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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아름다움은 그 마음이다(눅7:36-5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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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아름다움은 그 마음이다(눅7:36-50 )

주하인 2008. 1. 24. 13:14

제 7 장 ( Chapter 7, Luke )

이럴 때

좋은 카메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세미나 있어

늦은 시간이 되서야 

병원에서 나서는 순간,

길가에서 만난

보름달.

눈이 온 뒤라서

차가운 바람과

어둠속의 흰 눈이 데코레이션 된

나목에 걸린 달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황량한 벗음,

온전히 내 보이는

마리아의 깊은 회개의 심정과

비슷이도 느껴져서 그럴까요?

이 아름다움,

시린 아름다움은

주님이 만드신 것으로 전제되니

더욱 아름다왔습니다.

아..

좋은 카메라 !!

ㅎㅎ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마태 복음과는 조금 달리

여기서는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라는 표현으로 보아

그 죄인인 '마리아'가 아직은

주님과 잘 모르는 상태인 듯 싶게 나온다.

 그런데

마침 바리새인 집에

그녀가 풍문으로 듣고 있던,

그러면서도

말 전하는 이들의

기적이나 이적 자체에 대한 것 보다

그분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에

가슴을 많이 찔려하며 깊이 회개하며 

그 분 예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에 대하여

가슴 깊이 담고 있던 차

우연하게도 옆에 사는 바리새인 집에

들어오시게 되니

기가 막히게 놀라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바리새인 집에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향유 - 아주 비싼 - 를 들고 들어 왔다는 사실에서

짐작이 간다.

가난한 삶에

몸을 팔아 연명할 수 밖에 없던 처지의 여인이

향유를 들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평생 짐으로 가지고 있던

엄청난 죄책감 - 몸을 파는 일- 에 대한

죄속함을 받을 기회가 있을 수도있다는

실낱 같지만

기회인 그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침 묵상에서

목사님의 설교 중

그 당시의 향유 옥합은

지금처럼 마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주둥이가 길게 나온 항아리로

그걸 열기 위해서는

깨뜨릴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 비싼 ,

단 일회의 사용을 위해

준비를 했을

그 녀의 심사가 읽혀진다.

 

 처절한 회개

그것을 위해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준비한 것이니

그 마음에 매달린

그 죄에 대한 무거움과

주님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가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38.  예수의 뒤로 그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시대의 식사법은

누워서 먹는 것이란다.

한 팔을 옆으로 괴고

길게 모로 누워서 식사하는 그림은

로마시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 잘 나와 있다.

 

 그 발 곁.

그 발 아래에 섰음.

거기에서 욺.

그 심정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망설임이 있지는 않았을까?

'어찌 나 같은 자가,

 식사하시는 데 방해는 되지 않을까?

 이게 마지막 기회인데

 .........'

수많은 생각이 떠돌며

그녀의 가슴은 쪼이고 쪼여 졌을 것이다.

그냥 다만 눈물을 흘리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손으로

향유옥합을 깨질 듯이 감아 쥐고

멍하니 시선은

주님 예수님께 고정시키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분의 발을 쳐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발일까?

그 당시에 습관이 그랬던 것일까?

 

 세족식을 몇 차례 할 기회가 있었다.

낮은 자로 몸을 수그리고

닦아 주는 입장으로도

앉아서 닦임을 받는 입장으로도,

그런데

세족식을 하는 동안

많은 눈물 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옴을 볼 수 있다.

왜 일까?

발은

가장 더럽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힘들게도 체중을 다 받치고 있다.

그곳으로

자신을 낮춤은

뼈를 깎는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

낮아짐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걸 받아 들이고

몸을 낮추어 자신의 발을 닦아 주는 자를 향하여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나오는 것이고,

낮아진 자는

낮아짐을 자신이 선택함에 대한 대견함이

그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어

나오는 선한 눈물인 것이다.

선한 카타르시스.

 

마리아는

자신의 처지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고

죄많은 더러운 여인이기에

그 분의 그 발을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선택과 지도가 넘치는

지금의 세대에서 조차

이러한 낮춤

낮아짐을 선택하는,

낮아짐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갈구하는  마음의 자세는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볼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주님은 이걸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 녀가 가난함에도 아낌없이 바치고

바침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는

아름다운 장면만

너무 부각되어 있는 것이

지금 기독교 내의 향유 옥합에 대한 묘사다.

그러나,

실은

그 보다 더 귀한 향기는

그녀의 내면에 있다.

