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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닦는 하나님도 하나님이다 ( 눅 11:37-4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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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닦는 하나님도 하나님이다 ( 눅 11:37-44 )

주하인 2008. 2. 9. 10:51

제 11 장 ( Chapter 11, Luke )

 

구정

귀향하는 들녘.

이 날에도

손 안닦고 밥먹는 자,

서로 이견으로

다투는 집도

많았을 것입니다.ㅎㅎ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들어가 앉으신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길 소원하신다.

그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이시다.

그래서,

누구나 기독교인이라고 이름 할 수는 있다.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그래도

각 개인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주님을 이상히 여기는 자유조차도

그들에게는 허락이 되어 있다.

 

 너무나 웃기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 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지 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판단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심지어 주님 조차도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집어 넣어 이해하려 한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 손 안닦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인가?'라고

이 잘난 바리새인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게 과연 하나님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하나님이 때나 닦고 손을 잘 닦기나 하면 훌륭한가?

그럼에도 이러한 논리가 웬일인가?

 

 이런 것이다.

인간은 속을 들여다 보면 이리도 논리 부재이다.

난 안그럴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강한 은혜와 감동으로 날마다 잡아 주어도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으로

남을 향해 투사한다면

그것은 과연 주님을 내 안에 담는 것인가?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악독이 없어야 한다.

탐욕이 없어야 한다 .

겉으로만이 아니다.

비단 주님에 대한 공손함 뿐이 아니다.

주님이 만드신 피조물 모두에 대하여 그래야 한다.

그러기에

주위 모든 사람 들에게도

주님처럼 대해야 한다.

어떤 포악이나 폭력이나 나쁜 마음은

주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인간들은

생각과 같이 되지는 않는다.

마음은

주님의 뜻대로 사랑을 베풀려 하지만

그마져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특별히

사랑의 탱크가 비어 있는

상처입은 자들은

도저히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다 아신다.

밖을 만드셨으면  속도 만드셨다.

문제는 우리는 속을 어찌 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밖을 누르고 있다가

용수철 처럼 안에서 튀어 나오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하고

좌절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더 남에 대하여

강력한 원한을 품고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주님을 욕보이는 것이고

주님을 향해

손 안닦고 있는 엉터리라고 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남도 사랑해야 한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모든 뜻을 받아 들이는

1차 지각이  필요하다.

내 뜻과

내 생각으로 비틀어 받아 들이는 것은

2차 지각이라 한다.

이 2차 지각은 모두 죄다.

 

 

 

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NIV에서는 '잔의 안에 있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헷갈리지 않는가?

안에 있는 것은 '독'과 '탐욕' 뿐 이고

그 독과 탐욕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아무리 이겨 내리라 해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을

이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신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 믿으면서

너무 헷갈리는 것이 많이 있다.

역설의 진리.

주님은 늘 한 상황을 보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장한 나와

성장하지 못했던 나를 대상으로

동시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돌려 말하면

지금은 형편없는 속을 가진 우리지만

곧 나아질 속을 가진 우리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 다울 것임을 아시고 계시기에

그 장래의 나에게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그 안에 있는 것'은

앞으로 회복될 아름다운 심령

바로 그 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아무런 할 자격이 없는가?

 주님의 사랑으로 내 내면이 온전히 된 후에야

내 사랑의 탱크가 주님의 부으시는 기름으로 온전히 채워진 후에야

내 안이 주님의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진 후에야 만

구제 하여야 하는가?

 아니다.

오늘 주님은

그리하면 깨끗이 된다고 하셨다.

즉, 아니지만 하라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행실을 변화시키면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일상에서 얼마든 지 증명이 된다.

떠드는 학생을 반장을 시키면 착해진다.

 행실을 통하여

감정이나 육신의 증상을 변하고자 하는

심리적 요법의 하나 가

현실요법이다.

행동요법이다. 

이것에 주안점을 두는 곳이 기존의 여타 종교들이다.

불교는 참선한다.

인도의 어떤 종교는 지독하게 가학을 한다.

기독교에서도 '천주교' 쪽은

믿음과 행실 중

행실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야고보서나 베드로 서는 '행실'쪽에 무게를 둔다.

맞다.

행실로 얼마든지 마음까지 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맞지 않다.

인간이 그리도 쉬운 존재인가?

한계가 있다.

반장하던 자들이 언제까지 착하던가?

외부가 변했다고

내부가 변하지 않는다고

오늘 묵상 구절 시작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가?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며 외부적으로 잘 연단 되어 가는 자들이나

묵상을 오래하던 자들이

예기하지 못하게  '화'를 터뜨림을 보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 보인다.

최소한 내 눈에는....

이 걸 쓰는

주모 역시 마찬가지다.

잘 나가다가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이걸 아시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도

부족한 인간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오해하고 자중지란에 빠지는 가?

이렇게 저렇게

찢어지고 분열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다 못해

주님께서

'믿음' 으로 거룩해 짐을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주셨다.  

 하지만

어리석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믿음 지상주의로 자꾸만 방탕으로 빠져 간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실과 믿음의 상관관계는 어떤가?

선교나 구제 우선인가?

주저 앉아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서 

온전한 성화- 거의 불가능하다- 후 구제하고 행동하는 게 우선인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온전치 않아도 하라'이시다.

