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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들 같이^^* [마18:1-10] 본문

신약 QT

아가 들 같이^^* [마18:1-10]

주하인 2019. 3. 19. 09:10


이제 곧

꽃 완연히 필 4월이되면


천국의 흔적을 간직하고

우리 곁에 올


내 귀여운 손녀

귀한 우리 아가  ^^*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 살기 위하여

마땅히 천국시민이 되려면

천국에 사는 자들의 모습은

이러한 영적, 심적 움직임이 있어야 하리라 .


 '어린 아이'


나.

어려서 부터 아가들을 참 좋아했다.

머리 복잡한 그 젊은 시절에도

아가들이라면 사죽을 못썼다 .

 인턴 때.  

잠도 못자고 바삐 이리 뛰고 저리 뛰곤해도

병동의 아이들은 나만 가면

'조르르 ' 달려와 내 다리에 콱 그 조그만 팔을 감고는

그냥 허깅 하듯이 안곤했었다. ^^*

 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선하고 뚜렷하다. 

30년 가까이 지나

아마도 그 아이 들,

그 보다 큰 아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살가운 , 맑은 영혼의 감동이

시간을 건너

그대로 살아 내 가슴에 밀려오는 듯하다.

 아래에도

두개의 시간을 달리한 동일한 마태복음 18장에 대한 묵상이 펼쳐 있지만

아가들의 그 영혼을 흔드는 사랑스러움이

어찌 하나님께서

예수님,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면서도

이 지구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내려보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는지

아가들의 그 사랑스러움을 보면

아주 아주 아주~ 약간이지만

느껴지기도 한다. ^^*


 너무 사랑스러우심으로 인한

너무너무 너무 거대한 사랑.

그 긍휼히 여기심...........


아..

당연히도

우린

아가의 그러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

이 땅에,

세상의 권세잡은 자, 사단의 장난에

오염된 영혼의 맑음을

주님의 뜻가운데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오늘.

내가 회복해야할

아니 회복을 위한 부분은 무엇인가?


일단...

아이라면

마땅히 '용서못할 분노'는 없어야 하리라.

옅어졌다지만 아직도 가슴 깊이 내재하여

움직거리고 있는 오래된 터부가 느껴진다.

또아리..

아가들..

순간의 짜증은 있다.

어쩌겠는가?

그런데 '원한'으로 가져갈까?

과연.. ?

금방 웃고 어울린다.

그게 아이다.

그 것..

내 속에, 우리속에 어떠한 이유를 가지던..

이 땅에서 잘못 훈련된 오류의 결과다 .

진정 아름다움은

그냥 바보 같아도, 그냥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냥 멍청이 같아도

아이처럼..

아이처럼 잊는 것이다.

모든 그러함.. 그러함으로 인한 '논리의 움직임'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게.. 천국 시민의 모 습이다 .

 예수 께서 '수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이야기에 맞는

모습이다.

천국에서 그런 모습 만을 보셨을 테니... (아.. 천국에서도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ㅎ )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께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이시고.......

 

그외에도 너무도 많지만...

오늘 내게 원하심은

무엇이실가 감이 잡힌다.

 이유없이 그러함..

그 안의 내재된 오래된 생각들의 꼬임..

그것을 '아가처럼' 풀어내라는 말씀이시다.

원인이 무엇이든..

그냥..

용서하고

그냥 받아 들이고

그러한 나를 '미련하게 보이든, 멍청하게 보이든'

괘념치 말고 ( 안 모씨께서는 그러한 단어를 이러한데 써야 했는데..ㅎ.. )

그냥

아가처럼

털어버리라는 말씀이시다.


일단.. .하나 생각나는 것 붙들고

아가처럼

주님이 말씀하시고

결국 궁극이 그것이니

그리 될 하루가 되어야 하리라.


감사합니다.

내 주여.

압니다.

그러나 잘 안되고 매사 잊습니다 .

강력히 사로 잡히면 아닌데..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곤.............

용서하소서.

주님의 십자가로 그리하시고

그러하신 은혜로 인하여

다시금 아이처럼

용서하고

아이처럼 사랑하고

아이처럼 밝게 하여 주소서.

