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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풀자[마18:11-20] 본문

신약 QT

이제 풀자[마18:11-20]

주하인 2019. 3. 20. 08:42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너무도 잘 아는 구절.

그러나 너무도 하기 힘든 것.


맨 것.

끈으로 묶듯, 돌돌 동여맨 것.

그 상태로 평생을 살아 오고 들 있다.

누구도 말이다.

 인과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는

이 부족한 인생들.. 원죄적 인간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이 엮이고 엮게 되어 있다.

그게 자신의 성향, 의미있는 타인의 그러함 정도, 상황.........여러가지가 복합되어

더 묶이거나 덜 묶이고

또 묶임이 같더라도 외부적 표출이 되거나 내부적 억압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하나 묶이고 묶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느끼고 풀려는 수도 없는 많은 시도들이

이 지구 땅의 역사 내내 이루어졌다.

철학으로...

문학으로 ..

종교..로..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었다.

결국, 수미산보다 많은 죄로 고민하며 죽어가는 ... ^^;; .. 그런 일들만이 벌어지고

그러나. 그 마져 그러함에 대한 관심조차 없던

불쌍한 대부분의 민초들은

'술'과 '욕정의 탐닉'으로 그 를 대치하기 위한

의미없는 되풀이 만 되풀이하며

이 땅, 이 시간들을

오염시키고

또 오염시키고

또 오염시키며

죽어갔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사순절'의 고난을 겪으시며

이제 수천년전 그 날 이후 ..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후

우리는 매임에 매이지 않아도 되고

묶임을 풀어가도 될

풀어갈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생긴 것이다.


사단의 궤계..

인생의 사슬, ,... 로 부터

우리는 과감히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묶여 두손 두발 묶인 듯

옴추리고 쪼여지는 영혼이 아닌

자유로운 자가 될 개연성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난.........

그런 나는

지금

온전히 풀려 있는가?

묶임..

더 이상 안 묶던가?


 아직 무거운 ........

답답한 느낌이 남아 있음..

아직도 슬그머니 내 자유로운 마음을 뚫고

살금살금 튀쳐 나오려 용틀임하려는 이 존재들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온전한 성화.

주님 예수님 같은 순백의 영혼

사도 바울이나

우리를 앞서 나가시며 모본을 보이신 성인들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완전한 '해방'.. 완전한 풀림이 되지 않아서는 아닐까?

 그게...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을

그냥 두지 않으려는 존재들과의

영적전쟁 탓이고.........


그렇다면..

내 .. 영적 성화를 이루는 게..

이 땅에서 궁극적 목표라면........

오늘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던가?


 너무도 당연한 이구절.

너무도 많이 들어 이골이 난 이 구절이 새삼 내게 의미를 갖는

오늘의 레마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껏.. 난.. 주님의 역사, 십자가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믿고

피동적으로 만 이끌려 왔다면

(아.. 그게 내게는 너무도 귀했다. ..의지박약한 나를.. 이끌어 주신 내 타력의 하나님 !!)

이제는 더욱 적극적으로 '풀' 결심을 해야 한 다는 것이다.


 묶인 것이 아니다.

그동안은 의미있는 타인들 (^^;;) 에 의하여 묶여 왓던 부분이 해결되는

피동적 상태였다면(오직 은혜로'.. )

이제는 '묶은 내 잘못' 부분에 대하여 결심해야한다.

물론, 이 결심과 선택에 도우시는 분은

역시 성령 하나님이시다.

능동이지만 피동의 능동이다.

선택하면 기뻐하신다.

깨닫고 선택하면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모니..

그 영적 하모니..

하나님과 나의 손잡고 나가는 과정을

진정으로 주님은 기뻐하실게다.

코람데오.. 하나님.


오늘 내게 바라심은

더 이상은

'묶었던 ' 그 분들에 대한

그 분이 연상되게 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투사'의

미련하고 엉터리의 반응이 아니고

그들을 이유로 더 묶어 간 ..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고 묶어 버려 칭칭 동여맨

그 부분을 인식해야 한다.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아이들이

그냥 그리고 나서 툭툭 털어버리고 웃어버리듯..

그리 되어야 한다.

주님이 도우실 게다.

그래야 천국가서도 풀린 상태로 영생을 누리지 않겠는가?



주님.

묶임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묶이게 된 것 보다

더 큰 묶음으로

스스로를 묶어간게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주여.

그래서 풀길 선택합니다.

그 선택에

주님이여

갖은 이유로 하지못하게 막아설

모든 영적 방해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주님 예수 십자가로 끊어주시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 주시어

주님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내 주여.

 예수 십자가를 같이 지는 마음으로

풀음에 동참하려 하오니

그 선택..

