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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가도 못할 때 ( 시 77:1-9 ) 본문

신약 QT

오도가도 못할 때 ( 시 77:1-9 )

주하인 2009. 8. 30. 10:45

제 77 장 ( Chapter 77, Psalm )

 

 


1. 내가 내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KJV) I cried unto God with my voice, even unto God with my voice; and he gave ear unto me.
' 내 음성으로 ' 

' 내 음성으로 ' 부르짖으니 귀를 기울이시로다.

미래형으로 나왔다.

하지만 '과거형'이다.

 KJV 뿐 아니다.

NIV에도 , 쉬운 성경에도 과거형으로 나온다.

'내가 내 음성으로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셨다.'

개역한글, 개역개정은 '미래형'이다.

 

 단순히 해석상의 잘못일까?

 무슨 뜻으로 하나님은 성경에 이러한 해석의 오류를 허락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음성으로 '라는 말씀과

'부르짖다'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2.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나의 환난 날에 ' 주를 찾았고

밤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는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분명코 환난 날에 주를 찾고 밤에 손을 들고 기도한 것은

주님이 도움을 간구한 것이 틀림이 없음에도  거절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

그럴 것을 왜 밤새 손을 내리지 않고 처절히 기도하였던가?

 
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4.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간절히 주님은 찾았지만

주님의 도움은 거절하면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절절하며 두려워 하는 심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최후의 길이 거기-주님-이기에 어쩔 수 없이 와 있는 상황.

그러면서도 주님께 대한 죄송스러움,

그 분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

징책에 대한 불안........등으로 괴로워 하는 것이다.

 

 

 

5.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9.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오도 가도 못하며 절망하는 그 마음에

그럼에도 오직 탈출구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기에

올 수 밖에 없는 심사가 읽혀진다.

 내내 답답한 묵상이다.

내내 머리가 뽀개질 것 같이 이해하기 어렵다.

오도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편 기자의

영혼의 찢어지는 갈등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는 죽음의 답답함을 무릅쓰고도 주님 앞에 나왔었다는 사실과

온갖 영혼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주님 만을 절절히 바라본다는 사실 만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

 

 

 주일 아침.

당직 방.

비가 내리면서 바람이 신선한 느낌으로 적은 창틀을 통해

스며들어 온다.

밤새 몇번 일어나서 비교적 늦잠을 잔 편이지만

그럼에도 일어나는 공기가 날 개운케 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성결대의 산에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는

그 가벼움을 감사함으로 바꾸려 한다.

 묵상집을 들었다.

아.

머리가 답답해지려한다.

이 좋은 기분이

언제인가 잊어버렸었던 '과거의 그 답답함'을 체험시키려 하는 듯 하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두렵고 힘들고 영혼이 타는 듯 하고.. .

그러면서도 내 갈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기도원이나 교회의 성전을 늦은 밤

혼자 혹은 아내와 동반하여 찾아와 두손 들고 기도하던 기억들.

 필자의 표현 중 '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는 표현이

그 기억을 돌아보면서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찾을 수 밖에 없지만

'난 안돼, 나같은 ... '이라는 오래된 좌절이 가로막아

'간구'와  ' 자신에 대한 오래된 실망감' 사이에서 갈등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

 아마도 그것을 필자는 저렇게 표현 했을 지 모른다.

 

 ' 내 음성 '

' 내 음성으로 '

  솔직히 난 위의 저러한 갈등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어서

오랫동안 주님께 기도하면서도 '간구'하는 절절한 기도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리 열렬히 기도하지 못한다.

그냥 묵상하고 말씀을 집중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동을

영혼으로 느끼면서

갈등이 녹아나면서 내 영혼을 채우는

빙하의 녹은 물 같은 청량하고 시원한 흐름을

감사하고 그것을 글로, 사진으로 , 가끔은 찬양으로 표현해오던 것이

내가 해 왔던 신앙 생활의 태반이었을 줄 모른다.

 남들이 '소리내어 하는 기도'가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인 듯 싶다.

그러기에 오늘 '내 음성으로'라는 구절이 '간구'와  겹쳐져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오늘 하루나 앞으로의 나의 기도생활에  취해야 할 태도로서 주신 말씀이 아니신가 싶다.

 하지만, 그것이 과거형인 것에 문제가 있다.

과거형이지만 미래형으로 쓰인것.

이것은 어떠한 이유이실까?

 잘잘못 모두가 주님의 뜻 안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해석의 오류는 어쩌면 주님께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려는 뜻은 아니신가?

 그렇다면 무슨 뜻이신가?

과거에 이렇게 해야 했어야 할 나의 신앙의 태도

즉 소리내어 기도하고 절절히 간구하는 기도의 태도를 취하라 하시는 듯 싶다.

그것이 과거로 부터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이 해오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시도하라시는 말씀이신 듯 싶다.

