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용서 용서 용서[마18:21-35] 본문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십수년을 글을 올리다 보니
이전과 동일한 부분을 묵상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 부분을 올리며
과연 이전의 생각과 내가 무엇이 달라졌으며
그때 임하시던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가
비교해보는 게
재미있기도
그대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그 상황과 하나님의 하시었음이 절절히도 느껴지는게
놀랍기도 하다.
그리고 동일한 부분 묵상을 하면서도
어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말씀으로,
동일한 말씀도 다른 반응으로 내게 다가와짐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하심을 또 한번 느끼게도 한다.
그런데 이 부분.
계속 '용서'에 대한게
2010년도 부터 똑같은 주제로 말씀하신다.
그것..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부분을 말씀하시나 보다 .
하지만... 내 내부의 반응이 조금은 옅어진게
나름 이전보다는 나아진 것을 느끼게도 하시고...
하여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으로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 오늘 읽은 에베소서에 나왔다 ^^*)
내 깊은 곳을
매일 하나하나 들추어가시며
깊이 깊이 잠적해 있는 어두운 부분...을 잘라내시길 바라심이시다.
이리.. 성령으로 '검' 역할을 할 테니
잘라내거라..시며 말씀이다.
용서에 대한 것이다.
이제는 당위성, 심리적 이유, 그렇지 않을 시의 현재적 미래적 결과와 더불어
그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심려하시는 문제인지
용서와 관계와 원죄와 십자가와 천국의 관계를
너무나도 극명히 알면서도 불구하고
내 속 깊은 곳.. 어디에선가는
아직도 붙들고 있는
그 무엇.. 해결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신가 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나이가 많이 들었으며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첫사랑과
그로 인한 강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인도의 시간.. 말이다.
그러함에도
되풀이 되풀이 하시며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심은
오늘은 더 '용서 '부분에 깊이 마주하라시는가 보다 .
새로오신 2과장 께서
피정 (카톨릭 이시다.) 다녀오셨다면서
좋아하는 책이라고 S 님이 쓰신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이란 책을 선물하신다.
용서가 주 주제다.
내 문제의 해결할 부분이 '용서'인것을 어찌 아시누..ㅎ
그리고는 계속 레마에 대한 것이 '용서'시다.
그래.
풀어야 한다 .
내가 묶은 부분 만 남았으니 (묶인 것.. 돌아보아도 주께서 많이 풀어 주셨다. )
내가 풀어야 한다.
이유가 필요없다 .
오래 전.. 많은 책을 읽어가면서 익숙히 알던 것을
그 선물받은 책에서 '용서 못하는 이유.. 용서하는 법.. 당위성... ' 죽 써 놓았지만
너무도 잘알던 그 책을 통해서라도
주께서
다시 한번 내가 풀어야할 당위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권유하시는 가 보다 .
그렇다면
내가 이제..
이전보다 10여년 가까이 더 성장되어질 시간이 있었으니 ( 이구절 첫묵상 시간 부터라도.ㅎ.)
어찌 '용서'에 대하여 더 다가갈 까.. ?
무조건이다.
이유가 필요없다.
그냥이다.
대상... ?
난 안다.
은근히 내 안에서 아직도 아프게 문질러지는 속상함의 정체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용서 못하는 그 것들이다.
그렇게 하는 그것들 ^^;; 말이다.
그냥... 하나님께서
여러 정황으로
말씀으로
과거와 비교해보아도..
'용서'하라시니
어떠한 이유나 조건이나.. 부적절한 상황이 예상됨도 필요없다.
그냥 풀고, 그냥 용서하고 , 그냥 가만히 기다릴 것을 결심한다.
주님이 그러시라시니 그럴 것이다 .
아..
그 안에 내 스스로 내 자신에 대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리라.
나.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실망.. 이 없지 않아 많지 않았을까?
그런 미련한 나..
내 기준에 너무나 합당치 못하게 대응하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용서해야 할 수도 있다 .
가만히 들여다 보고
가만히 바라 보자.
내 스스로 도 용서해야 할지..
주님께 의거하고
주님 말씀이 계시니
나 그래보자.
