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어린 양의 노래[계15:1-8] 본문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또 내가보니'
대단한 환상이 자주도 보인다 .
그것.
일치된 주제 -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 종말, ..-를 가지고
사단 쪽의 영상과
하나님 쪽 영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보인다.
어쩌면, 심리적 이상에 의한 '망상'도 환상을 볼 수 있겠지만
거기엔 일치된 주제가 있을 수 없고
여기서 보이는 '관조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아프고 힘든
마구 변하는 그것 만 있지 않을까?
이제 마지막 장면을 미리 보이신다.
불이 섞인 유리바다...
그 영상이 주는 느낌은 '불'로 정리된... ...이란
불바다로 암시되는
굉장한 고난 후 깨끗한 유리처럼 정리된 바닷가에서 서서
'이긴 자'들이 모여서
찬양을 부르는 내용이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찬양의 제목은
'어린 양의 노래' 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 뿐이다.
이 감각적 괴리 .
세상은 불로 정리되어
비록 유리로 덮여 있지만
그 아래 바다는
아직, 마치 용광로 가운데 바다 위에 서 있는 분들은
그 아래 불바다에서 고생하고 있을
이 땅의 사람들의 고통과는 무관하다는 듯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노래'...찬양을 부르고 있다.
이것.
어쩌면 감정적 문제가 있는 분들이
이런 차거와 보이는 부분만을 들쳐내어
기독교를 믿게 되면
마치 '싸이코 패스' 같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려내지기도 하는 부분들이 아니던가?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저러한 심한 고난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곁에서서 '휴우~' 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름은 어쩌면 당연한 인지상정일 수는 있지만
타인의 고통에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
순전한 아기의 얼굴로 ' 캐롤 '부르듯하는 모습은
'감각적 괴리'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러함.
이것은 사랑이 없음도 아니고 긍휼도 없음도 아니다.
저들 .. 노래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곁으로 불려 올라가기 전에
세상에서 '삶 '속에서
아니면 진짜로 선교지에서
'순교'의 과정을 겪은 분들이다.
엄청난 고난을 겪고
영혼에서 모든 죄가 떨어져 나가
예수 그리스도,
그 '어린양'의 모습처럼
무조건 순종, 전혀 죄없음으로 단계까지 올라갔을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억지로 '긍휼'을 짜내기 위하여 '감정'을 집중하거나
감정의 회오리 속으로 몰려들어
찬양보다는 눈물 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을
그러한 상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의 마음에는
아마도 세상의 사람들이 겪을 고난 이후에
이처럼 높고 큰,
직접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강렬하고도 강력한
'샬롬'의 기쁨을 맞는 것이
더욱 감사할 것임을 알고 절실히 체험하기에
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
세상 사람들은
그 순종의 의미로 다가오는
'은혜'의 감각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 없는 온전한 기쁨.
맑고 신선한 물로 씻김 받은 듯한
세척받고 난 깨끗함의 느낌............
그 느낌이 수천 수만배 증폭되어
지금 불타는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분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저 복잡한 상황에 상관없는
감사의 찬양,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올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떤 일에도 궁극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 힘으로 나갈 수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이신 그분을 통하여
저렇게 나갈 수 밖에 없다.
그 궁극의 회복을 위하여
어떤 혼란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 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
나에게 주시는 레마는 그런 듯 싶다.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당연하고 옳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무슨 순간에도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설령 내 지혜나 세상의 어떤 것을 빌려와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비록 되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찬양 올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침 금요일
성령집회에서 하기오스로 찬양 드리는 날이다.
유리 바다 위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도들을 그리며
그리 불러 올려야 겠다.
적용
1. 어린양의 노래.
하루 종일 묵상하고 다녀야할 제목이다.
레마다.
하나님을 무조건 올려 드려야 한다.
목소리 들리든 안들리든,
내 감성에 맞든 안맞든
하나님은 옳으시고 선하시고 무궁한 분이시다.
그 분께 내 자아가 배제된 맑고 깨끗한 노래를 올려 드려야 한다.
2. 어린 양.
어린 자는 힘이 없다.
무력하고 약한 게 내가 지향 해야 할 방향이다.
잘나고 힘있고 능력 있는 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해서 되는 것만 취하면 된다.
대표되는 어린 양은 '희'다.
흰색은 죄악으로 부터 순결함이다.
그 어린양을 노래한다.
그 어린양 닮기를 노래한다.
그 어린양을 내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델이시다.
각론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된다
3. 유리 바다 위의 노래.
우리의 결국은 '승리'다.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 고통 만 받지만
우리는 결국 고통 위에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는 자다.
찬양을 부르며..
4. 남들의 고통 가운데 노래 부를 수 있음은 무감각이 아니다.
모든 것을 넘어서 '앎'의 상태가 되어 버린
깨달은 자들, 이긴 자들의 기쁨이다.
긍휼하는 마음이 넘어서서 , 그들도 결국 단계를 넘어서면
자신들처럼 진리에 맞닥드릴 것을 아는 자들의 기쁨이다.
기도
주님.
계시록을 가지고 묵상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함에도 막연히 나마 잡히는 레마의 끈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유리바다 위에 서있을 우리를 기뻐하게 하소서.
고통을 넘어서 깨닫는 자들의 '자유' .
아픔 후 회복한 자들의 나른함.
타인을 사랑함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이루어지는 '평온'........
그 모든 것을 허락받는 자의
아직은 되지는 않지만
생기는 '소망'이 오늘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신 듯 합니다.
이제.. 한동안 바빠
머리복잡한 것 쓸 시간이 없어서
그동안 잊고 살다가
갑자기 한가해지면서 다가오려 하는 '불안'이 체크가 되려 합니다.
이것.. 늘 하나님이 제게 주시고자 하는
상황에 상관없는 평안과는 약간 거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를 다시한번 들여다 봅니다.
제 믿음이 아직은 부족한 듯 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약해짐을 감사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 유리바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관조할 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에 대하여 연민보다는 크고 넓은 긍휼로 찬양하는 자 되길 원합니다.
제 환경을 아시는 하나님.
모든 것 다 받아 들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매일매일이 될 수 있도록 하소서.
오늘 삶속에서 눈뜨고 깨달아 드리는
제 의도적 찬양을 기뻐하며 '어린양의 노래'로 받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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