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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속의 기차역 (요일2:12~19) 본문

신약 QT

영원 속의 기차역 (요일2:12~19)

주하인 2007. 2. 21. 08:40

1 John) 2:12~2:19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난 누구인가?

누구로 알고 있는가?

아직은 주님을 믿긴 믿지만 죄를 짓고 그 죄가 사함 받는 통쾌함을 느끼는 전적인 은혜 안의 초보 단계의 믿음인가?

아니면 의지를 발휘해 '악한 자'를 한 두번 이겨본 경험이 있어 , 그로 인한 주님의 평강이 자녀의 단계에서 받았던 것보다 조금 강렬하고 조금 오래가는 평강의 기쁨을 느끼는 그런 청년의 단계인가?

 아니면 일상의 상당한 부분에서 이제 주님의 살아계심, 그 분이 성경에서 써 있는 대로 태초부터 계셔오시는 분임을 깨닫기 시작하고 세상의 거친 환경과 유혹 속에서도 세미한 흔적 만 보여도 가슴이 덜컥하며 그 분이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아비의 단계인가?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그러나 14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 더 다른 차원이다.

 

 아이 혹은 자녀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알고 있던 그냥 죄 사함 받는 피동적 은혜 받음의 단계가 아무 변화도 없는 그냥 일방적 수혜의 단계가 아니고 그 단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모르게 인정하게 되는 단계 임을 말하고 있다.

 

 청년들의 단계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 약간의 의지적 승리의 체험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살아 계셔서 그들의 쳐다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인식의 체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자신 안의 원죄와 그로 부터 파생된 자범죄로 부터 속절없이 넋을 빼앗기진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입어 능동적으로 이겨가고 이제는 그 승리가 많아 그 영혼에서 흉악이 뽑아져 나갈 단계에 있는 자 임을 확인시켜 주신다.

 

 아비들의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리 말씀하신다.

일상의 삶에서 모든 걸 하나님이 하시고 하실 것임을 아는 것을 지나 벌써 '알았음'이기에 일상 행위의 모든 것이 하나도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없고 발생하는 모든 세상의 현상이 주님이 선을 위해 하고 계심을 너무도 당연히 자연스레이 인정하는 단계이다.

그것은 의지로 그리 하는 것 보다 그 영혼 깊숙이 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자동적으로 씨스템화 된 행동양식이다.

그의 영혼의 향기가 예수님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조차 스스로 내세우지도 인식하지도 않고 있는 상태.

모든 것이 주님이고

모든 일이 주님으로 인하고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그 어느 것도 그를 유혹하여

넘어 뜨릴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 부터 자유하는 상태

세상의 것은 주님의 의도대로 주어지고

주어진 분량이 엄청나든,

생각보다 훨씬 부족하던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영혼 깊숙히 체율하는 그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자가 바로 아비의 자이다.

 그는 어떠한 상태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자이다.

 

 14절 위의 구절은 스스로 생각하는 단계이지만

14절은 주님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단계이신 듯하게 느껴진다.

버스 안의 묵상에서....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에 사는 우리가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세상의 것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니..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이외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하늘의 것' 또는 '위엣 것'이 있다.

 성경 어디엔가 나온다.

'땅엣 것을 보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라'고...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은 두배나 더 세상 살이가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편하게 세상의 것만 생각하면 고민이나 갈등이 없지만 하나 더 추가되면 그것은 갈등을 의미한다.

 세상의 갈등은 죽음을 초래한다.

그것은 죽음이후의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냥 이 땅의 길어야 80년의 것이 전부이다.

아니 실은

젊을 적 공부하고 자리잡고 아파트 사고 나서 늙어서 세상의 것을 아무리 가져다 주어야 육신이 누릴 감각이 무뎌져 흥미조차 누리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실은 이 세상의 것은 향유할 기간이 고작 몇년이 채 되지도 않는다.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어리석은 행태가 현 시대에 경쟁하는 불신자들,

아니 많은 기복적 기독교인 들까지 포함한 자들이 누려야 하는 실제다.

 반면

성실한 기독교인의 갈등은 주님을 위한 갈등이다.

그것은 생명을 약속한다.

영원을 예비하는 갈등이다.

갈등이란 단어는 싫지만 이 갈등은 필요한 갈등이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서야할 갈등이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육신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일 뿐이며 안목의 정욕일 뿐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작 몇년 누리지도 못할 육체의 지독한 끌림에 의한 허상일 뿐이고

눈에 좋아 보이는 것 뿐이고

남들에게 자랑하는 잠시의 소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건 몇년의 허상의 즐거움을 인하여 영원을 포기하는 행위일 것이라는 얘기다.

( 기차가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정적과 허무함입니다.)

 

 

 

 이 세상은 8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작별을 고해야 한다.

우리가 작별을 고한 후에 잠시의 애도기간을 지나면

또다시 세월은 기차가 기적소리 울린 후 힘차게 지나가 버리듯

그리고 나면 시골 역은 또다시 적막한 정적으로 묻혀 들어가 버리고

다른 기차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기색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듯

영원의 기차 역 속에 잠시 북적거리다 조용해지는 그런 광경이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위엣것을 바라면

우리는 그 영원의 기차 위에 타는 자가 된다.

주님이 시간의 바퀴를 돌리시는 동안

영원히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안목과 육체와 이생의 자극 받음을 위해 어찌해야 하는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난

아비칸을 타게 될 것인가?

청년 칸인가?

아이 칸에 타고 있는가?

 

 

 

 

17.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유난히 '전치사'- 맞나? ^^;;;- 가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위에 늘어 놓은 많은 비유가 이 전치사에 강조되어 있는 듯하다.

 

  세상이 전부냐?