부족하고 어쩔 수 없는 나를
그냥 용서하고
그냥 받아 들이고
그 부족한 나를 십자가 지듯 가만히 받아 들여보자.
그 무게를 감당해 보자.
주 말씀이 있으시니 말이다.
주님.
오늘도 용서에 대하여
며칠째 계속 말씀하십니다.
무조건 용서하렵니다.
결심합니다.
이유.. 불문.
아무 것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러겠습니다.
주여.
겁나는 것.
또 잊어 버리고 '확'.. 하는 것. 입니다.
그것마져 주께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성령의 검으로 잘라 버려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모든 원치 않는
주께서 싫어하시는 죄악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신 십자가에 같이 달겠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1. (2010.02.22 묵상 분) 불쌍히 여길 나 불쌍히 여길 그들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개역개정: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
용서하는 것.
용서하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이 해결 되어야 한다.
미움.
사람의 특질에 따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미움의 성격에 따라
어떤 경우는 쉽게
어떤 경우는 완전히 잊혀질 수는 있게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비슷한 경우가 되풀이 될 때는
다시 올라올 때가 많다.
그런 경우 용서 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질 때가 없지 않아 있다.
누가 알지 못해도
스스로 '이런 정도 밖에 내가 못하는 데'라는 자책감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더 무거운 짐으로 지워질 수 밖에 없다.
미움이 오래된 경우.
진득진득한 콜타르처럼 들러 붙어 온전히 벗어내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겉으로는 무표정하고 반응하지 않는 등
외견상의 용서와 더불어
자신은 용서를 했단 착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에너지로 변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변하여
우울한 마음등으로 생길 수 있다.
오늘 빚 탕감 받은 하인.
그 하인은 오히려 솔직한 편이다.
그러기에 그가 깨닫고 돌이킨 다면,
즉 회개만 한다면
어쩌면 쉽게 그 미움을 벗어버릴 수 있고
주님 앞에 칭찬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다.
그 하인을 묵상함으로 쉽게
용서의 본질에 대하여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더 복잡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즉 상처나 더욱 깊은 꼬여진 관계에 바탕을 둔
용서하지 못함은 조금 뒤로 미루어 보자.
하인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일단은 자신의 입장을 모른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자신은 죄인이다.
빚을 잔뜩 진 죄인이고
또 그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그 주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감성적 장애를 가진 자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것을 회개하고
고침을 받을 노력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
그것이 용서를 못하는
그가 회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를 못하는 자.
용서를 못하는 것은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드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주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다.
'나를 참으소서.'
이리 하인은 주인님의 징벌을 두려워 했으면서도
주님의 징벌을 해소하는 길인
용서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하지도
해결할 의지도 보이지 못했다.
용서.
그렇다면
그가 못하던 이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
일단 , 우리는 그 분이 우리를 불쌍히,
실은 가련히 여기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깨닫고 '마음' 깊숙이 이해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너무나도 큰 빚진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가 없었다면 어찌했을지 모를 깊은 죄를
짓고 살던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었던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 십자가 앞에 가리는 것없이 나와야 한다.
철저히 낮아져야 한다.
그리고는 그 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난, 그런 자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마음 깊숙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용서받은 자로서
남을 용서할 당위성이 있음을 깊이 각인해야 한다.
내가 어찌 감히 누구를 용서하지 못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계속 '마음' 으로부터 ..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불쌍히 여기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난 불쌍한 자 맞다.
난 주님께 긍휼함을 받았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철저히 속죄함을 얻어 구원받은 존재임을 감사해야 한다.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으면
그 분은 견디시지 못하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셨단 말인가?
그것을 영혼 깊숙이 깨닫지 못한다면
아니
그것을 영혼 깊숙이 깨달을 때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을 수 밖에 없다.
혼자서는 안된다.
주님 십자가 앞에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길 기도해야 한다.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진득한 미움 조차
십자가
그 불쌍히 여기시던 사랑의 결실 앞에 놓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직도 슬금슬금 미움이 올라오려는 자들이 있다.
용서 안될 것 만 같은 '불뚝'함이 올라 올 때가 있다.
하지만,
주님의 그 사랑
그 분의 나를 그렇게 나 불쌍히 여기셨음을 생각하면
난, 정말 그 분이 아니었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을 가치조차 없던
추악한 인간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제와 용서하지 못하고
불쌍히 여기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만 같다.
