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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는 (레21:16-22:9 )

주하인 2010. 11. 22. 07:03

내가

단지 코스모스로만 보이는가

 

내가

단지 흔들리는

작은 꽃으로만 보이는가

 

맞다

그러나 아니다

 

꽃 임은 맞고

코스모스 임은 맞지만

가녀리지만은 않다

작지 만도 않다

 

이 땅위에서 흔들리지만

온 우주의 생기를

내 온 몸으로 맞아 들이는 자다

 

이 곳에서 붙들려 있지만

창조주의 품 안에 있는 자다

 

실은, 나는 (레21:16-22:9 )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 말씀하신다.

아론, 제사장인 그에게 이렇게 전하라 하신다.

' 결함이 있는 자는 제사 지내러 오지 마라'

 

 왕같은 제사장인 구원 받은 우리들.

그 중에서 '아론'같은 대 제사장이길 바라는 더욱 선택받은 '나', '우리'...

그들에게 결함있는 자는 안된다.. 하시면

기도하러 가기도 어려웁지 않겠는가? ^^;;

 아침에 왜 이런 어려운 말씀을 허락하셨던가?

 

 
  제 22 장 ( Chapter 22, Leviticus )
7.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 후에 성물을 먹을 것이라 이는 자기의 응식이 됨이니라
9.  그들은 나의 명을 지킬 것이라 그것을 욕되게 하면 그로 인하여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죽을까 하노라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그러면서 계속 이러이러한 자들은 '안된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에 '해 질 때에 정하여 질 것이라' 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시는 하나님'이라 신다.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모든 것이 좋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좋은 것은

나날이 마음의 지평이 넓어지고 평강이 내 속을 채워가는 과정임을 알아가게 되어간다는 것이며

날로 날로 말씀이 사실임이 깨달아지게 되며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던 끝은 '영생'임이 믿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은 어렵게 하지만 느낌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 눈물이 날 정도로 촉촉한 기쁨이 날 채워간다. '는 사실이고

그러기에 이 전의 메마름이나 흔들림 두려움, 불안..........은

다시 천금의 유혹을 조건으로 돌아가라 해도 싫다.

수천억의 재물이나

몸을 달케 만드는 유혹이나

갈채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도

지금 얻어가고 있는 '생명'의 감각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지옥을 예약 받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눈돌리기도 싫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예배가 통쾌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부담이 적어져 가는 것이고

말씀을 묵상함이 습관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다.

참 '의지도 굳다'고..

의지는 어렵고 재미없는 것을 그 사람의 특질로 참아가는 것이고

자기 만족감 이외의 생명력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나.

전혀 그런 의지는 부족한 자다.

그냥 말씀을 떨어짐이 무서워서 그렇게 지금껏 묵상을 매일 일기 쓰듯

열심히 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 나.

예수님 영접하던 첫사랑이 너무 뜨거워 교회는 나가고 설교는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냉랭함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의 과정은

많은 내적 투쟁과 어려움에 봉착해야 했었다.

 그 어려움 중의 큰 어려움이 이런 것이었다.

죄책감이 많고, 자격이 없는 것 같은 데 교회에 나가 앉아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그런 나에게 '도덕적 결함'이 없는 온전한 자가 되어야 만 사랑 받을 것 같은..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나랑은 먼 얘기 같은

'은혜'와 '갈등' 사이의 괴리가 그것이다.

 

 오늘 말씀이 그렇다.

'제사장' , 그것도 온전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결점이 있는 자는 안된다...

성물도 함부로 먹지마라... 라 하시지 않는가?
무섭다.

 

 어려움을 가지고 성장한 자들.

그들은 아픔이 있는 반면 ,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할 은혜의 깊이가 깊어지는

양가적 특성이 있다.

모태 신앙인이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이 있는 대신

그들은 아픔이 있던 자, 상처 있는 자들의

그 깊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기에는 일반적으로 기회가 적은게 사실이다.

이런 장단점의 골고른 배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체험하고 나서도

오늘 아침 말씀 같은 소리가 만일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면

아니.. 십계명 이야기에서 만도 .. .걸리는 부분이 참으로 많아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맞다.

부모를 공경하고 온전하게 바뀌지 않고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상처가 너무도 커서 나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던가?

 

 이제야 돌아보면

난 많은 부분 '회복'이 되었다.

과정을 돌아보면 매일 매일이 치열한 '싸움'이 었다.

내적인 전쟁을 거쳐가며 이제 승리의 고지가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을 여기까지 버티어 오게 하는 것은

'은혜의 감동이 너무나도 컸었음'이다.

고통과 고난과 갈등과 갈증이 커져감에 따라 경험되는

은혜의 기쁨은 더욱 더 놀랍고

그 흔들림에 비례하여 내부에서 들어차는 하나님의 든든한 어루만지심이

날 움직이는 내 에너지의 본질이었다.

22장에서 나오는 말씀이 그 본질을 꿰뚫어 주신다.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렇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어려움도 시간이 지나야 해결된다.

어려움이 의미가 없으려면 그냥 사라지겠지만

주님은 그것을 시험으로 통과할 연단으로 남기셨기에

'해질 때까지 '  날 기다리시어 내가 당신의 평강을 체험하고 체험하여

그득이 내 영혼에 당신의 향기를 맡아가며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 살아

당신의 백보좌 앞까지 걸어오길 바라시는 것이시다.

그리고는 힘들어 질 때  그 후에 성물을 먹을 것이라  시며 위로의 축복도

베푸신다는 말씀이 아니시던가?

 내 블로그.

내 삶.

그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맞다아 있다.

내 일상의 변화,

내 의식의 변화,

내 감동의 깊어짐,

..................

하나하나 다 맞지 않는가?

그 후에 주실 성물이 비록 여기까지만은 아닐 것이리라는

기대는 하고 있지만 .ㅎㅎ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때로는 아픈 상처에 견디기 힘든 잔인한 소리 같지만

그것은 내 탓일 뿐이었다.

( 요즈음 막나가는 '동성애', 폭력.......막장........모두 견디기 힘드니 날 이해하라........고 소리지르고

 맞장구 치는 지옥백성들의 논리일 뿐.

 회복은 아픔을 인내하고 수술 받을 결심을 해야 이루어진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이게 희망이다.

이게 말씀이 궁극적으로 살아계셔서 우리의 심령에 뿌리시는

강력한 '역동'이고 '동력'이다.

주님은 희망이시다.

주님은 축복이시다.

그 분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길 바라신다.

그래서 그런 아픔을 말씀하신다.

그 분은 아픔을 겪을 자들은 '거룩해야 할 제사장'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국한시키시는 것이시다.

아무에게나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이 이 부족한 상처 덩어리 주하인 같은

세상의 얼마 되지 않은 어리석지만 진실하려 몸부림치는 백성들은

인내해야 한다.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죽도록 그래야 한다.

이전은 필요가 없다.

이제가 필요하다.

죽을 때까지 그래야 한다.

그래서 거룩해 져야 한다.

거룩해지게 될 것이다.

거룩은 '생명력의 폭주'다.

늘 놀라운 성령의 폭주가 생수의 강처럼 배에서 흐르는 자들이다.

그 기쁨을 어찌 말하겠는가?

온 우주가

이 적은 육신의

이 작은 영혼을 폭팔시키며 대 융합을 일으켜 팽창 되는 것 아닐까?

 

감사하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게 사랑스럽다.

그런 내가 자랑스러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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