손해.. 생각지 못하게 하시고

억울.. 느끼지 못하게 하시며

좌절... 글자도 잊어버리게 하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그냥..

말씀하심으로 인하여

아이같이 됨을 선택하였사오니

성령으로 이끄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1     2010.02.20 묵상


 

보호자 같던

늦둥이 아이의 눈빛

 

아이의 눈에

생각이 서려있음이

  가슴이 아팠다

 

아이의

아이다움은 사랑스럽다

 

아이의

어른스러움은 아프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로서 아름답다

 

주님은

우리의 아이다움을 원하신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

작은아이.

 여섯 번이나 되풀이 나오신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가기를

주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우리에게 바라시는 지

그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천국

천국은 우리가 결국 가야할 본향이다.

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얼마나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지

그 분은 몸소 세상... 이 더러운 곳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 하시고

몸소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달리시고

몸소 그 곳에서 피뿌리시고

몸소 다시 부활하셔서

세상을 향해 '길'을 만드셨지 않던가?

그게 그 분의 기쁨이셨기에 그러셨다 하신다.

성경에 나와 있다.

이사야서 43:21절도 그렇다.

그외에도 많다.

 이처럼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뚜렷하시다.

천국에서 '큰 자'로 당신 하나님의 영생을 받아

살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

 

 우리 인생의 목적은 뒤집어 보면

너무나도 뚜렷하다.

돈 많이 버는 것 아니다.

이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자식을 남기고 가는 것?

..............

아니다 !

이 런것들은 이땅에서 국한 되는 것이다.

스러져 없어져 버리면 아무 가치 없는 것..

 

 ' 천국을 향해 가는 것.'

이게 인생의 목적이 맞다.

세상을 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

이게 이 땅을 사는 이유다.

  빨리 모든 붙드는 관계와 이유를 뿌리쳐 벗어 버리고 가고 싶지만

그래도 그러지 못하고  

이 지긋지긋하고 아무런 의미없는 세상의 행로를 살아갈 이유는

천국을 들어가기 위하여 연습하고 연단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연습하는가?

 내 인격

내 영혼에 들어 붙어 있는 '어른적'인 것을 벗어 버리고

아이적인 것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어른적인 것?

성공하려 노력하고

장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고

에티켓에 대하여 배우고

술먹고 놀고

춤추고 사랑하고

........

어른 적인 것 맞다.

무엇이 어른인가?

그게 과연 나이들고 결국 죽어갈 이 유한한 육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배우고 아는 것은 늘어나지만 그게 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던가?

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이와 달라지던가?

  아이는 어떤가?

내일일은 걱정하지 않는다.

비교하지 않는다.

단순하다.

순수하고 순결하다.

울수 있으면 울고 웃을 수 있으면 웃는다.

솔직하다.

하지만 유약해 보인다.

홀로 있으면 방어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른이 되려 한다.

자기가 방어 능력을 쌓고 자기가 서려 한다.

그러기에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른과 아이를 볼 때 어떠한 느낌인가?

어른은 아이와는 다르다.

당연히도 ..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그들은 경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그들은 .......^^*   ^^*  ^^*

 

 천국.

천국은 어른들의 정제 되지 않은 심성으로 갈 곳은 아닌 듯 하다.

거기도 이 땅의 삶과 다름이 없다면

정말 몸서리 쳐진다.

영원토록 이 땅과 똑같은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거야 말로 지옥과 다름없지 않을까?

 

 천국은 아이들과 같이 된 자들이 들어가야 할 곳 맞다.

이 땅은 어렵고 힘들지 만 그리 살아가야할 우리가

아이처럼 바뀌어야 할 '연단'의 장소가 맞다.

연단은 쉽지 않다.

술 맛을 아는 자들이 우유를 어찌 다시 맛볼 것인가?

 여자의 육체를 알고 남자의 몸을 아는 자들이

어찌 아이들의 그 순수한 눈빛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

오직 주님으로 만 가능하다.

오직 십자가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가능하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 우리가 마땅히 들여야 할 땀의 분량이다.

우리가 올려 드려야 할 '산제사'가 맞다.