용서.
아직도 쉽지 않은 이야기일 때가 있고
용서했다 생각하면 자꾸만 부질없이
'욱'하고 튀어나오는 미움의 끈은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난 십자가 앞에 가져가길 원한다.
그 분의 그 사랑이 끝없으셨었음을 있지 않는다면
난 가능할 것도 같다.
자주 내 영혼에 느리워지는
내 평강의 흔적들이 그걸 말해준다.
적용
1. 매일 아침 큐티 한다.
아침에도 출근하여 참가했다.
은혜가 되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들과 같이 한다는 사실 만으로 기뻤다.
내일도 일찍 일어 나겠다.
2. 성경 여덟장 읽겠다.
금식 후 쉬었다.
나름 , 좌절을 겪었다.
말씀 가까이 함을 멈춤은 고통이다.
더 열심히 묵상하고 읽겠다.
3. 용서한다.
누구든 용서한다.
십자가 묵상함으로 그러겠다.
4. 난 용서받은 자다.
난 회개할 것이 태산 같이 많은 자다.
그러함에도 날 불쌍히 여기셨다.
그 분이 내 죄를 다 잊겠다 하신다.
그 분이 날 불쌍히 여기셨다.
그 감사함을 묵상하자.
5. 회개한다 .
기도
주님.
용서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인식하길 원합니다.
난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임이 감동스럽습니다.
그 감동으로
내 미움의 대상인 자들을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모든 죄도 용서하셨는데
나도 스스로 힘들어 하던 죄를 용서 받았는데
그것을 불쌍히 여김을 받았는데
제가 누굴 불쌍히 여기지 못할 게 있단 말입니까?
주여.
제 마음의 흐름을 붙들어 주소서.
주여.
저로 더욱 십자가의 그 사랑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여.
그 십자가가 사랑 덩어리 였음을 기억나게 하소서.
그 십자가에 어린 예수님의 피눈물 떠오르게 하소서.
그래서 나도 남을 불쌍히 여기게 하소서.
그들의 모든 잘못된 점을 용서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빕니다.
아멘
-------------- 2. (2014.03.12 묵상 분)마음으로 부터 용서함
인생은 때로는
굴 속을 지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한참을 달려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
변화없는 다람쥐 바퀴 같은
좌절은
현상에 집중할 때 온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함이 길어질 때 온다
말씀을 근거로
마음으로 부터의 용서를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의 페달을
다시 깊이 밟아야 한다
이제
저 밝은 빛의 통로
천국이
내마음에 임하게 됨을
곧 알게 되리라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주께서
내 엄청난 죄로 인한
세상과 주위에 그리고 내 자신에 끼친 그 빚을
주님께서 탕감해 주시려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거늘...
그것을 잘알면서도
이 미련한 나는
일상에서 '수도없이 ' 실패하고 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들,
나와 너무도 닮은 미련한 짓을 한다고 생각되는 자들에 대하여
여지없이 오히려 더 분노를 발하고
정죄하고 차갑게 대하고 있다.
어이없이도...
마땅히도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분의 그 위대하신 사랑을 체험하고 알면
당연히도 그리해야함에도
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을까?
불쌍히 여기어야 하고
불쌍히 여기어야 함을 알며
불쌍히 여길 생각도 있는데
왜 나는 순간 만 되면 자꾸만
저 만달란트 빚진 자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야 말던가?
그들을 불쌍히 여김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불쌍히 여기지 못함은
불쌍히 여기지 못하게 하는 어떤 '존재'가 있던가,
불쌍히 여기려던 마음을 가로막는 어떤 다른 깊은 생각의 가로막음이 있던가
불쌍히 여기려 함이 '마음'까지 내려오지 못한 머리 속의 생각일 뿐이라서
마음이라 여겨지는 오랜 생각의 정해진 틀이
너무나 강하여
불쌍에 대한 논리적 근거,
즉
'하나님이 나를 용서 하셨다
예수께서 그러시기 위하여 육화되셔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십자가 고난을 모조리 감내하실 만큼 날 용서하셨다.
