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 어떤 사람[삼하19:1-15] 본문
때로
감정에 매몰되어
온통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그 어떤 사람인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시지를 보낼 때가 있다.
그전에
우선 더 깊이
주님앞으로 다가서
모든 것을 다 아뢰는 것이
가장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이제는 일어날 때다.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한번 바라볼 때다
그리고
돌이킬 때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은혜가 기대 되고
또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들로 인한
어쩌면의 징벌이 시작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주하인아
더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자
주 말씀이 있으시다
오히려
은혜 받을 기회다.
.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그 '어떤 사람'이
'왕'이 자신들의 승리를 기뻐하여주거나 같이 웃기보다는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그 역시 '아들'의 죽음이 슬퍼해야할 가련한 입장임을 알지만
그보다는 자신들의 수고와 노고,
더구나 목숨을 바쳐 선택한 자신의 주군인 다윗이 갈피를 잡지 못함에 대하여
'혼란'을 느끼다가
드디어는 가장 의뢰할 만한 사람인 '요압'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버거움을 아뢴다.
그 '어떤 사람'.
어떤 사람은 어쩌면 '감정적 혼란'과 더불어
'현실',
즉 이 버거운 갈등 덩어리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 자들로
어쩌면 자신들의 인생을 짊어지고 나가야할 왕,
그들 인생을 담보한 자의 흔들림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어쩌면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둑에 물 새는 것 같은
곧 있을 민심의 이반의 징조이기도 한 존재이다.
즉...
갈등을 뚫고 들어오는 '불안' 징조,
두려움의 시초......말이다.
반드시 해결해야할 내면의 혼돈의 징조의 상징처럼 들린다.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갈등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승리'와 '죽은 아들' 사이의 감정적 충돌.
살다보면 어찌 이런일이 없는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양립된 감정의 충돌.
승리의 기쁨과
아들의 죽음의 슬픔.
자식을 애도함과
모든 백성을 감싸 안아 이끌어가기 .
그러기 위하여 깊은 슬픔을 마주 하고 개인적으로
스스로의 슬픔을 마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대안을 세우고
힘있게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하는
깊은 심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상황.....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그런데
이 '왕'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만 매몰,
즉 자신의 내면적 감정에만 충실하여
왕으로서, 현실을 도외시 한 행동에만 충실한 상황이다 .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그러자 , 요압..
이 '대범하고 비범한 장수이자 신하'가
과감히 왕인 다윗에게
거의 모욕에 가까울 충격적인 언사를 발하면서
다윗에게 '직언'의 조언을 하고
마침내 그것이 다윗의 성향..
옳은 것은 과감히 받아 들이는
'제왕의 풍모'를 가진 그 영혼까지 돌이킬 힘을 발휘했으며
그의 조언을 따라
마음을 수습하고 돌이킨다.
요압.
그의 충성이
진정 충직인지
아니면 성격적 내몰림에 자신의 위세에 취해서
감히 그리 한 건지는
현재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두 사람 , 다윗과 요압 모두
'감정적 충실함'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선택하는 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보여주시고자 하는 레마는 무엇일까?
다윗처럼
감정을 무시하고 현실을 따르라시는 말씀이신가?
그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시라면 그리 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감정'을 누르고 현실을 따르는 것이 쉬운가?
그리고 그 부작용은 없을까?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실컷 울면 시원해진다.
또 때로는 억지로 웃으면 마음이 따라 변하는 경우도 있다.
결심에 따라 감정이 따라오는 경우도...
생각과 감정이 어디가 우선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차 감정이라는 이야기도 심리학적 용어에 있다.
생각을 바꿈으로 마음이 바뀌는..
'인지요법'이라는 아주 뛰어난 심리치료 방법도 있다 .
생각을 훈련함으로 마음을 이끌어 가는 것..........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지는 않지만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깊이 바라보고 들여다 보면
자연스레이 풀리는 경우도 많다 .
이것을 이용하는 게 프로이드가 제창한 오랜 정신과적 치료의 기법이기도 하고..
