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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과 안 소경( 눅6:39-49 ) 본문

신약 QT

소경과 안 소경( 눅6:39-49 )

주하인 2008. 1. 21. 09:06

제 6 장 ( Chapter 6, Luke )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울 병원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갈 때

요대로 걸어 올라가면

'화장실'이 정면에 나옵니다.

그대로 들어가 볼일 볼 자리 앞에 서면

' 아래에 써 있는 구절이 나온답니다. ㅎㅎㅎ ^^;;;

 

 

 

 화장실 들어가서

자세를 잡고 볼일을 보다보면

바로 눈 앞에

좋은 마음 가지기의 예화를 들면서

 '샘x'라는 책자에 나오는 글이라며

이쁘게 단장되어 붙혀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거기엔  두 소경이

서로 소경인 줄 모르고 의지하며 안심하고 건널목을 건너고서야

서로가 소경임을 알고 깜짝 놀라는 예화인데

이처럼 서로 믿는 게 중요하다고 가슴 뿌듯히 멘트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처음에 이것을 볼 때

인간애에 대하여

잘 쓴 글처럼 생각되어 끄덕였었으나

곧,

'아니 이러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그때도 저렇게 아름답게 쓸수가 있을까?'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어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쉬하러 갈때마다..ㅎㅎ

 

 오늘

성경구절에 나온 이 글.

소경이 소경을 이끈다는 말이

그 글에 대한 나의 생각과

똑같게 느끼게 하게 한다.

그것은

세상과 세상이

서로 아무리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서로 의지하고

인간애를 찾아도

그것은 소경이 소경을 이끎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야 하는가?

소경이 아닌 자가

소경을 이끌어야 한다.

주는 자는 주어서 기쁘고

받는 자는 안전하고 안전감을 느껴서 좋다.

그렇다면

소경은 세상이되

소경이 아닌 자는 누구인가?

기독교인이 아닌가?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가?

이 행실 만으로 모든 기독교인이 다 소경이 안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소경이 아닌 기독교인이 있다.

하지만 

잘못된 인도로

풋걸음으로

세상을 혼란하게 하고

세상의 질타를 받는 기독교인이 또, 얼마나 많단 말인가?

작금에...

 

 그렇다면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소경이 아닌  소경 ^^;;이 누구인가?

인격적으로 소경이 아닌

정말 온전하게 회복된 사람이 나와서만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 온전한 기독교인이 있기는 한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끝날 때가 다 되어 가는 데

주님의 말씀은 이땅에 펼쳐질 수가 없단 말인가?

말씀은 쉬운데

왜이리 복잡한가?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오늘은

날씨도 차갑고

바람도 세게 부네요.

하지만

눈이 소담하게 내립니다.

울 병원 전경이고요.

아름답지만

고생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합니다.

^^*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온전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음이 당연하다.

문제는

온전한 나무가 누군가?

어떻게 알수있는가?

행실, 즉 나무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겉치레만 뻔드르르 한 자들을 어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행실 만 좋은 것은

세상 어디에도 볼 수있다.

선을 행하는 종교는 어디에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틀림없는 소경이 아닌가?

열매만 보고 맡기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행실이 옳지 못하였던 자들이나,

과거의 주하인이 월하랑이었을 때나

지금도 가끔가끔 그 모습이 불현듯 올라와

좋지 못한 과실이 매달리는 경우,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이런 자들은

아니면 이런 상황은 '소경'의 상태가 아닌가?

 의문점이 생긴다.

나무를 변화 시킬 수는 없는가?

나무는 인격인데

세상의 인식으로는

정신과적 판단으로 '인격의 병'은 바꾸기 극도로 힘들다던데

그렇다면

나쁜 열매를 끝없이 내 뱉는

나쁜 성질의 나무, 즉 인격의 미 성숙 된자들은

그대로 숙명처럼 포기하고 살아야 만 하는가?
바꿀 수 있지는 않다는 말인가?

  현실 요법이든지

행동 수정 요법이 든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네가지 요건

즉,

감정

증상

생각

행실  의 네 부분 중

인격의 과실 부분이기도 한  '행실'을 변화 시켜서 

역으로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다 한다.

이렇게해서

마음의 상처나

일부분 장애를 고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온전한 인격의 변화는 가능치 않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어떠한 구성에 의하여

일정 부분 계속적으로 되풀이 되어 나오는 행실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행동을 결정하는 근원인

결정화된 마음의 생김새이며

마음의 성질의 본체인

인격에 해당하는

나무를 변화시키기는 곤란하단 말인가?

