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아저씨 군대 이야기 보다는 ( 고후11:16-33 ) 본문
제 11 장 ( Chapter 11, 2 Corinthians )
가로등은
아무리 빛나도
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랑
자랑하는 것이
가로등의 빛남은 아닐런지...
사랑의 능력만이
유일하게 자랑할 가치다.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잘난체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러나, 왜이리 잘난체는 꿀맛인가?
영혼을 빠져들게 하는 꿀 앞의 파리같이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사도 바울님은
그것을 잘 아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어리석음을 각오하고 자랑하려 한다.
자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보라.
자랑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사도 바울 님은 대단한 분인 것은 사실이다.
귀족이고 머리 좋고 많이 배우고 열심이 특심이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이 ' 세상적인' , '자기 중심적'인 성취가 아니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오히려 그는 '고생'을 자랑한다.
이것도 어찌 보면 아저씨들의 '군대' 이야기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면면을 눈을 들고 들여다 본다.
끔찍한 고생이다.
나는 이러한 고생을 한 적은 있는가?
한다면 살고 싶을까?
이게 자랑 맞을까?
사십에 하나 ... 다섯번 ( 195대 )
세번 태장 -곤장이다.
돌로 한번 맞았다.
배를 타고 파선해서 1주일을 어둠 속에서 보냈고
여러번 강에서 위험 당하고
강도 당하고
동족으로 부터 위험을 받고
이방의 위험을 받고
시내의 위험
사막의 위험
바다에서 위험
거짓 형제의 배반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
자지 못한 날이 부지기수.
굶고 헐벗고.........
정말 이 중에 하나라도 견디기 힘들 것을..
나는 하나라도 겪지 못할 것을
이 분은 엄청난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군대 이야기는 새발의 피가 맞다.
자랑 할 만한 고난이긴 하다.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
하는 것이라
그런데 그러한 고생도 '자신'을 위한 고생이 아니다.
'남을 위한 고생'이다.
'모든 교회'를 위한 고생이다.
' 남을 위한 고난'
' 사서하는 고난 '
이러한 고난이라고 염두에 두면
난 손발이 묶인 듯 굳어짐을 느낀다.
솔직히 고난도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난이 맞지만
그게 내 영달과 영화와 아니면 내 식구들을 위한 고난이 맞다하면
한 두개는 견딜만도 할 것만 같다.
솔직히 그것만도 자랑스러울 희생일 듯 싶기는 하다.
그러나, 그 고난이 끝도 없이 온다.
그게 두렵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저러한 고난을 받아가며 '남'을 위한 명분을 가지고 버틸 수 있을 자신이 없다.
지금이라도 선교사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주위에서 선교사님들의 가정적 어려움 이야기를 들어가며
그 분들의 지속되지 못하는 저 '긍휼함의 인내'에 대하여 자신이 없기에
난 지금껏 주저 앉아 있다.
솔직히 사도 바울님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을 견뎌옴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그래그래 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저씨 군대 생활 이야기와는 다른 감흥을 일으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고난이 엄청남과 다양함에 대하여 생각하면
솔직히 감동이 일려고 한다.
그 감동의 정체는 그것이다.
' 지치는 않는 긍휼함'
보라.
눌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눌리는 것.
그래 나도 눌리길 많이 해보았다.
주로 비교에 의한 질투심과 그것이 생기는 데 대한 속상함과
원망과 갈망 사이의 갈등................등이다.
눌리는 것은 죽을 것 같은 느낌이다.
눌림은 우울의 또다른 표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다른 사도 바울님의 눌리는 것의 정체는
나는 '나'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사도 바울님은 '남'에 대한 긍휼함이다.
그 분.
사도 바울님이 고난 받는 것은 마치 사형수에 해당하는 죄인이 받아야만 할
어이없는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가 자랑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고
그 남을 위한 마음이 지치지 않고 차고 넘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 놀라운 사실의 증거가 '교회 때문에 눌리는 마음'이다.
그것이 자랑할 만한 것이다.
숙연해진다.
