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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를 기뻐할 수 있을 때( 고후12:1-13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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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를 기뻐할 수 있을 때( 고후12:1-13 )

주하인 2009. 8. 21. 12:00

제 12 장 ( Chapter 12, 2 Corinthians )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무익한 것 맞다.

쓸데 없는 자랑은...

하지만 어쩔수 없는 자랑이 있을 수는 있다.

하나님 전파에 대한 것이다.

어제의 묵상에서 연결되어 간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성화를 향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랑은 남을 위하여 될 때만 부득이 하게 허용될 수 있다.

스스로의 자랑은 '약한 것'들 만이 자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예수님 믿고 정말 당혹스러운 것들이

계시 사역자, 은사자 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면서

온갖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자들이었다.

한편으로 그들의 하나님께서 받았을 지 모를 계시에 대하여도 무시하지 못하면서도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너무 어이없는 일을 볼 때마다

그게 망상 즉, 정신병적 현상과 구분이 되기에 힘든

그 경계선을 느끼고는

이 영적 은사, 특별히 계시를 사모하라는 성경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신비적 현상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아갈 수 밖에 없었다.

 꼭 필요한 것이되 '위험한'.. .

그러기에 위에 '자랑'을 하되 하나님과 관계된 자랑을 하라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또 조심 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남을 위한' - 실은 그것도 명분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상 힘들긴 하지만 - 하나님을

올려드리는 것이 될 때는  그것이 조심스레이 허용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영적인 부분은 절대로 자제하기 쉽지 않다.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다.

지나침은 부족함 만 못한 것이다.

 그 지나침을 자제시키시려는 주님의 뜻으로

'가시'가 주어 졌을 수도 있다

 그 가시는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안질', '대머리'... 등으로 알려진 '가시'가 있으셨다.

그 가시가 그 분에게는 얼마나 아프신 고통이셨던지

이것이 떠나도록 '세번 간구'하셨다고

정확한 수치까지 써 가시면서 그의 절절한 존재의 어려움에 대하여

성경에 써 놓으시기 까지 하셨다 .

 그러시면서 그는 그의 교만함을 억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가시를 허락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어투가 사뭇 감동에 서리게 된다.

 그렇다.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하고

그 자랑을 받게된 이유가 '약해져서 강해진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야 한다.

 자랑은 은혜받은 것, 은사의 능력 보다는

그 은사를 위해 허락하신 약해짐을 자랑해야 하고

그 약해진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실히 받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받아 들여지기 위하여 기도한 그 간절함을 자랑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의 순화 됨을 자랑해야 한다.

어제 묵상에서 처럼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과 관계되어 , 긍휼한 사랑이 늘어남'을

자랑해야만 한다.

 내 문제 모두를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절실한 믿음을 자랑해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은사나 표적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셨던 증거로 자랑해야 한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
 보라.

그, 사도바울님의 간절함이 어떠했던지..

세번 - 그 한번 한번이 얼마나 간절했던 기도였던지 기도의 숫자가 생각이 나지 않는가?- 간구 가운데서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또한번 듣는다.

 이러한 응답은 내가 걱정하는

정신병적 망상에 의한 환청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이 물론이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하고 혼란 가운데 마취되어 있을 때는 분명코 차이가 난다.

더구나 사단의 장난에 의한 망상은

절대로 '자신'을 낮추는 언사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 과정을 통하여

주님의 원리가 영혼에서 강해지는 것을 원하시되

사단은 자아가 승해서 괴팍하고 강팍해지는 과정을 겪도록 한다.

 

 각설하고

주님은 이리 응답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

어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평생을 짊어지고 오는 '짐', '멍에' , '곤란'이 있다.

이게 나의 가시다.

정말 나도 이분 사도 바울처럼 이것을 없애달라고 간구하고 엎드리고 싶지만

내 속에서 그래도 될까.. 라는 어리석은 불신앙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마 사도 바울님의 그 약해짐이 강해지는 원리를 안다는

되지 못한 교만이 그 분 사도 바울님 처럼 '간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오늘 묵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인 '약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는 길이고

그게 곧 강해지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 보다는 '세번 간구하니 응답하셨다'는 구절이 더 눈에 들어 옴은

저러한 불신앙을 깨고

혹시 내 망상적 사고를 두려워 할 만큼 어린 신앙의 시기는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그러한 주님의 뜻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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