 오늘 말씀이

행실을 해서 변화하길 바라는 말씀이지 않으신가?
실제로

반장을 시켜보면

그 반의 건달인 악동들이 많이 변함을 보고 있고

행실을 변화시켜 성공한 많은 케이스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변화하여 나가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온전한 인격으로 나타나는

나무는

실과를 변화시켜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인가?

 

 실은

가능하기도

불가능하기도 하다.

 

 행실을 변화시켜

전 인격의 변화를 도야함은 가능하기는 하다.

참선을 수행하거나

'구제' 등에 우선하는 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빛깔 좋은 과실을

만들어 내기는 가능하다.

많은 세상의 예가 있다.

 그러나

원죄의 성질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에서는

언제나 끝에서 걸린다.

어느 순간에 무너진다.

그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율법

유교

법... 수많은 제재 장치들이

세상에 등장하여

행동 수정을 통하여

나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되풀이 되어 왔으나

결국

결론은 모두가 실패다.

그 실패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이 땅의 삶이다.

 

그렇다면

소경은 소경으로

좋지 못한 열매를 가진 자들은

절대로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가?

 

 
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이처럼

행치 아니하는 자는

홍수가 밀려올 때

그 황토의 거센 에너지 파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그 물살에 떠 내려 가 버려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듣고'

'행치 아니한 자'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세상의 그 어떤 행함도

아무리 아름다운 예화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행해도

불가능한 것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만은 가능케 한다.

 

 인격이 변할 수 있다.

늑대가 사람으로도 변한다.

월하랑의 랑이 늑대다.

내 닉의 변천 사 중 제일 먼저 썼던 닉이다.

닉을 선택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속을 그대로 드러내어 투영한다.

내 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닉을 가만히 보고

그들의 글을 보면

절묘히 맞아 들어감을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놀라는 지 모른다.

내가 그랬다.

늑대는 두 이미지다.

설원의 대보름 평원에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늑대는

외롭고 멋있다.

실제로 내면은 착하다.

하지만

사냥을 할 때,

피 냄새를 볼때는 잔인하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월하인'으로 변했었다.

이제는 '주하인'으로 변했다.

내 인격이 주 하인으로 변하면서

실제로

내 속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고

주위 사람들이 많이 편해 한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탓이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적용하려 애썼다.

주님은 그걸 도우셨다.

행동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정도의 것만 했다.

단번에 변화는

최소한 나에게는 불가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려는

약간의 의지만을 보시고도 기뻐하셨다.

그 기쁨은 내 기쁨으로 느껴졌고

내 기쁨은 평강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그 평강의 기쁨은

내 영혼에 들어 있는

아주 오래된 악습을 녹아나게 하고

악습의 뒤켠에 앉아 있는

악한 생각들- 누구지 !!! - 을 하나하나 밝혀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속을 선한 생각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 선한 생각이 운동함을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은

놀라운 기쁨으로 다시

선순환을 일으켰다.

이러한 기쁨은

시간의 장단을 감안하더라도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깨달음을 가져왔다.

당연히도

과실의 빛깔이 좋아지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게 원리다.

 

 주님을 아는 우리는 인격이 변해야 한다.

인격이 변함은 행동의 변화로 가능하다.

단,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만이 가능하다.

주님의 특별한 도움,

즉 성령이 계시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불가능하다.

주님은 말씀을 준행하여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체험해 보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걸

잘 따르는 결과를 보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함은

그게 바로 기쁨이고 평강이다.

 

 

 

 

적용

 

1. 말씀 여섯 장 읽겠다.

 

2. 주님의 말씀의 준행을 통하여

 변화를 얻길 원한다.

 

3. 변하고 이끌어 간다.

 소경이 아니기 시작할 때 부터

 소경이던 자를 이끌기 시작한다

 전도를 할 것이다.

 말씀으로 인도한다.

 

4. 아버지 학교 가겠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남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할 수 있게 합니다.

변화될 이유는 수도없이 많지만

주님의 허락하신

그 평강을 맛보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이 땅에

제 삶으로 보여주기 위함도 있습니다.

주여

제가

늙어 죽을 때까지

절 떠나지 마시고

늘 잡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제 변화된 행실로

불쌍한 영적 소경을 이끌게 될때

비록 제가 행동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것임을

남들이 알고

저도 알게 하소서.

제 혈관을 흐르는

피가

이전의 그 피가 아니고

주님의 보혈이 되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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