때로는 '감상'에 빠져 우울로 자신을 몰아가기도 하는 게
'감정'에 매몰되는 부작용이기도 하다 .
어쩌면
요압의 목적과 그의 거친 성정의 어떠함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다윗을 그토록 혼돈에 빠드리는 '역기능 가정 성장'의 결과로
방치되어진 아들 압살롬의 배반과 죽음을 바라보는
그 복잡한 생각의 끈들로 이어진
감정의 타래가 얽혀버려
저리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짐이고
그 생각의 오류를 끊어버려
마침내 감정의 정리를 가져오게 한것은
요압으로서는 잘 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다는 표현이 어디에도 없음이
다윗의 저러함이
기도의 부족,
하나님 앞에 더 올바로 내려놓고 해결받은
올바른 감정의 흐름,
영혼을 붙들고 비트는
과거의 상처를 틈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시험으로 인한
감정적 아픔이
옳고 바르게 해결되어감을 보지 못하는 게 속상하지만
다른 길,
요압들의 아픈 소리...
어떤 사람의 걱정하는 소리가
마침내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다윗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한 게 맞으시다 .
그렇다면
오늘 내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사람을 대할 때
특히 .. 수술방이나 환우 분들, 주변 직원들을 대할 때
난.. 내 일차감정..
즉 내 속에서 오래 자리잡은 감정의 흐름대로
그들을 대할 때가 많지 않던가?
욱.. 욱.. 하며 수술장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조금 부족한 행실 (다행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에 대하여
조금도 참지 못하고 분위기를 어렵게 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고 두번세번 똑같이 물어보는 환우 들에 대하여
굳어지며 퉁명스러워지려는 내 내면...
................
그 안에 완전히 바라보고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의 흔적으로 '투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오늘 '다윗'의 갈등으로
모든 왕의 일을 뒤로 하고
보기 힘든 '꺽꺽대며' 우는 어른,
왕의 모습을 보이는 것 처럼...
자제하지 못하고 ..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시기가
'어떤 사람'이 불평하기 시작하는 위험한 시기이며
그리고 마침내 '
신랄한 요압의 질타'처럼
어쩌면 곧
"주하인 너.. 내가 그리도 경고하지 않았느냐..
그리하다가... 이러...저러.. 된다 "라고
누군가 준엄이 나에게도 심판하는 소리로 다가오지 않을까..
순간 '어떤 사람'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겁이 나려 한다 .
어째야 하는가?
다윗처럼
어서 어서 '요압'의 소리가 들리기 전
미리다행이도 말씀이 있으시니돌이켜야 한다 . 내 속을 갈무리 해야 한다.
어쩌면 내 일상에서 마주하는
내 부족한 행실.. 버거운 ... 그러함들은
갈무리 되지 못한
'다윗의 버거움'이 표출되어
그 어떤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징조가 오고질타가 오기 전..
마음을 갈무리 하고
옳은 방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대로
다시 나가야 한다 .
더 인내하고 더 참아야한다.
느리고 부족하더라도 더 기다려 주어야 한다.
부드러운 시선과 눈빛을 유지해야 한다.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참고 온유해아한다.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그리하여야 한다 .
그렇지 못하면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하여
준엄한 심판이 당장이라도 올수도 있다... 시는 것 같다.
주님.
알람이 울립니다.
출근하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 .
제 감정에 충실한게 옳은 것이라는오래된 잘못 형성된...
때로는 그로 인하여
살 아올 힘이 되기도 하였지만
성장하고 주님 말씀대로 나가기엔
너무 걸림돌이 되는
잘못되고 왜곡된 생각으로
마치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저리 꺽꺽 우는 것 처럼
아직도 남은 감정의 찌거기를 어찌 못하고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 옳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아주 복잡하고 버거운 갈등덩어리지만
주님 말씀이 있으시고
어떤사람을..이라시는 말씀에 집중하게 하시니
이제 마음을 정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타인을 향한 태도의 정리를 하길 원합니다.
주여.
그들을 더 긍휼히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일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저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
그 어떤 사람을
인식하고 살게 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내 주여.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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