  

 

 

 산제사.

아는 것.

아이같이 되는 것.

천국 소망

그 당위성.

그 천국적 삶의 원형.

기쁨.

평안.

간증...........

지금껏 이끌어온 내 삶의 원동력

말씀.

말씀의 살아계심.

 

다 안다.

다 앎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력하다.

약간........

 

 안다.

이것도 금방 회복되리라는 것을...

 

 

 지난 금식 후 나는 좀 좌절해 있다.

물 흐르듯 때가 되는 듯하여

금식하며 기도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는 아직도 변화가 없다.

깨달음은 있다.

' 내 정체성은 '겸손'이다.'

' 주님을 위하여 무조건 겸손한다.'

하지만 내 속에서는 아직도 싫다고 한다.

짜증이 올라오려 한다.

물흐르듯이 '아이와 같이 되고 픈 내 심성'을 가지고

기도 제목으로 들고 들어 갔는데..

이전에 상처라는 명분하에 원망하고 미움만 쌓아오며

맑은 아이라기보다는

상처입은 어린 아이 같았던 내 심령을

금식과 더불어 주님 앞에 위로 받고 해결받고 나와

'그래 .. 난 흉악의 결박을 끊을 단초를 가지고 나왔다'하고

 기뻐 외치고 싶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나온 것처럼

나에게 해 주신 것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그보다 더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러함으로 내 인생여정에

더욱 힘있게 '아이처럼 ' 더 단순하고

아이처럼 더 맑게 세상을 바라보는 데 나갈 수 있길 원했던 것이다.

 주님의 평강이 얼마나 좋던가?

그게 ..

이처럼 더 뚜렷해지고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내 어두운 부분들,

나를 가로막아 서는 내 어른적 성품 들,

온갖 걱정, 염려 , 의심, 삐짐, 속상해함, 좌절, 미움........................들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아무 조건없이 벗어 버리고

남들 앞에 '겸손'이 오직 내 정체의 모든 것인양

주님을 위하여

아무 부대낌 없이

나의 자아를 내려 놓고

말씀 하나하나가

마치 순백의 어린아이처럼

내 영혼에 쏙쏙들어오고

그런 나를 사랑의 눈으로 쳐다보시는

주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며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워

내 걸어가는 이 지구의 삶이

비록 지옥 같은 현실일 지라도

천국같이 사는 것을 바랬는데.................

아니.

솔직히

금식 끝나고

왜 내가 이리 복잡한 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 삼일 무기력 상태에 있어가며

기도도

성경도

말씀도 제대로 묵상하지 않으며

멍~하니 지냈다.

 난 알았다.

내 속에서 부대끼는 어린아이같은 본성에 반하는

더러운 것들이 없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었다.

 솔직히 너무 죄송하지만

주님께서 날 안좋아하시나 보다.

내 믿음이 이것 밖에 안되는가... 하는 좌절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린이의 그 품성이 되는 것.

그게 그리 쉽기 만은 하겠는가?

보이는 것이 다 그런 것을..

물질의 세계는 날 '인과의 관계'로 꽁꽁 묶어놓고

잠시라도 그러한 진실과 진리에 더 집중하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는 것을...

내 육신은 기가 막히게도 날 끌어 당겨

영적이고 더욱 경건한 주님의 뜻을

헤아릴 틈도 없이 휘몰아쳐 대는 것을...

 

 아직도 그렇다.

그냥 그럼에도 묵상에 임했다.

말씀에 대하여도 힘이 없다.

꼭 철저하고 강력한 인도하심을 바라고 임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게 옳기에 그런다.

그러면서 글을 쓴다.

그럼에도 인도하실 것임을 알기에 그런다.

내 힘없음.

내 좌절.

내 무기력.

다 내 감각과 좁은 생각의 틀 탓이라 생각하고 그러고 있다 .

이전에도 몇번 좌절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하늘을 보면 어두웠다.

주위는 꽉 막혀 보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 듣기도 싫은 느낌이었었다.

하지만 또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면

세상은 밝고 기뻤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 맞았다.

난 그 분의 품 안에 있는 행운아였다.

