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성장통(요 21:1-14 ) 본문
제 21 장 ( Chapter 21, John )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야할
유일한 희망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로 내려왔다.
디베랴는 옛날 삶의 모습이다.
왜 일까?
왜 예수님의 허리춤 상처에 손가락 집어 넣는 도마를 보기 까지 한 그들이
옛날로 돌아왔을까?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내려는 왔지만 의욕이 없다.
예전에 어부이던 때, 어부의 본분 만 열심이던 그들이 힘이 없다.
베드로의 말투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어부가 왜 그런 소리 할까?
그들은 돌아온 어부이지만 어부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그들을 잡아 끄는 허탈함이 있다.
깊은 허탈함.
영혼의 공허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그 진득한 어두움................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지만
세상은 예전처럼 그들에겐 힘이 있는 매력이 되질 못한다.
고기가 잡힐리가 있는가?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누군가 자신들을 끌어 주었음....하는 넋을 잃은 허무함으로
그물을 쳤지만 소득은 없다.
그때에 누가 나타나서 묻는다.
대답한다.
그가 우측에 던지라 한다.
왜 하필 우측일 까?
어쨋든 그들은 그냥 끌리는 대로 그물질을 한다.
당연히도
그 분이 누구인지
왜 오른쪽인지
또, 그 멀리서도 마이크도 없이 말하는데도
어찌 50간 (100yards :91.4미터) 밖에서도 대화가 잘 들렸을까?
어쨋든 세상의 물질도 풍성히 얻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유명한 이 행동이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가던 자들의 고뇌가 얼마나 심한지를 잘 알 수있다.
그는 옷을 입고는 무조건 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달려 갔다.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주님이 준비해 주신 '만찬'
주님은 세상을 모두 버리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그리고 위안을 허락하신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거기에 주님의 도움으로 얻은 물질 일부를 가져오길 바라신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당연하지만
주님이 주신 물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누구나 좌절은 있을 수 있다.
솔직히 좌절을 모르고 성공만 치달리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아픔을 모르는 자들의 성공은 자칫
그 성공보다 더 아픔을 남에게 줄 위험이 있어
주님 안에서 크게 귀히여김을 받지 못할 위험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주님이 치리하실 이유가 있지만..
주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그 엄청난 영적 부담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견디지 못하고 디베랴 바닷가로 내려왔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몸소 부활 보여주시고는
한동안 어디론가 잠적하셨다.
어디일까?
그것도 궁금하지만
그 후의 베드로 일행의 흔들리는 마음의 요동의 시간이
더욱 흥미롭다.
어쨋든 그들의 심령을 뒤흔들었던 대 격변의 3일은 가히 사람으로 견디기 힘든
곤란의 시간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긴 했지만
그들 자신이 막연히 바랐을 지도 모를
'이 땅위에서의 부귀영화' 의 물거품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지도 모르고,
그것보다 더욱 크게 그들의 심령을 자리잡은 것은
자신들에 대한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혼란은 그들이 어부로서 살아오고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느낄 필요조차 없었던
단순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삶에 고착되었던 눈이
또 다른 가치에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필수적인 성장통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베드로 일행은 주님 예수님을 쫓아 다니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삶은 세상에 가치를 많이 둘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고
그 삶은 고난은 있었으되 뚜렷한 눈에 보이는 가치 - 세상의 것,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어
별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었으나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심과 부활을 경험함으로
그들은 대 격변을 보아야 했다.
세상적 가치에서
이제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전환되어야 하는 과정에 있다.
그들로서는 대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마음이 지진이 나는 듯 했을 것이다.
그 영적 혼란은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해오던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높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등등의
단순한 고민을 넘어서는
복잡하고 머리가 뒤죽 박죽일 수 밖에 없다.
그 고통은 이전의 것 보다 훨씬 크다.
죽고만 싶다.
살 이유를 찾기 위해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라 하지만
이전 처럼 '고기를 잡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다.
