은

우리

소수,

혹은 소수가 될 자,

또는 소수가 되기를 소원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사람 앞에서

즉,

우리의 죄악성이 들어날 상황에서

그 분을 시인하면

그 분도 우리를 시인하신 다고 하신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

 갑자기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당혹스럽다.

 

  하지만,

내 일생의 모든 일은

주님과 동행하며 이어지는 '선택'의 결과이며

그 선택은 '성령'님께서

세미히 주시는 말씀을

천둥처럼

아니면

실제의 아버지의 말씀 처럼

듣고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과

주님에 대한 감수성의 결과의 차이일 뿐이다.

 

 세상의 허접한 것들은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주님 만이 정리 하실 수 있을 분임을 고백하며

그 분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이 인도하시면

나의 모든 것이

다 정리가 되고

올바르게 될 것임을

기뻐 고백해야 한다.

 그 분 성령님께

내 의지와 삶을 모두 인도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어느 사이

내 삶은 내가 통제하던 시절의

그 우울함과 답답함과 무거운 짐은

떨어져 나가게 되고

훨씬 가벼운 삶을 살게 된다.

 

 오늘의 구절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말할 것을 알게 하리라는 것은

미사여구나

철학적 사유의 근거가 아니다.

그것은

죽은 말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내 체험이다.

 또,

우리의 체험일 것이다.

좁은 길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

어찌되었던

내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주님으로 인하여 정화되고

심지어는

간증거리로 나왔는 지는

알 사람은 안다.

  그 분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게 그렇게 인도하신다.

우리가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누일 때

우리의 몸이 물 위로 뜨는 것처럼

그 분께 삶을 맡기고

의지할 때에야

그 분이 우리를 부양시키신다.  

 그 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가

단지 구원 만 받고 만족하며

이 세상의 삶 만 치중하여

우리의 어깨에 더욱 더 

근심과 절망으로 무게를 더하기 보다는

조금은 눈을 들어

선택 받은 소수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 인식의 결과가

그토록 큰 평강의 기쁨으로 이어지고

이어진 평강이

결과론 적으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축복으로 가는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 과정은

그리 쉬운 것 만은 아니다.

우리 원죄로 부터 파생되는

그 수없는 자범죄의 유혹을

날마다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 설 그 때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동행하는

파트너 쉽의 삶을

노력하지 않고는

언제든지

사단의 흔듦에 발을 헛딛고

주님 성령님의

그 놀랍고 경이로운 인도하심의 삶의

평강을 잊어 버리게 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

귀하신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피를 뿌리고

눈물을 참아내시며

우리를 위해 못박히신

그 귀중한 사랑을

또다시 헛되이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일 들이 벌어질 줄은 모른다.

 

 가슴이 아프다.

 주님은

이 죄의 쳇바퀴 돌 위험 성에 대하여

당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고통을

하찮게 까지 표현하시며

늘 주님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영위하길 권하신다.

 

 

 

적용

 

1. 성령님의 소리에 민감하자.

 주님의 말씀 대로 살려는 '노력'을 한다.

 

2. 오늘은 말조심하자.

 성공하였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더욱 조심하자.

 특별히 성령의 열매 - 온유, 겸손, 오래참음, 양선.. 9가지-에 어긋나는

 행위의 결과는 너무너무 조심하자

 

3. 겸손하자.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읽어야 영혼의 기준이 생긴다.

말씀을 통하여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자.

 

5. 난 특별한 소수에 속하길 원한다.

 명심하자.

 내 '정체'다.

 

6. 두려움은 주님께..

 다 아시는 주님을 믿는다.

 

 

기도

 

 주님

하루 종일 정신없이 부산했습니다.

특별히

오래 쉬고 나니

마음도

몸도 나른한 게으름이 지배하는 듯만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좁은 길을 가야만 하는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지도를 보고 있게 하십니다.

주여.

전 제가 그런 자인 줄

확신도 못하고 있고

자격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 당위성과

그 들의 평강을 맛보았기에

이리 고백합니다.

주여

저희들의 인생을 지배하소서.

저희들

주님의 손 잡고 갈 수 있도록

지혜와 평강의 유혹으로

잡아 끄소서.

그냥 두지 마시고

늘 그렇듯

말씀으로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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