지혜로 허락하시고

강력한 은혜로 잡으시사

성장된 영혼으로 거듭한번 더 점핑하게 하소서.


감사하오며

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내 주예수 그리스도의 그거룩하시고 신실하시며

사랑많으신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 ( 2014.03.11 묵상 분)


마태복음 18장


11 (없 음)
 왜 없을까?

 왜 없게 하셨을까?

분실된 구절이지만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의 능력이면 가능할 것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거나 보일 필요가 없으셨거나

보이지 않으심으로 더욱 우리에게 유익이 되었을 것이 맞으리.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난 어땠을까?

어쩌면 귀찮아서 안찾았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왜인가?

배불러서 일까?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해서일까?

아깝지 않을까?

 

더 생각해본다.

아마도 내가 그 시절, 그 어려움의 시간 속에 있다면

안타까워 했을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니... 실은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나.

잃어버린 어린 양.

아까와 하지 않는 자이던가?

난..

오랜 시간 감정적 힘듦을 겪으면서 커왔던 터,

갈등을 지독히도 싫어하며

갈등을 유발될 것은 가능하면 피하려 하지만

아직도 갈등에 자극되면 쉽게 '분'이 자극 받는다. ^^;

그래서 '잃은 양'의 자극을 꽁꽁 가슴에 묻어두고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못 느끼려 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위의 첫 질문에 양 안찾고 그냥 갈지도 모른단 답을 했다.

 

 그러나, 그런가?

난.. 마음이 정말 약하다.

겉보기엔 누가봐도 강하고 단단해보이지만 눈물이 많고 여린 자다.

감성이 풍부하다.

여인처럼..ㅎ

그것은 위의 가장(假裝)이란 이야기다.

그것이 나에게 스스로도 그렇게 작용을 하여

난.. 그런 줄 알았었다.

그러기에 그러한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망각'을 많이 해왔다.

'건망증'....

중간정도의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아마..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방어막일지 모른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내 생각'에도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잃어버린 한마리를 찾으면 진정 기뻐할 것만 같다.

그것.

내가 안다.

예수님 믿는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면서

내 눈물이 많은 것과

잃어버린 양을 진정으로 안타까워 할 자임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런데, 말씀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보다는

'잃어버리지 않기'로 중심이동을 하는 것 같다.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시지 않는가?

잃어버리고 후회하고 아파하는 것을 안다면

잃어버리기 전에 주의 해야 한다.

더.. 더.. 주의해야 한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를 위하여 인내해야 한다.

그들의 잘못을 '권고'로써 권면해야 한다.

판단하고 인격을 정죄하여 따지고 혼내는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어디 옳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인가?

믿는 자인 우리 기독교인, 그중에서도  죄의 행동 덩어리가 주하인인 것을...

그러한 그들에게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보기보다는 그들 뒤에 있는 ' 사단'의 궤계와

그로 인하여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원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니, 그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그들의 죄된 행동을 권면하고 도와야 한다.

그러한 마음은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잃은 양 만들지 않기'로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내마음에서 내려 놓아야 한다. '

그 이상은 '하나님의 하실 영역'이다.

내가 할 일은 잃지 않기 위한 사랑의 마음이고

'권면의 지혜'를 구함이고

결국 그 마져 내려 놓음이 필요하다.

 

 

 

나.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

차가운 면이 많음을 느낀다.

사실이다.

진실을 보고 중심을 보는 능력은 좀 있으나

나도 모르게 잃은 양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집나간 양에 대한 '분노'의 시선이 더 많다.

안타깝고 아까와 하기보다

내 아픔을 묻기 위하여 망각해버리고

그러함을 위하여 다른 생각으로 차갑게 포장해버리는 것도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신다.

'사랑'을 말씀하시고

'믿음'을 말씀하신다.

나에겐 믿음이나 지혜의 면에서는 아니나

사랑 부분이 적지 않을까?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것을 말씀하신다.

나.

무슨 이야기신지 안다.

더이상은 주님과 나만이 아는 ..

그 부분을 말씀하시는 듯 하다.

기도하자.

 

 

주님.

놀라우신 하나님.

오늘도 마음에 부담이 될 부분을 정리하시려 하는 듯 합니다.

주여.

말씀을 붙들고 더 묵상하렵니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하지만

복잡한 머리가 꼬이기 시작할 때

주님은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셔

가만히 지금까지 지켜보셨다가

이제 다시 조용히 제게 권면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찾기와

양 잃어버리지 않기.

주님.

귀하신 내 하나님.

제게 말씀하신 뜻을 압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뜻으로 밀려

제 잃은 양 찾기를 감당하게 하시고

양 잃어버리지 않는 행동의 조심을 권하오시니

주여.

그리하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우실 줄 믿으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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