그냥, 죽을 것 같은 공허함에서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냥 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촛점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목표가 없는 그물질에 무슨 고기가 걸릴 것인가?
그러던 그들에게
즉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소리가
새벽 호수 위를 뚫고 100여미터의 거리를 두고
들려와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 소리는 '희망의 소리'다.
그 소리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였다.
물위를 뛰쳐 들어가는 베드로의 유명한 모습은
그 들의 그간 겪어 왔던 상실감, 허탈감, .....이 얼마나 심했던 가를 반증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신다.
그러시면서 뒤따라 오는 제자들에게 잡아 놓은 153 마리의 생선 중 한마리를 가져오라 하신다.
주님은 세심하시다.
주님은 온전한 삶의 방편이시기도 하다.
주님은 기적을 베푸시는 근원이시다.
주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다 아신다.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지적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간접적으로 가르치신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
나에겐 무얼 보이시려는 가?
돌아보니 훨씬 덜하지만
가슴이 텅 빈 듯한
나만이 남은 듯한 허전함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열심을 보이던 주님의 일에
상황이 변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게을러 지는 듯 당혹감이 스치고 지날 때도 있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가..'
주님 앞에 내려 놓는 기도를 할 때는 세상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도 있을 거 같더니
한번 씩 주위를 보면서 '나만... '하는 허탈함도 있다.
주님은 아신다.
주님은 나에게 아신다고 하신다.
153마리 고기를 보이시며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보이신 주님처럼
나에게 이전과 비교하여 훨씬 달라진 내 모습을 이해케 하신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에 다시 눈돌리며
주님이 그토록 기쁘게 내 영혼에 허락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가치 추구의 속도가
늦추어 졌음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어쨋든
난 사도 베드로 일행과 같이
그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있다.
적용
1. 주님을 좇다가 허탈함은 새로운 성장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
2. 베드로 처럼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좌절하지는 말자.
그렇다고 몸부림 치지도 말자.
언젠가 다가오실 그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며 기다리자.
3. 환경의 허전함이 올 때도 주님만을 기다리자.
4. 주님은 화려한 축복이시기도 하다.
일상의 어려움은 그 분이 해결하실 것을 믿자
5. 성경 여섯 장 읽자
6. 세상 것에 대한 고집을 내려 놓을 때가 온 듯하다.
아쉽고 허전한 것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을 기다리자
7. 성장 통은 필요하다.
기도
베드로의 그것을 이해할 만도 합니다.
그들의 허탈함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들 안에 어떠한 혼란이 있을지도 가히 이해가 갑니다.
참으로 다행이도
그들의 그러한 곤란이 주님의 뜻임을
이제는
확실히 알만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아직도 내가 그런 상황에 이를 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주님.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 뜻으로 받아 들이게 하시고
주님의 뜻 앞에 내려 놓게 하시고
주님의 평강으로 해결 받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바라올 것은
이제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피하지도 않게 하시고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아쉬워 하지도 않게 하시고
세상의 것으로 아파하지도 않게 하소서.
이제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흐뭇하게 하게 하시고
삶이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주여
절대로 제 자아가 앞서지 않게 하시고
주님
고통스러워 하지 않게 하소서.
억울하게 달라 붙는 세상의 아쉬움이
절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이제 기다립니다.
주님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주님의 축복을 기다립니다.
세상의 것을 경멸하고
주님의 것이라 부여잡고 바르르 떨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시면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하소서.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위안을 받아 들이게 하시며
주님의 위로 가운데 눈물 짓는 평안함을 누리게 하소서.
저 뿐 아니라
제 모든 지인들에게 다 그리하시고
모든 주님의 자손들이 다 사모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에는 (요 21:20-26 ) (0) | 2008.12.31 |
---|---|
주님은 아시지요?( 요 21:15-19 ) (0) | 2008.12.30 |
묵상 (요 20:16-31) (0) | 2008.12.27 |
끝까지 울자( 요 20:1-15 ) (0) | 2008.12.26 |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 요 19:15-27 ) (0) | 2008.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