 

 그녀는 발을 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판 댓가를 아까워 하지 않고

자신의 죄 사함에 전부 투자할 ,

아니 투기할 - 예수님이 오실 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정도로

그 마음은 절박하였다.

죽도록

자신의 죄와 자신의 신세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 순수함과

이 죄에 대한 민감함과

이 용기가 정말로 아름답다.

 

묵상글을 시작할  처음

어제 그제 퇴근 하며 찍은 사진을 먼저 걸어 올렸다.

오늘의 묵상의 내용을 전개할 스토리는 쓰지도 않았지만

그 아래 쓴 글에

'시린 아름다움'이란 표현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아픈 내면을 주님이 느끼게 하신 것이다.

그 내면은 시리다.

정말로 죽도록 시려

차갑게 칼처럼 몰아치는

요 며칠 같은

눈내린 후의 삭풍같이 시리다.

하지만 아름답다.

그 회개가 아름답고

그 눈물이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주님이 전제가 안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주님이 벌려 놓으신 '십자가' 사건이 있으시기에

저런 모험이라도 할 길이라도 생긴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예수님을 느끼기에

그 발 곁에 서서 울고 서 있다.

그것은

그 분 예수님은 비록 그녀를 쳐다 보지 않고 계시지만

그녀는

그 분의 발 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에서도

그 분 예수님께서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평안함,

끝없는 평강의 기운을 느끼게 된 것일 것이다.

너무 지저분해져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볼 수는 없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노란 개나리의 봄바람에 흔들리는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겨울의 마음을 가지고 어두운 집 구석에서

창문을 보고 있지만

그 마음에 어렴풋이

봄이 옴을 감지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예수님의 평강은

그 발끝을 통해서

죄악의 흔적으로 흐려진

그 녀의 눈동자를 통해

그 영혼 속에 감지되기 시작한 것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 영혼의 봄기운은

그녀로 하여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을 불러 일으켰고

그 눈물은 그 영혼의 창문에 끼었던

먼지가 녹아 내리는

역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드디어는 주님 앞에서

대성 통곡을 한다.

여전히 그녀는

그 분 예수님의 발을 보 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발을 향해 흘리는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와 양이 비례하면 할 수록

그녀의 척추의 각도도

예각으로 향해질 수 밖에 없어서

자신의 몸에 가해진

지구 중력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드디어는

예수님을 향하여 돌진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눈물은

수분이 희귀한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함부로 방기하는 것은

죄인 즉 ^^;;;

그 눈물로 얼른 주님의 발을 닦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다가가기 조차 힘들었던

그 여인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도에 지나치는 행동은

그녀의 심사에

마치 활처럼 당겨졌던

죄와 그에 대한 갈등으로

얼마나 자신의 행동을 옥죄고 있었던 내면적인 억압이

주님을 만남으로 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녀의 영혼은

주님 예수님과 만의

축포 즉,

향유옥합을 터뜨리는

축제에 들어갈 것이다.

 

그녀는

이제

오래된 창문의 오물이 씻겨져 내려가고

주님의 향기 - 발냄새도 안나시지 않았을까?ㅎㅎ - 를 만끽하고

그녀의 영혼에 바야흐로 봄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 낫기 위해

몸부림 치듯,

그녀가

그녀의 영혼의 옥죄임으로 부터

풀려나기 위해

아니,

풀려남을 cerebration하기 위하여

과도한 듯한 투자를 하여

준비를 해온

옥합을 드디어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 옥합 속의 향기는

앞에 계신 분의 발은

틀림없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신 분이시다.

그녀는

그녀를 위하여

영원 전 부터 준비되어온

축복의 시간이 시작됨을

자축하기 시작한다.

주님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행사는

그녀에게는

자축이다.

누가 뭐라는가?

이 시간

저 옆에서

'유 모'씨가 뭐라 뭐라 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들이 무얼 알겠는가?

이 엄청난 비밀을...

억압으로 부터의 자유

묶임으로 부터 풀려남

이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는 그녀 만의 축제를 시작하였다 .

주님과 그녀 만이 아는...

정성스레이

주님의 발을 들어 닦는다.

주님의 머리에도 붓는다.

 

 이 묵상을 보며

' 온전한 회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성결이 아니다.

구원은 이전의 죄에 대한 일시적 잊으심의 의견 표시일 뿐.

새로운 자범죄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옥합 깨드리는 심사로

회개를 해야 한다.

말씀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표현했다.

'나중에 천국 문 앞에서 모른다 하심을 받고

문이 닫힌 후

이를 갈며 슬피 욺이 있으리라'고...