내 삶은 힘이 있었고

난 전율같은 영감으로 사로 잡혀 왔었다.

늦은 밤 수술을 몇건 씩하고 퇴근해도 힘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좋아 보였고

내 삶의 패턴은 점차로 맑고 단순하고 정결해 지기 시작했었다.

.....

또 그러리라  안다.

 

 하나 더

짐을 벗어버리고

조금 더

정결해지며

한걸음 더

주님 앞으로 다가가

아주 조금

더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픈

내 바램을

그들, 사단이 싫어하나 보다.

그래서 날

붙들고 늘어지나보다.

 

그래.

얼마나 더 그러나 보자.

그러나

아직은

마음이 무겁다.

힘이 없다.

 

 

 

기도

 

주님

아시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 14.03.10 묵상


 

이 사랑 받을 줄 아이는

아프면서도

이리 애교를 부린다

 

그 조그만 몸으로 뿜어내는

영적 몸사위가

참으로

보는 나를

기쁘게 한다 

 

사랑 받는 자로서

기쁜

아이 사람의 몸짓을

나는 과연

주님께

진정으로 올려드리고 있던가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무리 중에 가만히 있던 아이.

불특정 다수 아이의 무리 중 그냥 한 아이.

예수 곁에 서 있던 한 아이.

 

그 아이가 그날에 예수님 앞에 불려 나갔다. ^^*

아이의 표정을 연상해 보았다.

 

햇살 가득 문 아이의 표정은

너무도 순수하지 않았을까?

그 생글거리는 기쁨이 온 좌중을 잠시 '무장해제'시키지는 않았을까? ^^*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은 말을 이으신다.

'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

' 아이 같은 자가 큰 자다.

' 아이 같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토요일 주일 당직을 섰다.

한달에 한번 정도 돌아오는 '주말 당직'.

 

분만실에 산모님이 있어 진찰하고 나오는데

건장하신 남자 분 (조금 우락 부락하신.ㅎ )이 분만실 정면에 딱 서 있고

곁에  그 무릎 정도 밖에 안올라오는 크기의,

그 분을 꼭 닮은 (ㅎ  ^^;; )  여자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가만히 미동도 안하고 서있지 않는가?

모습이 우습기도 , 귀엽기도 해서 걸어 나오면서 가만히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니

아이는 눈빛 만 잠깐 반짝이면서도 인형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게 아닌가?

조금 스쳐 지나와 당직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서 버튼을 누른 후

돌아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가만히 서서 스마트 폰을 뒤적이며

면회온 목적인 분의 전화번호를 한참 찾는 듯 집중하고 있는 데

아이는 아버지 손잡고 있는 상태에서 고개만 나에게 돌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난, 아이들의 이런 것이 좋다.

거의 틀림이 없다.

아이들은 100이면 100 모두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검은 눈동자가 가득한 순수한 눈망울로

반드시 뚫어지게 쳐다보아 준다.

그래서 그럴 때 살짝 내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짓는 표정이라도 보여주면

어떤 아이는 정말 '환상'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온 몸을 환희로 떨면서 기쁨을 표현하 기도

어떤 아이는 수줍음에 몸을 돌려 살짝 어른 뒤쪽으로 숨어 들어가는 듯 하면서도

그들은 공통적으로 눈을 내 눈에서 떼지 않고 바라본다.

성품적 특성에 따라서 반응은 다르지만

그들은 '사랑' 받는 자, 사랑을 갈구하는 자로서의 특성을

공통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그 아이.

그 무표정하고 조금은 무뚝뚝할 것 같은 아이는

아버지와 상관없이 잠시 나와 영혼으로 엮여 있었고

그 잠시의 시간에 그 작은 얼굴에 '미소'가 살짝 비켜지나는 것을

나는 목도를 하였다. ㅎ

 

잠시 당직방에서쉬고 내려와 다시 분만실로 가

아이의 방문 목적인 '산모'님이 애기를 낳고 밖에 나가니

아이의 아버지(아마 산모 남편의 형인듯..)와 나머지 식구들이 대기실 의자에 빙 둘러 앉아 있다.

