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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끝까지 울자( 요 20:1-15 )

주하인 2008. 12. 26. 09:00

제 20 장 ( Chapter 20, John )

 

 

 어둠이 와도

주님 예수님을 찾는

열망을 지니고 있으렵니다.

죽을 때까지요.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

   보고
 

 온통 어두움 뿐일 것 같아도  주님은 곁에 계시다.

온통 무덤 같은 답답한 날이 계속되는 듯해도

그 무덤은 결국 열려 지게 되어 있다.

 

 무덤이 결국 열려짐은

일찍 온 마리아 같은 자만이 볼 수 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제자들이 옴도

마리아가 없었으면 가능치 않은 일이다.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열심히 달려와도

죽으신 무덤 안에 들어가 봐야

주님의 부활을 볼 수 있다.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내

미련함도

신실한 동역자로 인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래도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다.

남겨 놓으신 천 껍질 만 보고 갔을 뿐이다.

부활의 증거가 있으되

부활은 체험하지 못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

울었다.

끝까지 울었다.

제자들이 가버려도

무덤 속을 들여다 보며

끝까지 울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정말 가슴 아파했어도

마리아는 '부활'을 믿지는 못했다.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지만 '성령'이 임하지 않으시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래도 마리아는 끝까지 울며 주님 예수님을 목격하였다.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주님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은

주님 성령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겠지만

성령님의 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끝까지 버팀이 전제가 되어 야 한다.

그 끝까지 버팀은

무미건조한 '율법'적 행동강령이 아니라

마리아  같은 '감정의 교류'가 필요한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음은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 감정의 교류에 있다.

 즉,

그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에 있었다.

제자들은 남자라서인가?

그들이 그렇게 3년간 주님을 쫓아다니고 교육을 받고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들은 이성적이다.

주님 무덤이 비었음을 들어 격렬하게 반응을 보이며

그 새벽의 무덤 속으로 뛰쳐는 들어갔지만

그들은 금새 돌아갔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보이는 교회들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방탕하여 타락해 가는 세상의 교회를 차치하고라도

그 반발로 더욱 교리에 묶이고 답답해져 가는 율법적 성향의 교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다.

주님은 살아계신 아버지다.

그 분을 위해 울어야 한다.

그 분이 말씀을 주시기에 감동하고 울어야 한다.

 아니, 울수 있어야 한다.

울 수 있길 사모해야 한다.

그분의 은혜로 인해 감사해서 울어야 한다.

그 분이 보이지 않는 메마름이 싫어서 울어야 한다.

주님을 보이지 않게 하는 이 내 부족한 심성 탓으로 울어야 한다.

주님은 그냥 계셔도 그 분이 느껴지지 못하도록 하는 '죄'의 가로막음을 울어야 한다.

회개의 울음을 울어야 한다.

그래서 그 분이 곁에 서계심을 느낄 수 있도록 울어야 한다.

그 울음이 눈물을 동반한다면 좋겠지만 영혼의 울음이어도 족하다.

그 울음이 울음임을 알수 있어야 한다.

 

 

 어제 저녁

요새 거의 매일 그렇듯,

아들과 침대 모서리에 둘러 앉아 그 위에 성경 올려 놓고

여섯장 성경을 읽었다.

 혼자 읽기 귀찮아서 꾀부리려 아들을 끌어드렸더니

그녀석이 처음에는 힘들어 하고 몸부림 치려 하더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고 곧잘 따라한다.

 솔직히 난 아이에게 물려줄 특별한 것이 없다.

교육도

재산도

보여준 모범도.....

 하지만 그 아이에게 난 말씀 앞에 바로 섬을 물려주기로 했다.

믿음은 아이 엄마의 열렬한 기도와 강직함에서 배웠다.

난, 내가 아는 말씀 안에서의 자유를 물려 주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아니.. 솔직히 그 마음 조차 주님이 주신 것이다.

 

 어제

대학 문제 때문에 약간의 야단이 있은 후 메마른 마음으로

성경 읽기에 임하였던 아이와 그 분위기의 나..

고린도 전서 13장 이후 고린도 후서 2장 까지 읽기를 계속했다.

읽다보면 어떤 흐름이 생겨남을 난 안다.

그 흐름에 맞추어 읽음의 강약 높낮이 톤을 조절 하다 보면

아이가 재밌어 한다.

5절을 읽었다가 10절 씩을 읽었다가 한절 씩 읽었다가 번갈아 가며 읽다 보면

어느새 졸음은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흐름이라 생각할 어떠한 흐름이

우리의 성경 읽기에 생겨 난다.

하다보면 말씀이 촉촉히 젖어 들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아이에게 난, 내가 아는 주님을 전했다.

그것을 아이의 삶에 맞추어 나누어 준다.

짧게 짧게 ...

아이의 심령이 열릴 때가 있다.

어제 , 교훈 식의 말씀 해석에 아이가 긴장하지 않고 받아 들여짐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을 흐르는 어떠한 움직임은 '성령'이시다.. 라고

아이에게 설파한다.

아이는 받아 들이고 우리 둘 사이에

성경 읽음의 주고 받음이 자연스러워 진다.

 은혜가 될 때는 '찬양'도 한다.