천국은 보장이 되어 있다.

하지만

보장 때문에

자꾸만 더 굳어져 가는

회개 없는 삶은

어쩌면 실족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최소한

주님 한테

꿀밤 한대 맞을 일인지도 모른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다.

보혜는 은혜를 도와 주시는 역할 을 하시는 것이다.

은혜는 회개를 전제로 한다.

회개해 시린 아름다움을 가진 자들에게

은혜는 더 크게 오는 것이다.

아니면

회개할 수 없지만

회개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도우신 흔적이다.  

은혜는...

 

 난 ,

주님 앞에서

몇 번

정신없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 보았던 경험이 있다.

 흘리기도 한다.

가끔...

그럴 때

한 사람의 몸에서

이 짧은 순간에

이리 큰 액체가 쏟아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해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발이 흥건히 젖을 정도는 된다.

이때는

내 심사는 답답히 막혀 있고

도저히 이 잘못을 어찌 할까.. 고민하며

주님이 안받아 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있을 때

의지를 들여

죄책감 크게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갈 때 그런 경험 종종했다.

주님은

그럴 때면 놀라운 은혜로

내 속을

"뻥 " 뚫어 주신다.

     정말 뻥~이다.

 얼마나 개운한지

나서는 발걸음은 날아갈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이때 내 손에 큰 돈이 주어지고

주님께서 머리 속에서

'얘~~ 그냥가냐?' 하시는 음성이 혹 들리면

아마 그냥은 있지 않았을 것만 같다.

 회개할 바탕의 시린 아픔과 

그런 바탕이 된 회개 이후의 통쾌함 - 주 앞에서 오는 통쾌함이라고 사도행전에 나온다-이

아름답다.

그게 바로  이런 것 같다.

 

작금 기독교인 들의  향유옥합에 대한

공통적인 해석의 흐름은

낮은 자가

엄청난 헌신을 하는 것이 아름답고

그 것은 주님을 위한 놀라운 결단이다. ...라고

행동의 결과에만 치중해 있다.

보통은...

 

맞다.

하지만

더 맞는 것은

자신들도

마치 마리아가 그랬던 것 같이

그 헌신 전에

깊은 회개와 그에 따른 시린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경험한 후 

그 시린 애절한 아픔에 대하여 공감을 하고

그에 따라 그녀가 그랬던 것 처럼

향유옥합을 실행할 것이라는

결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놀라운 인지와

몸부림 치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주님의 발앞에

발 만을 보며

그처럼 낮아져야만 할 것 같은

절박한 겸손의 바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아까워 하지 않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댓가를 바라고

헌신하는 것을

그리 크게 즐겨 받으실까?

강아지가 가져다 주는

큰 뼈다귀 자체를

강아지 주인은 기뻐 받으실까?

아름다운 것은

뼈다귀 자체가 아니다.

뼈다귀를 물고오는  강아지의 심성이다.

오늘

회개할 일을

회개하여야 한다.

겸손하여야 한다.

주님 앞에 나서야 한다 .

눈물을 동반하는 통쾌함, 유쾌함이 다시금 있어야 한다.

그 기쁨은 주님 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임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은 체험이고 살아계신 증거이시다.

 

 

적용

 

1. 회개한다.

 대화 중에 자꾸만 잘난 체가 나온다.

 이것은 회개할 교만이다.

 주님 앞에 회개하자.

 

2. 남의 말에 흔들린다.

 내가 더 높고 싶은 열등감의 발로다.

주님 앞에 내려 놓겠다.   

 

3. 모든 불의와 부족함을 용서하고 넘어가겠다.

 

4. 주님의 발을 묵상한다.

 주님의 발도

 먼지가 많으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 먼지 낀 발을

 주모는 감당할 수 있는가?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향유옥합을 깨드릴 마음의 여유는 있는가?

 

 

기도

주님

여러 생각으로 마리아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녀의 격정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깊은 아픔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영혼 안의 죽을 듯한 어두움도 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으로

주님이 계시는 곳의

그 발에서 나는 개나리의 노란 흔들림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결심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통쾌함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영혼의 축포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주님과의 cerebration도 보았습니다.

주여

회개하게 하소서.

회개할 마음의 여지를 주소서.

회개에 대한 필요성을 알게하소서.

회개 마져 맘대로 안된다는 것을

짧은 믿음 생활 동안 체험하고 있사오니

그마져도 주님이 시키소서.

주님

오직 주님 만이 내 생명이십니다.

오직 주님 만이 내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주여

영광홀로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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