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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아들이 돌아왔다( 렘 8:4-17 )

주하인 2009. 9. 20. 09:27

제 8 장 ( Chapter 8, Jeremiah )

 

지난 여름

가족 여행 중

세부의 나르시안 바비큐 내

진한 연기 속의

큰 아들.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

    하도다    
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하라 
 
  어제 실크로드 중창단 발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다.

큰 아들의 방이 더욱 넓어 보이고 휑해 보인다..

기도하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라 생각은 억지로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 것은 틀림없다.

배가 심히 고파서 -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점심을 굶었었구나..ㅎㅎ - 집에 있는 라면을 뒤지고 김치에 만두를 찾아서 끓여 먹고 교회로 향했다.

성가대 연습 때문에 정말 가기 싫은 것 -이럴 때는 근육이 진짜로 오십대의 근육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파김치라는 표현이 맞다.   정말 바쁠 때도 주님의 은혜로 에너지가 넘쳤었는데 ...은혜가 넘칠 때는 말이다... - 편한 운동화와 청바지로 갈아 입고 귀에는 둘째 아들과의 찬양한 것, 설교 녹화한 것.. 이 들어 있는 MP3귀에 꽂고 아파트 아래 개울로 내려가 잘 깔려 있는 우레탄 도로를 걸어

안양천변을 거쳐 교회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면 50분 내외의 거리.

무거운 근육이 더 천천히 나를 걸린다.

하지만 한참을 걷다 보니 바람은 불어오고

옆에서 살랑거리는 갈대의 군무.

강변의 자연이 주는 탁트임이 마음을 조금은 풀어지게 한다.

 교회에 도착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와있다.

 모임에서 갑자기 오라는 연락이 와서 갔다 왔단다.

아내가 큰 아들이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면서 얼굴이 희색이 돈다.

군대에 갔다가와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잠시 아르바이트 겸 홀로서기를 위해서

대학은 휴학을 하고 나가 있었던 아이.

 나름으로는 아이의 자랄 때의 비상함에 대하여 과도한 기대를 해서 인지

아이가 뜻보다는 못한 성적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있었고

아이는 반항.

크게 삐둘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매사 아빠인 나와는

의견이 맞지 않던 차다.

 군대까지 갔다오니 어찌 할 수 없어 지켜만 보고 기도를 하고 있던 아이가

곧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가방 먼저 들고 들어 왔다 한다.

요번 달 까지 일을 마치고는 '영어'공부를 시작하겠다나..

할렐루야.

다시 들어와서 이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면

내 불같은 속이 어찌 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주님께 내려놓고 기도한 일부분은 이루어졌다.

요사이는 나에게 주시는 '믿음'이란 부분과

회개 부분에 대한 말씀이 부담으로 온다.

 

 믿음.

이 믿음이란 것.

어찌 보면 굉장히 간단할 것 같지만

난, 내 속을 들여다 보면 불신덩어리 임이 분명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의까지 어색해 하는 내 쑥쓰러워 하는 깊은 마음 속에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할 기본 자질은 가지고 있다'와

'주님 예수님이 몸바쳐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화평을 주장하시는'

그 말씀조차 믿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어쩌면 내가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원망이나 미움이 꿈틀거리는 것은

'주님 예수님이 날 그처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단순하면서 엄청난 사랑을 믿지 못하기에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만일, 내가 주님 예수님이 날 그처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 다면

난 당연히 '구원'의 실제가 내 속에서 벌어질게 분명하다.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책에서 읽었다.

공감한다.

' 구원'은 인간의 육체에 갇혀 제한된 자원 밖에 없던 것을

우주의 궁극에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난 이것을 이렇게 이해한다.

 주님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성령'이란 끈으로

내 영혼에 파이프 박혀 버린 것.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이 무한정 연결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이루어지는 것.

이처럼 간단한 것을 믿지 못하기에

내 영혼, 내  몸 , 내 주위로는 주님의 기적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솔직히 나도 기적을 체험하기는 많이 했다.

겨우 ' 금연'

겨우 '불면증 해결'

겨우 '내 의사로서의 패러다임 변화'...

아.. 그러고 보니 기적이 많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더욱 명료하고 더욱 뚜렷한....

 

 '존비비어 목사님'의 '존중'이란 글에

아프리카 사역 중 수없이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던 중

멀리서 죽은 아이를 포에 싸서 데리고 온 어머니에게 기도하니

아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강포를 열어보고는 한참 후에야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한다.

그 죽었다 산것도 기적인데 어찌 한참 지난 후에야 울었는가 궁금하여

물어 보았더니 아이는 안구가 없던 아이인데

살아난 것도 기적이긴 하지만

그 강포의 아이가 살아나서는

없던 안구까지 생기고 눈을 뜨고 쳐다보아서

놀래서 울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들인가?