일단 축하의 인사를 던진 후

누군가 나를 아주 반기는 느낌이 들어 그쪽으로 돌려보니

아이였다.

아이의 시선은 나에게 꽂혀서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아까의 분위기와는 사 뭇 다르게 방긋 방긋 웃어가며 기뻐하는게 아닌가?

아...

생긴 형태에 비하여 ㅎㅎ.. 너무 귀여워 잠시 쪼그려 앉아

눈 높이를 맞춘 후 두 손 벌려 아이를 오도록

내가 지을 수 있는 최선의 편안한 표정과 유혹적 음성으로

'아가야 이리와~~' 하였더니  아이는 소파에서 펄쩍 뛰어내려와

이제 겨우 아장 거리는 몸짓을 탈피한 걸음 거리로 내게 오는 것이 아닌가?

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난 아이를 끌어안고 아이를 유혹했다.

뽀...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한점 망설임 없이 내게 뽀뽀를 했다.

아이구..

기뻐서 가슴이 다 뛰네.

처녀의 첫 뽀뽀를 내가 ..ㅎㅎ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래며 하는 말.. .

'쟤가~' ..한다.

아이는 분위기 대로 그리 애교가 많은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난...안다.

아이들은 '영혼'이 자기를 이뻐하는 사람을 '깨닫는다'

아니 ,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 ' 아이 사람'들의 공통적 특성을 보며

난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지었을 때',

' 십자가에서 구원 받은 당시의 우리를 보셨을 때 '

' 그 구원의 기쁨을 이해하고 놓치기 싫어 몸부림 치는 더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이쁘시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우실 '지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곤 한다.

 

나..

참 아이들이 이쁘다.

그들의 몸짓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들.. 이라 함은 위에서 표기한 '아이들의 공통적 특성'을 들어서

배우지도 않은 행동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저렇게 나타남은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믿게 된다.

 특별히 원죄가 들어가기 전의 아담과 이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을 그래도 가장 많이 닮은 '아가'들이 저리 이쁜 것을 보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위에잠깐 썼지만 내가 기뻐하며

이처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하여지고

심지어는 심장이 두근댈정도로 사랑스러운 - 정말이다. ..  - 아이들의 공통적특성이 무엇인가?

 

 시선이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것.

사랑을 갈구함이다.

사랑을 받을 존재로서의 자신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음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마치 새들이 입벌리면 부모새가 무의식적으로 먹이를 주듯

아이는 그 영의 빨아들임으로 어른 들로 하여금 영적 파동을 자극하여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랑 받는 자의 영혼'을 가지고 있음이다.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그냥 받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를 물리시고 육신을 가지고

수천조의 별 가운데 이 지구에 내려 오셨다.

그리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 육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혼자는 끊어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죄' 로 고민하면서도 자꾸만 얽매어지는

그 죄의 무게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러셨다.

그 모진고통,수모를 감내하심은

내가 ,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여

그토록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고

우리는 그러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이다.

아..

그러함에도 그러한 사랑을 누리지 못함은

아이와 같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 받을 만한 자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음이

그 첫번째 이유다.

'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자'임을 알아야 함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받을 만한 자다.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자존감의 원천이다.

자존심이 아니다.

 

 또한, 아이는 사랑받는 것을 깨달은 순간 표현한다.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그 조금만 얼굴 근육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배시시 숨는 그들의 몸사위로 표현한다.

비록 그들의 성품적 특성 상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그들은 받는 사랑을 최대한 표현해낼 줄 안다.

그들이 우리 어른을 위하여 무엇을 만들어 대접하고 착한 일 해서 그러지 않는다.

받은 사랑을 표현해 낼 줄 아는 것이다.

숨기거나 가감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쁘다.

 그렇다.

우리도 삶속에서 '받은 사랑'을 표출해 내야 한다.

최대한 '감사'로 그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 받는 자'로서의 인식과 더불어

감사를 표출해 내야 한다.

' 예수님'의 사랑이 감동스러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주심이 기뻐서 기뻐해야 한다.

그분이 그러라시니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돌아본다.

내 주변이 과연 기뻐할 만한 상황이던가?

아니다.