정말인가?

돈을 많이 벌어 놓아서 무엇할것인가?

죽도록 안전하게 즐기다가 그 후에는 무엇할까?

 

정욕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본능이 끌리는 대로 나타나는 욕심 아닌가?

눈에 보이는 대로 아름다운 대로 끌리는 것은 '안목의 정욕'이다.

육신이 시키는 대로 Sex를 탐닉하고 술을 탐하고 담배에 , 돈에 마약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한다.

 남에게 잘보이고 싶고 칭찬 듣고 싶고 남 위에 서고 싶고... 하는 욕심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한다.

     정욕 이라 하신다.

 

 풀어 놓으면 이렇다.

 

이 까짓 세상이 별거냐?

그까짓 정욕이 별거냐?

 

아무리 대단한 듯

인터넷과 블록버스터 영화와 주몽처럼 재미있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눈 앞에서 폭풍우 치듯 요동을 쳐도, 수없는 많은 아름다운 칼라와 멋진 디자인과 수없이 많은 돈을 쳐바르면서 쌍카풀을 하고 코를 높여도, 시간이 지나가기 시작하면 아름다움은 촌스러워 보이고 모여서 깔깔대던 수많은 모임은 어리석은 입질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지며, 열심히 성형해놓은 이마는 주름이 잡히고 눈가에는 잔 주름이 생기고 눈 양끝단은 내리 눌려서 쳐지고 가슴은 내려 앉고 아랫배는 튀어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게 틀림없다.

반드시다.

 그때 쯤이면 아마도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성형을 하여도 아름답다는 소리는 듣기가 힘들 것이고 아무리 노력을 하여 근육을 만들어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서로 일촌을 맺고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어 서로 서로 피드백하고 격려하고 리플을 달아도, UCC를 통해 대박을 터뜨려도 가장 아름다운 얼짱, 몸짱이 되어도 그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 영광 후의 안목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후유증은 굉장히 큰 공허로 남게 될 것이다.

( 그날은 금방 온다. )

 

 기차가 떠나기도 전에

그 기차역에 마중나오는 자 하나도 없이

대합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떠날 자들을 부러운 듯 눈으로 바라보며

홀로 외로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무리 옛 영화를 그리워 하고 되뇌여도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게다.

 

 그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핍박 받고 바보 , 멍청이, 머저리 소리 들으며

등 배기는 나무 의자 위에서, 차가운 도로 위에서 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없음을 기뻐하고 핍박을 참아내고 궁핍을 주님으로 인하여 인내하던 자들이 아이, 아비, 청년의 자리를 배정 받아 기차를 탈 때 어떠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게될까?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이였더라면 청년이 되기를

청년이었더라면 아비의 믿음이 되기를 열심히 구해야 한다.

주님을 좀더 사모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왔다 가는 삶이라면

어차피 떠나야할 운명이라면

기차 타기 전 열심히 살아서

좋은 기차표 받아 탐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적용

 

1. 이 세상은 거쳐가는 단계임을 명심하자.

 

2. 난 어느 상태인가?

   난 스스로 어떠한 자라 알고 있는가?

    이제 청년의 단계에 들어선 자로 스스로 생각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청년의 단계에 정말 내가 합당한가 생각해 보자.

 

3. 청년의 단계라면 14절의 말씀이 타당한가?

   난 강한가?

   내 속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는가?

   내가 흉악한 자를 계속이기는가?

 

 실은 이 말씀이 공감이 가는 것은

얼마 전 부터 기도 제목이 그렇다 .

'내 인지체계가  말씀으로 운행 기준을 삼기를 원합니다'이다.

 말씀이 내 속에 살아 있다는 것.

오랫동안 날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던 생각들이 말씀으로 녹아나가고 있다.

그래서 아주 잠깐 다시 쓰러지기는 하지만 많은 시간 흉악한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4. 정말 그렇다면 아비의 단계로 가고자 하는 희망은 있는가?

    모든 이유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노력을 한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진실로 그것을 변함없이 원하는가?

    매일 매시간 매분 흔들리지 않고 원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바란다.

    원한다.

 

5. 손해를 보더라도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할 용기는 있는가?

  아직 자신은 없다.

  그러나 바란다.

 

6. ' 그 정욕'은 어떤가?

    나이 탓인가?

    주님의 기쁨을 놓칠까봐 자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7.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기 위해서는 오늘 무엇을 할까?

   성경을 5장 읽겠다.

    저녁에 어제 부터 시작한 우리 아들 군대 보내기 일주일 기도를 계속하겠다.

   화내지 않겠다.

   웃겠다.

  

 

 

 

기도

 

 주님

아침에 많은 생각을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기에 주시는 말씀이신 줄 압니다.

특별히 흉악에 졌던 직후에

이런 생각들은 주께서 저에게 바뀌기를 강권적으로 원하시긴 줄 믿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한 눈을 더 들길 원합니다.

이 썩어져 갈 세상에서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벗어버리고 싶은 정욕의 삶에서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는 믿음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청년의 단계에서 날마다 흉악을 벗어버릴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늘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견고히 자리 잡아

말씀으로 제 안에서 살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훨씬 더 오래 느끼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원함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게 하시어

주님의 향기가 내 움직이는 바람결에도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맡겨지는 그런 나날이 되길 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기차가 제 앞에 다가와

'주하인 이제 가자'할 때 기뻐 표를 내미는 그런 제가 되길 소원합니다.

세상의 기쁨은 저에게 하나도 기쁨이 되질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안목의 정욕에서 자유롭질 못합니다.

이생의 자랑에서도 그러하나이다.

육신은 아직도 들끓습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섯는 줄 알았지만 넘어지기 만 하는 이 가녀린 믿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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