이런 기적이 자유롭게 생기는 것이 '구원'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샘병원 의료 단기사역 가서도 그런 유사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한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미국에만 돌아오면

겨우 '두통', '허리병'...이상의 기적을 베풀수 없었다 한다.

 수년전 읽은 '멜테리 선교사님'의 '불처럼 바람처럼'이라는 책에서도

미국에 초청 받은 선교사님이 공항에서 내릴 때

옷이 더러워서 기도하니 옷까지 빨아주신 기적을 보았다.

 예수님은 어떠시던가?

그리 많은 기적이 고향에서는 일어나지를 않으셨다.

 모든게 믿음 탓이다.

순진하고 순전한 나라에서는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얻은 것이다.

구원의 더 큰 차원은 물론 또 있지만...

어쨋든 이런 잘사는 , 교만한, 게으른 자들의 부족한 믿음으로는

겨우 그정도의 현상 밖에 안나오는 것이다.

나도 온전하고 순전한 믿음이 필요하다.

기적이 내 목적이 아니고

내 바라는 본질은 아니지만

그 기적처럼 큰 믿음을 증거로 가지고 싶다.

정말...

 

난,

내 속에 깊은 나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 ..'

그래.

외견상은 그렇지 않게 보일 수있다.

의사에 꽤 큰 키에, 그리 나쁘지 않은 목소리에

배우는 것도 그리 쳐지는 편이 아닌데...

그런데도 난 저런 깊은 나에 대한 불신도 있음이 사실이다.

주님을 믿으면서 엄청나게 많은 부분 회복이 되어 있지만

아직도 날 힘있게 신앙생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중심에는 '나와 남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불신'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제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나의 나에 대한 불신을 믿는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

주님은 날 사랑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머리 속에 인식하는 , 그래서 슬쩍 믿는 것처럼 묻어버림이 아니고

진심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 나의 부족함 마져 주님이 사랑하심을 믿어야 한다.

나의 실수도사랑하심을 믿어야하고

나의 급한 결점도 이해하고 사랑하심을 믿어야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믿어야한다.

나의 외로움도 그 분은 십자가에서 다 체험하셨음을 믿어야한다.

그 분은 나의 두려움도 십자가 박히시기 전 다 체험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내 가진 모든 어려움 힘듦, .. 주님은 다 체험하셨고

싱싱한 체험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중보하심을 믿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런 부족한 나, 약한 나, 곤란의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약함, 부족, 곤란, 궁핍한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내 육신에 , 내 영혼에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나의 남에 대한 불신을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

아들.

믿어야 한다.

지금은 비록 부족하고 내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이 들지만

주님이 인도하심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 기도하는 한 그들은 잘될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고민하는 아이들을 안다.

그 아이들의 내적 싸움을 통하여 통합되는 장래를 믿어야 한다.

세상의 공부, 성적 ,승진.... 보다 훨씬 큰 가치가

아이들의 장래 앞에 놓여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인도하고 성공할 수 없음을 믿어야 한다.

 

 

아이가 돌아왔다.

언제나 돌아오려나 마음 조리며 기도하던 아내와 나의

일단의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

아이는 아무 일없다는 듯이 돌아왔다.

오늘 아버지 하나님이 묵상 구절에서

'사람도 결국은 돌아온다'고 한다.

'항상 돌아오지 않음'은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큰 아들의 돌아옴은 기쁨이다.

그것을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묵상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은 돌아 온다'고 한다.

그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다.

믿음이 클 사람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학'이 떠다니고

반구,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두루미와 참새가 날아다닌다.

내 영혼에 그런다.

우리 가정 위에 그런다.

 

 우리 가정의 믿음과 회복과 축복을 위해

주님이 이리 축복하신다.

감사하신 하나님.

귀하신 하나님

 

 

주님.

귀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아들이 돌아 왔습니다.

그 아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더 성숙된 모습을 보이길 원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통해서 나를 이해하고

그 보혈을 통해서  모두를 이해하고

서로 화평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몸소 구원을 주심으로

우주의 어마어마한 힘이

제 믿음을 통하여

아들의 성숙한 믿음을 통하여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전의 고통과 상처와 아픔과 갈등은 사라지고

대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서로 더 이해하고

서로 참아서

주님 원하시는 쪽으로 성화되길 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길 원합니다.

아이들은

주님 안에서 힘있는 삶을 살수 있길 소원합니다.

아이들이 겪었을 내적인 연단이

헛된시간이 아니고

그 과정을 통하여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고

부족한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좀더 성숙한 자.

그리해서 주님의 영광을 영육간에 온전히 들어내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가정의 화평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장래를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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