하지만, 상황 따라 기쁨이 위아래로 요동침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아이는 그렇지 않다.

그냥 사랑받기 때문에 기뻐한다.

기뻐하니 몸으로 표현한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위의 이유로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한다 .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한다는 것은 꼭 감정이 우선됨이 아니다.

우리가 '아이처럼' 되기 위하여서는

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력이 되기 위하여서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인식이 되기 위함은 '하나님의 첫사랑을 체험'하고 ' 성령'으로 늘 이끌림 받는 존재들이기에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련의 노력이 있어야 하고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것은 '기도'로 우리 가슴에 녹여야 한다.

말씀에서 그러하신다.

'아이같은 사람이 되라'

아이같은 사람의 두번째 조건에서 '표현하라'다.

이러한 말씀의 당위성이 있기에 우리가 할 일은 결심할 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이 '상황'에의하여 흔들릴 때마다 놓치지 않도록,

아들이 말썽이고 가정이 흔들리며

삶의 행태가 정말 어려워도

'기뻐하라' 고 감사하라시니 그런 결심을 하는 것.

오직 예수 위해 그러는 것.

그것을 주님은 그냥 두시지 않는다.

그러한 결심을 전제로 할 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부어주신다.

그래서 감정까지 선하게변하고 따라서 삶도 변한다.

아이같은 밝은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인다 .

사람들이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른 삶의 방향을 주장하셔서

다른 환경 속에서 또다른 '감사'의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

그것은 '긍정적 결심'에 의하여  세상사람들이 리더로 되기 위한

세상적 몸부림과는 다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점차로 '선한영혼'의 결실을 가져오게 하신다.

계속 영-육-혼의 선순환이고

결과는 '아이사람'의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홀로의 결심은 절대로 될 수 없다 .

육과 혼.. 차원까지의 발전은 있을 수 있으나 어느 순간 더 큰 영의 물결들이

그들을 방해한다.

'가장 큰 교만은 가장 겸손하다고 생각될 때'라는 누구의 말이 그 뜻임을 우리는 안다.

오직 하나님의 영,예수님 십자가 만이 그리 될 수 있게 한다.

그러하심을 통하여 아이같은 영혼이 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상급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첫구원이고 상급 구원은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시기도 하다.

 

 또 아이는 '무조건 믿는' 특성이 있다.

아이.

부모와 친척들을 물리치고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안겼다.

아.........

그 사랑스러움이란...

나는 아이를 안고 잠시 부비부비를하였더니

아이는 그 조용하지만 작은 얼굴에 함박 웃음을 피우며 기뻐한다.

내가 누군지 알고...?

아버지 어머니 곁에 없으면 '유괴범'으로 돌변할 지 모르는데.ㅎㅎ

모두 놀랜다.

아이는 그런 성품이 아니라면서 ..

난 그랬다.

아이들은 모두 날 이리 좋아한다고...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지닌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

난 그것을 영적인 동물인 이유라 생각한다.

영이 있기에 본능적으로 영의 선함을 느끼고 믿는 것이다.

아이들은..

 난.. 예수님을 이토록 믿는가?

이렇게 믿어서 무장해제하고 내 전인생을 주님에게만 의지할 수 있던가?

혹시, 나이들어가며 약해지는 내 모든 것에대한 의지로

아내의 결정을 의지하고

아들들의 추후 내 대소변 수발을 기대하고

그것도 아니면

연금이나 보험 만을 의지하지는 않던가?
 그래.

어찌 세상의 그러한 기본적인 변화들을 부인할 수 있던가?

중요하기는 하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보험' 안들고 다 먹이실 것의지 하면 좋겠다.

다 퍼주면서 내 저축은 하나도 안함이 진정한 믿음일 수도 있겠고

병이 나서도 '기도'로써만 다 나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의 화해와 평화는 '기도'하는 아빠 엄마가 있기에

나머지는 다 이루어지어야 하는 데 왜 내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

믿음은 어디까지 인가?

어떤 범위까지 인가?

정말 '아이 같은 믿음'은 어디까지의 범위를 펼쳐야 하는가?

