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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나를 (고후 11:1-15)

주하인 2009. 8. 19. 12:48

제 11 장 ( Chapter 11, 2 Corinthians )

 

 

내가

아기라고 귀엽게만 보이시나요?

아니

그보다 훨씬 큰 존재랍니다.

주님의 피조물.

사랑받는 피조물이지요.

원컨대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의 뜻안에서

나를 보아주세요.

부디  나를

용납해주세요.

 

 


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오늘 큐티를 하면서 이상했던 것은

바울 께서 1절에서   

'청컨대 원컨대' 라든가 '나의 어리석음', '용납하라' 등이나

6절에 '말에는 졸하나' 라는 등의  

늘 그러하시듯 겸손의 표현을 하면서도

갑자기 '큰 사도들 보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하시기도 하고

'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 등의 극도의 거만한 표현을 하시고 계시다.

이게 이상하다.

 어쩌면 나의 그 오랫동안 해왔던 양면적 성품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어 ㅎㅎ  지금껏 열심히 추구해왔던 바울님 뒤따라 가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

 하지만, 2절과 7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나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열심' 등의 표현을 보아

그 분이 내면적으로는 한없이 겸손하여 계시면서도

남들을 위하여 자신의 실제적 모습을 내보일 필요가 있다는 판단하에서

아마도 주님이 주시는 자유로운 마음 하에

그리 표현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사람이란 외적인 조건을 볼 수 밖에 없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적 성장과 외적인 행동의 일치가

오늘 묵상에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관점이 아닌가 싶다.

 내적인 충일이 없는 상태에서는

겸손을 위하여 의지적 노력을 하다가

겸손을 가장한 교만,

딱딱한 율법주의로 빠지기 쉽상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성경에도 말한다.

 한명을 전도하려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수도없이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는 사람들...

도덕의 한계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도 바울님의 어떤 것을 보고

내면적으로 충일한 분으로 판단을 하는 가?

 '청컨대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라는 말씀이 그렇다.

그 뉘앙스가 그렇다.

나의 '좀' 어리 석은 것.

그냥 어리석은 것이라면 조금은 여유가 없어 보일 것을

나의 좀 어리석은 이라는 표현은

그 안에 비치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 나온다.

'내가 좀 어리석게 보여도 괜찮다.

어쨌든 당신 들이 나의 이 어리석음을 보고라도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다면... '이란 의미로 다가온다.

' 원컨대 나를 용납하라' 

한번도 아니다.

'청컨대'  '원컨대'

그 안에 얼마나 절박한 겸손이 묻어 나오는가?

난 날 돌아본다.

난 이렇게 까지 날 낮추며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인가?

일단은 내가 날 용납하지 못해서 이다.

 며칠 전

아침 출근 시 부닥친 K모님의 찬바람 부는듯한 냉랭함에

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그 분의 태도가 분명코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앞 뒤 상황에 그럴 만한 일이 있었고

이전과 다른 그 분의 뜨악한 태도는 나로 하여금

아침 부터 말한마디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괜히 가슴이 답답하게 만들어 왔다.

 가만히 내 속을 들여 다보았다.

이것은 그 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 분이 혹여 내 눈에 보인 그 뜨악함을 보였다면

그것은 그 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그 뜨악함을 가지고 난 왜 속상해야 하는가?
그것은 내가 날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날 용납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었더라면

그게 그리 흔들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잘해야 인정 받는다.'

'남의 용납이 내 존재의 의미'... 뭐 이런 왜곡된 생각으로 날 훈련시킨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분과 큰 부딪침은 없었지만 분명코 서먹할 일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날 용납할 수 있다면 그게 그리 큰 일은 아니었을 것을..

 

 사도 바울님의 심사로 돌아가 본다.

그 분은 늘 단 한번이라도 죄의 유혹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분도 심하게 다투어 바나바와 헤어지지 안했던가?

베드로님에게 심한 야단을 치지는 아니했던가?

그 뿐아니라 일상의 일에서도 빈도야 나보다 훨씬 덜 했겠지만

인간인 이상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인가?

만일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더라면

어찌 저런 여유가 나올 것인가?
 그러한 여유는 어찌 나오는 것인가?

어찌 해야 자신을 용납할 수 있는가?
 오직 주님이시다.

십자가시다.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해결 받는 것이다.

그러고 나온 영적 충일감으로 타인에게 대하여

여유로운 낮아짐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만일 그 분처럼

남들에게 대놓고 나의 부족함을 용납하라는 말을 하라면

죽기 보다 싫을 것이다.

속이 상할 것 만 같다.

땀이 송글 송글 맺히고 심장이 두근두근 거릴 것만 같다.

 

 이제 나도 사도 바울 님 처럼

나를 낮추고 회개하고

그런 나를 용납하고 받아 들이길 원한다.

부디 내가 나의 부족한 점을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부족한 면 마져 사랑하고 주님 앞에서 해결 받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그 낮아짐의 여유로

남들에게 겸손함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낮아짐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낮아짐이야 말로 높아지는 지름길임을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심의 겸손이야 말로

진심으로 낮아지고

그 낮아짐을 주님의 이유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진심으로 기빠하며 낮아지는 것이야 말로

진심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겸손의 무장이야 말로

수도 없이 많은 불쌍한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되게 하는 것이고

혼란 스러운 이 시대에 여유가 되는 것이다.

 

 

 

 

적용

1. 원컨대 나의 부족함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백번 외우겠다,.

 

2. 남을 위하여 겸손하리라.

  주님을 위하여 고개 숙이리라.

 

3. 입을 닫겠다.

 말이 늘어나면 교만해진다.

 

4. 내가 나를 사랑하겠다.

 나를 용납하겠다.

 주님의 뜻이다.

 부족한 점마져 사랑한다.

 기도하고 내려놓고 ... 회개한다.

그리고는 사랑하겠다.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6. 복음 전도를 위하여 낮아지겠다.

 

 

기도

주님

원컨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청컨대 내가 나의 부족한 점을 용납하겠습니다.

남에게도 저런 마음과 겸손의 태도로 대하겠습니다.

주여.

난 늘 부족한 자 맞습니다.

부족한 날 용납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그럴 때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소서.

낮아짐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이유로 기뻐하게 하소서.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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