그토록 날 사랑하신다.'는
영적인 이해 뿐 아니라
내가 용서해야 내가 더 편하다...'
' 용서해야 풀린다' ...등 세상의 심리적 이유를 앎에도 불구하고
순간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있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알면서도 못하게 만드는가?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보라,
'마음으로 부터' 형제를 용서하라시는 말씀처럼
왜 마음 깊숙이 용서를 못하는가?
난... 나의 용서에 대한 정말 필요함을 아는 정도에도 불구하고
(정말 절실히 필요함을 안다 )
용서를 일상에서 그리도 베풀지 못하는가?
솔직히 이전보다는 너무 많은 부분 '용서'로서
끈을 풀고 막힌 것 풀었다 생각하지만
아직도 내가 느끼는 것만큼
더 원활히 회복되어 있지 못함을 보는가?
아직도 내 안에서 불뚝 거리는 '서운함', '미움'들이 있는가?
그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함이다.
마음으로 용서하려 노력을 하지 않았던가?
내가 모르던가?
그런데 왜 '용서'는 그리도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더냐?
위의 논리를 근거로
난 나를 강하게 가로막는 다른 어떤 생각의 웅어리짐이 있음이다.
그것은 어쩌면 '용서'를 결심하고 실행하려 하지만 막아섬이다.
영적 전쟁.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서 용서하려는 것을 막아서는
오래된 생각의 막아섬.
거기에 내 연약한 마음의 동조.
원망과 터뜨림의 순간적 쾌락을 잊지 못하는 연약함.
순간, 용서하여야 하는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지혜의 부족함.
'너무 오래된 행동 양태의 굳어짐.
용서는 '선택'임을 알고
반드시 해야함을 알지만
때로 넘어지고 좌절하는 틈을 타 다시무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던가?
그토록 오랫동안 말씀을 붙들고 이해했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이 용서 못하는 마음 한가닥과
그로 인한 거침을 어찌해결하여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들여다 보자
너무나 익숙한 '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 거 같다.
똑같은 말씀.
똑같은 소리..
난.. 그게 내 착각 같은 거 같아 그런 되풀이를 싫어한다.
또 오래된 '잔소리에 대한 알러지'도 있고...^^;
하지만, 그럴리 없음을 난 잘 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똑같은 소리를 하실 때는 하실 이유가 있음도 잘안다.
그래서 다시 들여다 본다.
분명히 '용서'에 대한 말씀이시다.
이전에는 깨우치게 하신 뜻이시라면
어쩜 이번은 '마음에 까지 용서'하는 노력을 하라는 의미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가능한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올해 들어서 묵상을 통해 조금 다른 느낌을 주시고 계시다.
영적 성장도 .
( 요단강 넘어서 이방민족을 그냥 둔 할례,
그리고 동굴에 가두어논 이방왕 다섯. ......)
며칠 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히 꿰뚫어 주신 바가 있다.
' 결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선택과 결심.
아주 중요하다.
정말 중요한 영적원리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시다.
이제 '내려놓음'을 진정으로 할 때란 이야기시다.
영적으로 어릴 때 이해함이 어렵다.
이해해도 자기 힘으로 이겨내기 어렵기에
깨닫을 바 말씀을 통하신 성령의 은혜를
머리에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게 마음까지 내려와 오기위하여서는
아..
영적인 융화가 되기 위하여서는 다른 결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기도'를 늘려야 한다.
내가 필요한 것을 노력함이 커지면 자아만 커진다.
자아가 튼튼해진 후 다시 내려 놓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제자'들이 3년 훈련과 더불어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기 까지 예수 승천후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 시기는 그들은 아무것도 못하였다.
할 수 없었다.
오직 다락방에 앉아서 기도만 할 뿐이었다.
즉,
기도는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전과는 달랐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의 말씀과 시키시는 대로 따르는 훈련과
부족한 것 예수님의 양육으로 버티어 나갔고
나름 결단의 훈련을 해왔으나
이제 그 기도가 더 처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 승천 후 강하게 임하신 '성령'의 감전으로 의하여
그들은 더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의미다.
오늘 '용서'에 대하여
마음까지 용서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기도를 늘임'이다.
