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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뒤가 깜깜할 때[시22:1-21] 본문

구약 QT

앞 뒤가 깜깜할 때[시22:1-21]

주하인 2020. 5. 24. 10:15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아.. 얼마나 힘드시면 이리 '내' 하나님을 두번씩이나 외칠까?

수천년 전의 고백이 실제화 해서 가슴에 공감이 이루어진다.

'내 하나님'

실제의 하나님을 , 실제로 체험한 자의 실제적 간구....가

묵상 시작 부터 가슴을 짖쳐 들려 한다.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까?

주님이 그러신 분이 아님을 너무도 잘아는 분의

그러한 고백은

그이의 사정이 얼마나 처절한 지 그대로 전해져 오지 않는가?

 내 사정,

우리의 이러함 (코로나.......뿐인가?, 그것 없이도 인생은 버거움 뿐인데 ........더.. 더 더.. )을

그대로 읽어 버리시는

그 시절, 그 때의 시편기자의 어려움이

그대로 가슴에 온다.

 

 아.. 주님.

내 하나님 , 내 하나님.

어쩌하여 나를..............................................................................ㅠ.ㅠ;;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리 고백한다.

'찬송, 거룩.........'

이게 어찌된일인가?

그의 상황이 갑자기 축복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아래에 계속 다시 이어지는 탄식으로 (가슴 아픈 절절한.. ) 보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수 있음으로 보아

이 고백은 '그의 의지적 고백' 아니면 ' 영적 감동'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

그의 신앙의 힘이기도 하고

평생을 통해 체험되어진 하나님의 살아계신 결과에 의한

기대와 훈련의 결과 일 듯하다.

 

유튜브에서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중 잠시 나오는 말씀이 기억난다.

주님은 실재다.

실재에서 나오는 고백........이

이 구절의 고백인 듯하여

반갑기도

그러함에도 이러한 고백을 하는

그를 통해 동감하게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흔적을 느끼게 하심이 참으로 반갑다 .

 

아...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연단들..

다시 살아가라면 죽기보다 싫은 내 인생.

 

그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음은

실재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셨던 흔적들을

난.. 놓치지 않아서 였다.

 

 그래

하나님은

'주는 거룩하심' 이 맞으시다 .

그 어떤 상황에도 모두 뜻이 있으시며

그 어떤것이라도 다 주님이 허락하심이 맞으시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모태에서 나를 나오게 하시고

젖 먹을 때도 의지하게 하신 주님의 뜻 말이다.

 

이 어려운 시간,

이 고난의 시간에도

당연하게도 당연한 이러함을

고백할 수 있고

그 약함을

그 어려움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 분의 모든 뜻 가운데

내 마지막까지 모태에서 날 때부터 안으시고

태에서 날 때부터 지으신 것 처럼

또 의지할 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저한 믿음,

결국 승리

온전한 '선'의 우리가 되지 않을까?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러나,

현실의 암담함과

수도없이 되풀이 되는 이 인생의 연단들은

이 시편기자의

또 바뀌는 '신음의 고백'처럼

물.. 어그러진 뼈, 밀랍같은 마음

개...찔림...........등의 표현처럼

절대로 녹록치는 않음이다.

 기도하는 자에게도

응답 후에도

허용되어진 고난, 연단, 시험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허락되어진 '십자가'이란 이야기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그러함에도

아니.. 그리하기에

우리가 나갈 길은 결국 하나다.

 

주님.

오직 주님에 매달림.

아니 더 매달림

시간이 갈수록 오직 더 주님만께만 매달림 말이다.

 

 나.

아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게다.

또 아니다.

지금 껏 역사 이래 그 어느 누구도

살아온 자로 이 인생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고난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단 말이던가?

 

오직 예수다.

오직 십자가다 .

오직 하나님이시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에 매달리지 않고는

해결될 그 어느 길도 있을 수 없음이다.

 

 금요 예배.

코로나 때문에 '영상'으로 드릴 수 박에 없지만

예배드리는 차림으로 마주하니

솔직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랑 차이가 없을 때가 있다.

 

엊그제 '금요예배'에서

고린도 전서 12:10

"모든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을 .. 기뻐..'라는 구절에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누구에게라도

허락되어진 남김,

고난, 약함이 주님의 허락하에 남겨진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고 하시며

그것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허락되어진 육체의 가시로

주님께 드려질 약함으로 받아 들여야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심이 가슴에 왔다

 

그렇다

그 약함.

그 고난...

그로 인하여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뼈가 삭고 그 뼈를 셀수 있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했으며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고생이 아직도 내 삶에 남아

날 괴롭게 함이나

그를 통하여 어쩌면 여기까지 오게 하심은

찬송을 드려야할 '옳은 약함, 귀한 고난, 감사한 가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오늘

시편기자의 절절한 고백으로

내 어려움의 시간들,

아직도 남아 있을 어쩌면 비슷한 고난의 시간이

더 예수님께 붙들려 고백할 때 다가올

영적 위안, 도움이 될 것 이란 생각이 들며

그분, 시편기자의 고백으로

내 마음이 위로되고

조금더 성장해갈 수 있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아침이다.

감사하다.

 

 

 

주여.

귀하신 주의날입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

서재 , 제 묵상터에 앉아

깊이 주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도록

이 시편기자의 마음을 공감하게 하시며

그를 통하여

내 마음, 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아

되풀이 되풀이 제 삶을 발거는 문제에 대하여

어쩌면 그러함으로 통해서

아프고 힘듦이 되풀이 되지만

조금 조금 더 성장해갈 기회가 될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주여.

혼란이 점차로 정리되어갑니다.

내 주여

주 안에서 하나하나 정화되어가는 듯합니다.

살아계신 내 주님.

감사하오며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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