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게 나다 (요일3:1~3:10) 본문
2007-02-23 요한일서 (1 John) 3:1~3:10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NIV 의역하면 '보라 아버지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 주셨는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부름 받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이다'라 나왔다.
내 아버지와 나는 그리 좋은 사이가 아녔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고 난 그의 자녀고
난 바로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 난 아버지를 둔 아들의 존재야.. 그래서?'
이러는 정도였었다.
최근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구정날 일부러 아버지 옆에 앉아 병원에서 있었던 일 등을 그냥 얘기하여 보았다.
지역 신문에서 '효도란 그냥 하루 하루 벌어진 일을 어른 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다.'라는 글을 보고 해보았다.
좋아하신다.
내 마음도 큰 부담없다.
예수님 믿고 부수적으로 아버지를 내 마음에서 따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역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고 그 분이 나에게 큰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 주셨다는,
십자가의 고통을 날 위해서 감내하셨다는 사실을 조금씩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게 바로 나다.
난 대단한 자이다.
마음의 회복은
믿음의 지평이 좀 넓어진 것과 더불어 자존감의 회복도 같이 이루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삶이 견고해지고 평강이 지배하는 기간이 늘어난 다는 것도 의미한다.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게 나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아이들처럼 깨끗한 눈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자기를 깨끗게 한다.
그것은 행실의 변화를 의미한다.
태도도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행실에서 우선한 다음 마음에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우선 변하여 행실이 따라 변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이다.
행실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다.
행실이 변하면 마음도 어느 정도 따라 변한다.
마음이 완전히 변하면 당연히 행실도 변하게 되어 있다 .
그러나 문제가 있다.
행실의 변화로 인한 마음까지의 변화는 한계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법칙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은 자칫 율법주의로 빠질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아니면 포기하던..
마음이 완전해 지고 나서 자연적으로 변하는 행실의 변화는
그리만 될 수있으면 더 할 수 없이 완전한 변화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의 악한 세력 들이 어찌 날 순화 시키려는 행로에 순순히 응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싸우기는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 될 수만 있다면 그게 좋다.
허나
주님을 믿으면 그게 가능하다.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고운 말을 쓰게 되고 눈이 부드러워지고 피부가 말갛게 변하며 눈빛은 그렁그렇하게 변한다.
그렇다.
마음이 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에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을 닮기 위한 소망.
주님을 사랑하는 소망.
그러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그분에 대한 소망으로 행실이 변하게 될 것이다.
태도가 달라지고
말의 강도가 순화되며
눈이 부드러워 질것이다.
온통 몸에서 향기가 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
아버지의 아들인 나에게는
이제 주님을 사랑하려는 강렬한 소망이 필요하다.
그 소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집중하려는 의지적 노력도 필요하다.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누구도 알게 될 것이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범죄는 성격 상 환경 상 어쩔 수 없이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의 무서움은
주님을 멀리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함을 잃기가 두려워 범죄를 하지 말아야 한다.
범죄 자체가 나쁜 것이고 범죄는 반드시 회개 해야할 것이지만 범죄를 안해야 주님을 뵐 수 있어서 범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는 주님의 그 사랑, 그 따스함, 그 평안함을 잃게하고 온통 어두움과 메마름과 답답함으로 영혼이 터져 말라 죽을 것 같은 상황이 그 결과로 예상이 되기에 두려워서 하지 않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God's seed
remains in him)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내 영혼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흔들던 세상의 원리가 어느 새 조금씩 조금씩 밀려 나가고 있다.
( 하루라도 빨리 내 속이 주님의 씨로 생명력 가득히 채워지길 빕니다. )
마치 오랜 겨울 후에 말랐던 동산의 잔디가
봄바람을 타고 하늘 거리며 날아온 민들레의 씨가 뿌려지고
잔디의 씨가 발아가 되어 점차로 푸른 생명으로 온 산을 채워 나가 듯
그리 변해 가고 있다.
영혼을 반영하는 결과물인 범죄는 당연히 영혼의 녹화와 더불어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그 분의 십자가의 보혈의 구원을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그 분의 기쁨을 놓치지 않을 감수성을 지니고
그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자들은
당연히도 범죄치 못하게 될 것이다.
적용
1.하나님의 자녀와 사랑과 내 자격에 대하여 묵상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라는 구절을 외우고 묵상할 것이다.
2. 죄에 대하여
특별히 지금도 불쑥 튀어 나오는 '분노'에 대하여
그 강도와 상관없이 그러고 나서 겪게 되는 불안정의 고통에 대하여 직시하겠다.
3. 소망
씨 를 묵상한다.
- 그 소망과 씨를 전도하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보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특별히 주님을 집중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려 하겠습니다.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집중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그 치욕이 어떠한 것이었던지
예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머리 속으로 단지 이해하고 있는 사랑을 넘고
주님에 대한 충성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었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의 씨를 내 안에서 소중히 키워 보겠나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동산이 이루어 지길 소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발아된 그 씨가 주님의 낙원으로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주여
당신의 기쁨으로 찾은 이 갸녀린 소망이
자꾸만 커져서 굵고 흔들림 없는 거대한 고목 처럼 자라나는 큰 소망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범죄할 수 없는 그런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직은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럴때마다 얼른 일어날 의지와 힘과 용기를 주세요.
특별히
주님의 기쁨과 소망을 체험한 후의 범죄는 더 큰 자책감과 좌절이 옵니다.
긍정적으로 바꿀 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요일4:13-21) (0) | 2007.02.26 |
---|---|
미움은 영혼의 구멍(요일3:11~3:24) (0) | 2007.02.24 |
純貞 聖靈 Oil (요일2:20~29) (0) | 2007.02.22 |
영원 속의 기차역 (요일2:12~19) (0) | 2007.02.21 |
한 말 one word(막11:27~33) (0) | 200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