때로 '선교지'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병원없는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어서

얻어지는 단순한 믿음이 더 쉬울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다 털어버리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아이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 쉬운가?

하지만, 그런 믿음이 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무엇인가?

어제 그 아이의 몸짓을 통해서 내 가슴에 기쁨으로 들어온 믿음의 몸짓을 다시한번 돌아보면

이해가 조금 가지 않을까?

 아이는 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는 영적으로 나와 통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았다.

내일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냥 현재에 살았다.

현재에 주어진 것에 그냥 반응한다.

그리고 믿고 몸을 맡긴다.

 그렇다 .

내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선교사 가면 좋겠지만 선교사 아니면 또어떤가?

보험 안들고 의지하면 더 좋겠지만 그러면 또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이 보험 문제가지고 나중에 날 뭐라실까?

아이가 못생겼지만 그 자체가 이뻤다.

그 몸사위와 그 시간의 그 아름다운 영혼이 기뻐보였다.

아이는 날 그시간 믿고

그 시간 그가 가진 최대한의 몸사위로 날 기쁘게 했다.

그냥 나에게 '착~'하고 안긴 거 말이다.

 그렇다 .

난..주님 앞에 '덕지 덕지 ' 옳지 못한 모습 만 가지고 나타난 자이지만

그냥 하나님이 날 기뻐하여 주실 것임을 믿고

오늘도 하나님 품에 안겨 버릴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게 믿음이지 않는가?

믿음의 가장 큼은

그냥 하나님은 '옳으신' 분이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가서 안겨버리면 안겨질 자임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이고

그냥 안기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 환경에서 최대한 기뻐하면서...

 

그리고

그리고 .. 나서..

주님이 날 부르실 때 되면

그냥 가지고 있던 것 다 떨구어 버리고,

아... 손에 붙잡았던 것.. 다 손 놓아 떨구어 버리고

머리에 엉키 성키 올려져 있던 꾸밈들 다 털어 버리고

주님 팔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 뿐이다.

 아..

아이의 입장으로 나를 바꾸어 달려가는 모습을 연상해본다.

아직.. 조금어색하다.

어색함은 내가 스스로를 그런 자격이 없음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아니던가?

자존감의 낮음..

자존심만 높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아이 사람'이 되는 것 조차

나 혼자서는 안된다.

손 벌리고 쭈그려 앉아 나를 기쁜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전제되지 않고는 가능치 않은 '망상'이란 이야기다.

홀로의 '도 닦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들어와 아이를 바라보시며

그 마음을 내게 남겨 놓으시고 가셨다.

그리고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나의 영혼을 깨닫게 하실 기회를 주시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깨달을 자,

우연히라도 이 긴글을 가슴을 열고 들여다 볼 자들의

행운을 위하여

글을 쓰게 하신다.

 

감사하신 분이시다.

내하나님은...

 

 

주님.

놀라우신 하나님.

아이의 경험을 통하여 어제 오후 병원에서의 예배시간도

은혜롭게 되었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그러셨었습니다.

지금보니..

 그리고 오늘다시 말씀으로 이렇게 깨닫게 하십니다.

또 하나의 문제도 풀어주시고요.

아..

주님.

내 살아계시는 주님은

내 일생하나도 버림이 없이 속속들이 다 엵어서

절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군요.

오늘의 주신 말씀 붙잡고 다시 하루 살아갑니다.

내일 일은 정말 모릅니다.

보험도, 연금도 , 장래도 .. 다 주님 앞에내려 놓습니다.

주여.

주님이 주신 느낌으로 일본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기쁨으로 , 재미로 하고 있습니다.

어찌 인도하실지 기대합니다.

이전에 그랬듯, 또 인도하실 것만 기대하며 그리하고 있습니다.

지혜 주시고방향만 주소서.

주여.

또 간절히 더욱 기대할 것은

제 앞의 고난과 환란을 '타인'의원인으로 돌리지 않게 하시고  

모두 예수님의 허락하신 내 십자가 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주여.

순간 순간 저를 붙드시어

이제는 오히려 곤란과 환란을 투사하지 않고

제 아이사람의 발전을 위함으로 바꾸게 하소서.

그리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간절히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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