어찌 이렇게 강할 수가..............
어찌 이렇게 놀라울 수가............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렇다.
자랑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일이다.
그러나 자랑할 것이 있다.
진짜로 자랑할 것은 '긍휼한 마음'이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다.
좀더 유식하고 멋진 말로는
'자아가 약해지는 것'이다.
좀더 성경적으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사도바울님이 고백하는 말씀대로
'나의 약해짐'이다.
나의 약해짐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서 강해지시는 것이다.
내 자아가 살아 있으면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운용하려하실 때
성령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려 할 때 방해가 된다.
인격적인 그 분은 나의 자아가 반대를 할 때 가만히 계신다.
그것은 내 긍휼함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내 자아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선하고 도덕적이고 큰 그림을 그려도
그것은 내 자아의 그림일 뿐이다.
약한 모습을 취하고 겸손을 취해도
위와 같은 고난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다.
설령 질긴 의지로 한두번 견뎌도 그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눌려도 자신에게 눌리게 된다.
사도 바울의 눌림은 성령이 주시는 부담이시다.
강하게 치고나갈 수 밖에 없이 만드시는 선한 부담 말이다.
그 선한 부담은 영적인 평강을 약속하신다.
땅을 살되 천국을 사는 것이다.
그게 약함의 비밀이다.
그것 만이 자랑할 유일한 자랑거리다.
내가 죽고 십자가만이 내 속에 살아
긍휼함이 내 전 영혼을 채워
낮추고 사랑하지 않고는 죽을 것만 같은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려
어떠한 고난이나 힘듦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것 만이 유일하게 자랑할 것이다.
적용
1. 남을 위하여.
오늘 하루 짊어져야 할 말씀의 요지다.
주님이 그리하셔야 한다.
2. 남을 위하려 할 때 밀고 나오는 어떠한 반발이 있다.
주님의 뜻과 반하는 것들은 십자가에 못박는다.
3.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신다.
올라오라 하셨다 .
내일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려 한다.
아들 병원에서 쉬다 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섬기겠다.
4. 기도한다.
남을 위하여
지속되는 긍휼함을 주시길 간구하며..
주여.. 날 도우소서.
긍휼한 사랑을 주소서.
터지듯이 주소서.
내 자아는 태우시고 주님의 뜻만 살게 하소서.
5. 손해를 기뻐하자.
최소한 오늘 하루라도 정신 바짝차리자.
6. 성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지 못한 자아의 흔적들이
얼마나 남들의 칭찬을 양분으로 삼으려 몸부림 치는 지요.
마치 영혼의 기생충처럼 내 속에 남아 허걱허겁 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면서도 또 눈 만 뜨면 칭찬하는 상대를 갈구하고
자랑을 토할 대상을 두리번 거리고 있습니다.
주여.
이제 좀더 깨닫고 영혼 깊숙이 체험하게 하소서.
저로 자랑할 것은 주님 십자가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를 씻고
내 나오는 자랑의 입술을 닦아내게 하소서.
주여.
약함이 강함임을 명심하게 도우소서.
남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것을 가로막는 자아의 승함을 누르소서.
태우소서.
성령의 불로
나도 모르는 교회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불로 태우소서.
주여.
사도 바울 님의 그 자랑을 닮게 하소서.
나는 죽고 주님 만 살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그게 도덕적 깨달음을 넘어서
주님이 허락하시는 그 성령의 불가운데서 그리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타버리게 하소서.
주님의 뜻으로 타버리게 하소서.
말씀으로 내 영혼을 정화시키소서.
오늘 사도바울님의 고백처럼
내 속에도 이웃 사랑으로 눌리는 게 있게 하소서.
나도 이해 못하는 놀라운 긍휼로 날 채우소서.
주여
성령의 불로 그리하소서.
날 채우소서.
이웃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강력한 눌리는 성령의 드라이브가 있게 하소서.
나도 모르게 참아 내게 하소서.
그것만 자랑하는 내 영혼의 움직임이 되게
절 태우소서.
성령의 불로 태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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