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앞 뒤가 깜깜할 때[시22:1-21] 본문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아.. 얼마나 힘드시면 이리 '내' 하나님을 두번씩이나 외칠까?
수천년 전의 고백이 실제화 해서 가슴에 공감이 이루어진다.
'내 하나님'
실제의 하나님을 , 실제로 체험한 자의 실제적 간구....가
묵상 시작 부터 가슴을 짖쳐 들려 한다.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까?
주님이 그러신 분이 아님을 너무도 잘아는 분의
그러한 고백은
그이의 사정이 얼마나 처절한 지 그대로 전해져 오지 않는가?
내 사정,
우리의 이러함 (코로나.......뿐인가?, 그것 없이도 인생은 버거움 뿐인데 ........더.. 더 더.. )을
그대로 읽어 버리시는
그 시절, 그 때의 시편기자의 어려움이
그대로 가슴에 온다.
아.. 주님.
내 하나님 , 내 하나님.
어쩌하여 나를..............................................................................ㅠ.ㅠ;;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리 고백한다.
'찬송, 거룩.........'
이게 어찌된일인가?
그의 상황이 갑자기 축복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아래에 계속 다시 이어지는 탄식으로 (가슴 아픈 절절한.. ) 보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수 있음으로 보아
이 고백은 '그의 의지적 고백' 아니면 ' 영적 감동'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
그의 신앙의 힘이기도 하고
평생을 통해 체험되어진 하나님의 살아계신 결과에 의한
기대와 훈련의 결과 일 듯하다.
유튜브에서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중 잠시 나오는 말씀이 기억난다.
주님은 실재다.
실재에서 나오는 고백........이
이 구절의 고백인 듯하여
반갑기도
그러함에도 이러한 고백을 하는
그를 통해 동감하게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흔적을 느끼게 하심이 참으로 반갑다 .
아...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연단들..
다시 살아가라면 죽기보다 싫은 내 인생.
그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음은
실재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셨던 흔적들을
난.. 놓치지 않아서 였다.
그래
하나님은
'주는 거룩하심' 이 맞으시다 .
그 어떤 상황에도 모두 뜻이 있으시며
그 어떤것이라도 다 주님이 허락하심이 맞으시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모태에서 나를 나오게 하시고
젖 먹을 때도 의지하게 하신 주님의 뜻 말이다.
이 어려운 시간,
이 고난의 시간에도
당연하게도 당연한 이러함을
고백할 수 있고
그 약함을
그 어려움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 분의 모든 뜻 가운데
내 마지막까지 모태에서 날 때부터 안으시고
태에서 날 때부터 지으신 것 처럼
또 의지할 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저한 믿음,
결국 승리
온전한 '선'의 우리가 되지 않을까?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러나,
현실의 암담함과
수도없이 되풀이 되는 이 인생의 연단들은
이 시편기자의
또 바뀌는 '신음의 고백'처럼
물.. 어그러진 뼈, 밀랍같은 마음
개...찔림...........등의 표현처럼
절대로 녹록치는 않음이다.
기도하는 자에게도
응답 후에도
허용되어진 고난, 연단, 시험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허락되어진 '십자가'이란 이야기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그러함에도
아니.. 그리하기에
우리가 나갈 길은 결국 하나다.
주님.
오직 주님에 매달림.
아니 더 매달림
시간이 갈수록 오직 더 주님만께만 매달림 말이다.
나.
아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게다.
또 아니다.
지금 껏 역사 이래 그 어느 누구도
살아온 자로 이 인생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고난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단 말이던가?
오직 예수다.
오직 십자가다 .
오직 하나님이시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에 매달리지 않고는
해결될 그 어느 길도 있을 수 없음이다.
금요 예배.
코로나 때문에 '영상'으로 드릴 수 박에 없지만
예배드리는 차림으로 마주하니
솔직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랑 차이가 없을 때가 있다.
엊그제 '금요예배'에서
고린도 전서 12:10
"모든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을 .. 기뻐..'라는 구절에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누구에게라도
허락되어진 남김,
고난, 약함이 주님의 허락하에 남겨진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고 하시며
그것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허락되어진 육체의 가시로
주님께 드려질 약함으로 받아 들여야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심이 가슴에 왔다
그렇다
그 약함.
그 고난...
그로 인하여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뼈가 삭고 그 뼈를 셀수 있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했으며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고생이 아직도 내 삶에 남아
날 괴롭게 함이나
그를 통하여 어쩌면 여기까지 오게 하심은
찬송을 드려야할 '옳은 약함, 귀한 고난, 감사한 가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오늘
시편기자의 절절한 고백으로
내 어려움의 시간들,
아직도 남아 있을 어쩌면 비슷한 고난의 시간이
더 예수님께 붙들려 고백할 때 다가올
영적 위안, 도움이 될 것 이란 생각이 들며
그분, 시편기자의 고백으로
내 마음이 위로되고
조금더 성장해갈 수 있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아침이다.
감사하다.
주여.
귀하신 주의날입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
서재 , 제 묵상터에 앉아
깊이 주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도록
이 시편기자의 마음을 공감하게 하시며
그를 통하여
내 마음, 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아
되풀이 되풀이 제 삶을 발거는 문제에 대하여
어쩌면 그러함으로 통해서
아프고 힘듦이 되풀이 되지만
조금 조금 더 성장해갈 기회가 될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주여.
혼란이 점차로 정리되어갑니다.
내 주여
주 안에서 하나하나 정화되어가는 듯합니다.
살아계신 내 주님.
감사하오며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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