 아울러 필자의 저러한 절절한 갈등을 되짚어 보면서

과거의 그러한 아픔과 힘듦 속에서

이제는 한 발자국 벗어나게 해주신

그 주님의 놀라우신 살아계심을 다시한번 짚어 보고

그 심한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주님 만을 바라보며

몸부림 치는 필자의 모습을

나의 선택과 동일한 모습으로 투영시키며

주님은 '주하인아, 잘했다.' 하시는 듯 느껴지는 것은

그냥 내 마음 속의 장난일까?

 주님은 살아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흐르는 선한 감정은

주님이 주신 것 맞다는 생각이다.

감사하다.

 아울러 저분 필자의 저 처절한 주님에 대한 매달림,

그의 영혼의 갈등에

주님에 대한 죄스러움 , 두려움 등

불신자나 그러한 갈등을 느낄 이유조차 없는 '초보'신앙인 들은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저러한 처절한 몸부림을 통하여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놀라운 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내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기를 바라시는 듯 싶다.

너무 힘들때

오히려 그렇게도 열심히 매달렸던

그 오도가도 못하는 고통의 시간이

고통보다는 오히려 더욱 깊은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오늘 시편 묵상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가슴 속에 들어온다.

 

 

 

적용

 

1. 오도가도 못하던 그 시절을 되돌아 묵상해 본다.

   그 아픔을 잊지 말자.

   그 때 함께 하셨던 그 두려웠던 하나님을 잊지 말자.

   두려움이 변하여 은혜가 되고 눈물이 되고 감동이 되고 축복이 되었던

   그 시절을 생각해 보자.

 

2. '찬감자중간' 

   지난 수요일 기도원 예배 시간에 주신 목사님의 기도방법에 대한

 말씀이 그냥 헛된 게 아니구나...함을 느낀다.

  소리내서 회중기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내 기도생활에 적용하겠다.

 

3. 성경 일곱장 읽겠다.

 

4. 오늘은 병원에서 예배 드린다.

  은혜 가운데서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자.

 

5. 소리내서 간구하자.

 주여.  허리 낫게 하소서.

 주여  긍휼한 마음으로 절 채우소서.

 주여  내 영혼을 평안하게 하소서.

 

 

 

기도

 주님.

오늘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내 음성으로

내 음성으로

간구하라.. 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하게 하소서.

이제는 좀 힘있는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시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소리질러 기도합니다.

주여.

절 도우소서.

제가 알지 못하는 제 속의 어려움 해결해주소서.

이제는 내가 가진 달란트로 남을 위해 쓸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일 필요합니다

솔직히 아직도 주님.

그런 간구를 하려면 마치 혼내는 아버지 처럼 제 영혼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 기도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러라시기에 그러려 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저로 하여 긍휼한 마음이 넘치게 하소서.

아.

간절히 바랄 것은 '그냥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긍휼'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끓어 넘치는 긍휼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내 속에 여러가지 생각하고 자르고 정죄하는 시스템 보다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시고 주님이 원하시기에 그냥 사랑하는

그 사랑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주여 아울러 바라올 것은

저의 허리를 낫게 하소서.

 지난 한달은 너무 바빳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이 힘드네요.

주여.

솔직히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많지만

아직도 슬그머니 틈만 나면 밀고나오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제 중년의 중후반을 들어서는 나이에 이러한 곤란이

저로 약하게 할 가능성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주여.

이런 마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실이

위의 필자의 고백처럼

영혼이 comfort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면서 이런 간구하는 것이 주님이 좋아하실 까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혼란 스러웠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오늘 묵상 중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주님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판단 받기를 원하시는 듯하여

그냥 고민을 가지고 아룁니다.

주님.

또 있습니다.

내 아들들.

주님

그 아이들.

지금까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죄송스럽습니다.

내가 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데..

내가 아는 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얼마나 뚜렷한데

내가 아는 이 말씀의 힘이 있으심이 얼마나 대단한데

내 주위의 현상이 이렇게도 힘이 없는가?

난 어떻게 이렇게도 힘이 없이 내 삶을 살아가며

내 가장 가까운 자식들에게도 이렇게 밖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주님의 눈이 두렵습니다

주여 그래서 필자처럼 저도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주님 그리 편치 못했습니다.

비단 저 문제 뿐이겠습니까?

나에게 주신 주님의 달란트가 얼만데

이 나이,

이렇게 들어가면 더이상 움직일 육체의 성한 곳이 남지 않을 나이가 곧 올텐데..

그러하게 생각하면 주님 더 이상 간구할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 힘이있게 간구하는 기도를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주여.

이제 기도하오니

주님의 말씀이 오늘 저에게 모든 염치를 내려놓고

그러한 모든 것을 주님께, 주님께, 주님께 맡겨놓고

소리내어 내 목소리로 간구하기를 원하심을 알았기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도우소서.

이 외 모든 것도 다 그러하소서.

이 나라를 그리하시고

이 안양을 그리하시고

이 블로그 오시는 모든 분을 그리하시고

내 가족을 그리하시고

내 주위를 그리하소서.

내 환우 분들을 그리하시고

 모든 분들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감사하며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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