이제 '용서'의 당위성을 너무도 잘알고
용서를 마음까지 하지 못하는 나의 미련하고 어이없고 한계에 부닥친 실체를 깨달았기에
더 이상의 똑같은 몸부림 보다는
기도의 분량을 늘리라는 이야기다.
아니다.
분량 뿐 아니라...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전까지는 그냥 스치듯 지나는 '하나님 아시지요..' 정도,
'하나님 난 안되니 도와주세요.. ' 정도의
세상의 문제와 뒤죽박죽되는 기도로 그침이 아니고
'마음 깊은 용서'라는 타이틀을 오늘 주셨으니
그 것을 가지고 더욱 '기도'로 깊이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당연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리 하실 것을 믿어가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용서'가
내 믿음의 수준을 꾸미는 기도 제목정도로 그침이 아니고
절절하게 기도하여
내 심성이 바뀌는 역사를 기대하며,
믿어질것을 느끼며 기도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하라 하실 때는
이루어 주실 것을 전제로 하심이
이제는 믿어진다.
당연하겠지만
용서가 진정 마음 깊이 이루어진다면
우선 내안에 '평화'가 깃든다.
내 주위의 공기가 편해지고
나와 같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관계속의 사람들이 편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더 부드럽게 느낄 것이고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더..
삶은 훨씬 더 편해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래서 더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러한 내 영적인 경험의 확대는
용서가 너무도 당연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 앎에 미치지 못하는 심적 고난을 가지고
세상을 지금도 곤혹스럽게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영광드리는 삶의 방법을 모르는
수없이 많은 인생의 곤란을 겪는 분들에게
또다른 길이 될 수 잇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이 인생의 버거운 시간 동안
의미있는 존재로서의 인생을 살게하는
'신앙'의 의미가 될 것이고
그것은 또 기독교가 작금에 걷고 있는
세상으로 부터의 질타로부터 벗어나는
그래서 ,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더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길어졌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고 또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도 기도원에 올랐다.
이전과는 다르다.
갈 바를 몰라 헤메다가 찾는 발걸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알게 해주신 인생의 의미는 오직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것 뿐임을
점점 더 확신있게 깨달아 아는자의 발걸음이었다.
홀로 기도원 휴계실 구석에
이어폰을 끼고 찬양녹음을 틀어 놓고
깊이 깊이 주님께 영광 돌리고 왔다.
그럴 때 난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
...
그렇다.
하나님은 '기도'를 더욱 기다리신다.
오늘은 '마음 깊이 용서하기 위한 기도' 를 하여야 할 모양이다.
주님.
제 부족함을 아시는 하나님.
저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하여
내 안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여
그들과 조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제게 주님을 뵐 때마다 죄송한 마음으로 뵙게 하였습니다.
어제는 저를 바라보시는
제가 아기를 바라보던 그 눈을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주님과의 화평이 더욱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로 그랬습니다.
주님.
'오늘은 제가 타인을 향해 바라보는 눈길을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었스니다.
주여.
주님은 제게 그런 만달란트의 빚을 없다 하시면서
제게 그런 따스한 기쁨을 주셨음에도
전 그들을 따스하긴 커녕 차가운 정죄로 단죄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그게 제 안에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차가운 또아리가 있음입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밝힙니다. '
제 안에 그 또아리를 풀게 하시고 말리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그것.
그래서 참 오랫동안 노력했음에도 순간순간 다시 감기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로하여 제 믿음의 약함을 걱정하였었으나
그것은 기도가 부족하였음입니다.
때가 덜된 자의 부족한 기도.
주여.
이제 주께서 '때가 된 때의 기도로서 풀어야 할 ' 마음의 또아리,
원망을 풀길 권하십니다.
주여.
그리하렵니다.
당연한 이유를 깨달았고
말씀으로 힘을 주실것을 느꼈고
기도해야할 당위성을 알았으니
주여... 기도하렵니다.
주여.
도우소서.
제안에 기도로 .. 묶였던 원망, 악한 생각들이 터져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깨닫고 용서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저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고
무조건 용서하는 자 되게 하소서
주님이 하신대로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이 하셨으니 조건없이 그리하게 하소서.
귀하고 놀라우신 용서와 사랑의 정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용서하는 제가 될 줄 믿사오며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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