하되

행실을 우선하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

그 행실의 변화 조차

내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르고자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행실의 변화를 통한

인격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어느 순간에 반드시 옛 성질이 튀어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을 인식함이 옳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반드시 튀어 오르는 반발이 있게 한다.

이것을 인식하지 않고

스스로 주님의 십자가 탓으로 완전 성화체로 착각한다든가

아니면

도저히 자신은 구제할 수 없는 죄인으로 스스로를 옭죄거나,

행실로서 이길 수 있기 위해

과도한 통제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정말 이루기 불가능한

한마디로

바보같은 생각이다.

최근,  심리학적 방법으로  '내�치유'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있다.

아니,

내적치유의 대부분의

심리학적 테크닉이 우선 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위험할 수준까지 와 있다.

하나님은 방법이고

철저히 심리학적 방법론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행실' 우선 주위에 또다른 변종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효과를 본다.

하지만 또한 반동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멈출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유로 행실의 변화를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주님의 기뻐하심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깨진 사랑의 탱크가 채워지는 원리다.

이 채워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평강'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으로 변화의 에너지를 삼는 것이다.

이게 '샬롬'이다

샬롬의 힘으로 내면이 자연히 정화됨을 느끼고

그 과정에 삐끗 삐끗하는 흔들림은

어쩔 수 없는 죄악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며

잘못이 있을 때 순간 순간 회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내면 즉, 안이 반드시 주님으로 정화될 것이라는

확신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안 마져

주님이 만드셨음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승리는 반드시 올 것이고

우리의 것이되

과정은 거쳐야 할 것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스스로 포기하고

안된다고 묶여 버리고

주님의 감각적 위로만 즐기는 것은

또 주님에게 손 안닦는 다고 질책하는 오류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 만은 아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안다면

주님의 우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 분의 우리에 대한 눈물의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그 철두 철미한 방법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을 밝히 안다면

더구나,

그 결국이

천국의 영원한 삶인 것을 안다면

이 땅에서의

약간의 고통은 그리 힘든 일 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고 쉬울 일이다.

 

 주님은 그렇다.

힘들지만 쉽다.

어렵지만 가볍다.

두렵기도 하지만 그 분은 눈물나는 기쁨이다.

 

 문제는

어리석은 우리의 이 인지장해와  알면서도 벗어나길 싫어하는 '자기 연민'에 있을 뿐이다.

 

 

 적용

 

 

1. 주님의 피조물 모두를 사랑한다.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신다.

그 뜻의 첫째는

주님의 뜻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시다.

그 사랑 안에는

나 스스로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2. 내 규격에 맞추는 모든 판단을 포기한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더더구나 '화'를 내는 일은 포기한다.

 어떤 명분이든 남에 대한 포악은 '죄'다.

주님을 파는 명분은

큰 죄다.

 

3. 회개한다.

 알면서 짓는 죄는 더 큰 죄다.

 주 모는 너무너무 잘 안다.

 

4. 삶과 내면의 조화에 대하여

 세상의 물질 적 삶을 살면서

내면의 완성과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

 주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인생에서 어떻게 조화가 될 수가 있는가?

문제는 '받아들임'과 '내려놓음'이다.

내가 손해 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고

그러한 욕심 조차

내 개인적 판단 조차

모두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용기와

확고 부동한 지혜가 필요하다.

상황 상황의  주님 안에서의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 마져도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온전한 내려 놓음이 필요하다.

 

5.  주님 안에서의 평강의 경험을 매일 매일 넓혀간다.

 주님의 평강은

물질 세계의 모든 손해와 바꾸어도  손해나지 않는 장사다.

주님의 평강이

온전히 매일 같이 날 주장하게 하소서.

주여.

 

 

6. 성경 앞에 늘 선다.

여섯 장 읽겠다.

묵상을 묵상하겠다.

 

 

기도

  지난 며칠은

구정 연휴로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집에 다녀왔습니다.

우상의 날이라서 인지

알게 모르게

마음이 많이 분주 했습니다.

특별히

이 곳 저곳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아버지

그 분에게 시간이 얼마 없음을

초조히 느끼고

교회 나가시라고

직언해야 했기에

그 안에서 느끼는 저항이 만만치 않으셨기에

속이 흔들 흔들 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주  안에서 많이 중심이 잡혀 있어서

급한 분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영적인 부대낌인지

밀려오는 답답함이 어제 하루 종일 절

힘들게 했었습니다.

 오늘 묵상을 보며

만일 제 주관으로 만

제 속의 의로만

주님 말씀을 앞서 나갔더라면

어찌 되었을 까.. 하는 당혹감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그리하면 깨끗할 것이다..라 하신 말씀이

하나씩 이해가 갔습니다.

주여.

어느새

제 안에

주님의 원리로

깨끗함이 들어차고 있었습니다.

주여.

힘든 과정을

쉬지 않고

주님 말씀을 선택하고

거의 매일 같이

묵상을 붙들고 오는 동안

제 안에는

악독과 원망은 조그맣게 사라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 아버지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주여.

고백했듯이

아직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면 깨끗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의 약속으로 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그 때..

주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깨끗하여진

그때는

얼마나 제 안에 평강이 소용돌이 칠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주여.

간절히 빌 것은

주님 오실 그날까지

주님의 온유로

주님의 평강으로

절 붙들어 주소서.

주님의 보혈이

제 온 혈관을 역동하고 일주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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