여섯 장을 다 읽고 나서 '아이'에게 기도를 시켰다.

 난,

우리 아이들- 큰 아들도 마찬가지다.-이 세상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면이 많은 듯 보이다가도

가끔 이 아이들의 기도를 들으면서 눈물이 왈칵 나올 때가 있다.

아이들의 기도가 참 깊다.

어찌 저런 언어와 저런 깊은 기도가

그들 어린 - 솔직히 어리지는 않다.  내 눈에만 그렇지..ㅎㅎ. -  그러면서 요새 아이들의

즉물적인 세대의 아이에게서 나올 수가 있는가 .. 감동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금방 잊고는 말지만

난,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주님 앞에 바로 서게 만들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었음을 자랑스러워 하며 콧날이 시큰 거릴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아이가 방금 전에 야단 맞은 아이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물나고 진솔한 기도를 한다.

슬프지는 않지만 감동스러움에 난 아이의 기도 내내 '아멘' '아멘'.. 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침대 위에 손모으고 기도하던 아이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어

'잠시 아빠가 축복 기도하마'하고 가족의 제사장 직분으로 아이를 축복 기도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그 얼굴을 우리 아이에게 돌리사.."

아버지 학교에서 배운 기도다.

아이가 가만히 있는다.

온몸에 힘을 뺏지만  모은 기도의 손에는 힘이 주어짐을 느낀다.

감동이다.

눈물이 나오려 함을 참는 게 아이나 나나 느껴진다.

서로..

 

 주님은 그렇다.

주님은 메마르신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의무의 대상이 아니시다.

어렸을 적 부터 대학 들어갈 때까지 치열하게 묶여 공부하고 경쟁하지만

대학 넘어 사회인이 될 때 부터는

그 젊을 적 공부를 바탕으로 '관계' 속에서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게

우리 '삶'의 흐름이다.

 하나님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그 분은 제자들이 삼년 간 가르침 아래 , 보여주심 아래

치열하게 배우고 굳혀 왔지만

그 이상은 '인격적인 주님 예수님 과의 만남'이 필요하다.

 제자들처럼 급히 왔다가 급히 돌아가 버리는 칼 같은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마리아처럼 새벽 부터 울며 무덤에 나오고

남들이 가버려도 주님 예수님의 추억을 잊지 못하여

끝까지 붙어서 울고 있는

그 깊은 감동의 흔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주님 예수님은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다.

주님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내 일생에 움직이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나에게 추억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날 눈물짓게 하고

새로운 기대로 웃음 짓게 만든다.

 

 아들.

아직은 그렇지만, 이제 인생의 1/4를 산 녀석이다.

주님 예수께서

그 감동을 느끼는 아이의 일생에

나머지 3/4의 인생에 '기적'을 베푸시리라

난 믿는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그 아이는 주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 것이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것이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난,

그 아이에게 그리 살도록, 살 수 있도록

주님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말씀 앞에 서 있고

주님 예수님과 감동을 공유할 기틀을 마련하여 주고 있다.

 

 

 

 

적용

 

1. 아이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 기도한다.

  믿음으로 쓴 학교가 되도록...

 

2. 모든 결과는 주님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맡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지혜를 아들에게 주시도록...

 나에게는 기다리는 능력을 주시도록..

 우리 가족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평강 안에 거할 수 있도록...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4. 주님의 감동을 이웃에게 전한다.

 우선 내 앞에 서 계시게 되는 '환우 ' 분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들에게 내 감동을 느껴지도록..

 

5.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6. 답답해도 어려워도 기다리자.

  주님을 죽도록 사모하자.

 세상이 엉터리로 돌아간다.

 어제는 MBC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예수님을 '사회 개혁운동가'로

 단언하여 놓고 논리 전개해 나가는 ,

그것도 성탄절에.....

이 어리석은 세대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살만해진 것도 '예수님' 아니고는 답이 어디 있던가?

살만해지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다.

 돌아보면, 우리 스스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랑 다른 바 없는 헛 똑똑이 들이

 세상에는 천지다.

  종말이 가깝다.

 무서운 세상이다.

 주님 만을 기다리자.

 죽도록 기다리자.

 울면서 기다리고

 사모하면서 기다리고

 그 분의 함께 하셨던 그 영광의 기억 속에서 기다리자.

 

  

기도

 

하루하루가 살기 힘든 세상에 삽니다.

세상은 주님을 적대시 하려 합니다.

그래서 얻을 것은 파멸 밖에 없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려는 도구로

주님을 비하하는 세대입니다.

아비 어미를 물어 뜯어 가며 살아나는 살모사 같은 세대입니다.

이 때에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

정말 눈을 뜨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주님의 그 놀라운 임재의 시간을 기억하고

몸부림 쳐야 할 때입니다.

차거운 이성은 사라져야 합니다.

오직 절절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감정이 교류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이야기도 꺼내기 힘든 이 세대에

이 무덤같은 세대에

주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로서 끝까지 존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감사하신 주여.

주님을 앞서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살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을 손 붙들고 죽을 때까지 살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 그리하게 하소서.

제 주위 모두 그리하게 하소서.

우리 나라가 그리하게 하시고

이곳 오는 모든 분들이 그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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