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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성령을 성령의 성령으로 (갈 5:13-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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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성령을 성령의 성령으로 (갈 5:13-26)

주하인 2010. 6. 23. 10:39

제 5 장 ( Chapter 5, Galatians )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그 하늘에

구름이 끼어있을때도 있습니다

흐려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사이사이로

청명한 푸름은 

이제 더 자주 보입니다

 

그 하늘에

나 혼자 만이 아닙니다

날 비추이시는

햇살같은

주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저 하늘같이

높고

깊고

푸르러

이 내 가슴을

시원케 트여 줍니다

 

그 하늘에 비추이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내 살아가는 동안

주님 사랑 끊이지 않게 하소서

주님 성령 쉬지 않게 하소서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 )

자유 ( 부르신 목적)

 

육체 (세상, 물질계)    

기회 ( 나, 육신적 끌림에 의한 선택, )


사랑 ( 하나님의 원리, 선택의 개념)

( 적극적 선택, 주님이 기뻐하시지만 선택의 부분으로 남겨 놓으신..)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 ( 원함은 있으나 육신이 끄는 ..... 세상은 눈에 보이니 즉각적이고 즉물적이다.  강렬한 유혹 )

 

성령의 소욕 (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신다.  말씀을 선택하고 성령을 바라면 오신다.  성령의 유혹은

                   훨씬 폭넓고 자연스럽고 잔잔하다.  때로는 강력하기도 하다 )

 

( 주님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신다.  둘은 내 속에서 늘

         충돌한다.     나, 내 영혼은 영적 전쟁터이다. )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함(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싸이코 패스  뿐이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갈등이

         있다.  훌륭한 신앙인은 자신의 원함을 내려 놓을 줄 아는 자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을 기뻐하는

         자다. )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율법을 모든 것으로 선택하는 자는 실족할 수 밖에 없다.

성장하는 자는 율법에서 자유로와질 수 밖에 없다.

자유는 '성령'을 전제로 하기에 가능하다 .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은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시다.

 성령은 자유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달라진다.

 

 방종한 자들은 육신의 썩은 것을 배출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이익, 사사로운 욕심, 잘난체, 투기, 질투...............

썩은 것은 더러운 냄새를 동반한다.

인격이 마모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자는

'사랑, 화평, 희락,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나온다.

이것은 율법적으로 해야한다는 강박적 자기관리의 외부적표출이 아니다.

자연스러움이다.

그의 곁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열매는 자연스러움이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는 자 들만이 사랑을 베풀수 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사랑'의 충만한 기쁨을 안다.

그 충만한 충만함을 '첫사랑'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은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감사의 눈물로 증상이 나오기도 하고

노래로 표현되기도 한다.

시선의 고와짐으로 그리하기도 하고

풍성한 글의표현으로 그리되기도 하고

구제로 그리되기도 하며

선교로 그리되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들을 흐르는 감정의 흐름은 '사랑, 희락, ..... 절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 기독교를 믿는 모두가 저런 자는 아니다.    사랑을 받아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은 더 그렇다.    신앙인도 아이의 신앙이 있다.

           어른이 되려면 책임을 지는 부분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감사의 보답을 생각한다.

정과 욕심 ( 세상적 성질,   욱~  아차~  이구~ 하는 것 들 , 육신의 소욕과 동일 )

십자가에 못박음 ( 못박힘은 아프다 .   고통을 의미한다.     예수님 따르고 성령을 받아 들이는게

            반드시 달콤함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은 힘들지만 보람을 찾는다 . 

            신앙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을 고통을 감수해야할 과정이 필요하다.

            그들, 신앙적인 어른이 될 자들을 '제자' 라 부른다. )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을 받은 자들은 '은혜'를 느낀다.

'한량없는 은~~혜,

 바꿀 길 없는 은혜..♪ ' 말이다.

 그러나, 이 감각적 기쁨 만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사탕 베물고 잠들은 아이와 똑같다.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은 그 사랑의 증폭을 위해 '의무'를 필요로 한다.

그 분 하나님께서 '주시고 받는' 조건적 사랑을 주심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감동으로 행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시는 부분이 있다.

그때 그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성장은 멈추고 애 어른이 되어 버린다.

 

 이땅에 사는 우리.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구원 받은 우리.

성령을 받은 우리.

 그 성령의 강력한 도움으로 인하여

죽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우리 영혼의 순화,

인격의 성화를 이루어 가야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던가?

 어떤 모습으로 있던 간에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인생의 어떤 업적도

주님 앞에서는 '강아지들의 뼈다귀 싸움'에 지나지 않을까?

 

 

늘 성질 급한 나에게는 급한 성질이 문제 였다.

나름 정직하다는 나름의 자위가 있고

불의를 못참아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

그러면서 뒤끝없다는 게 늘 '화'잘내는 자칭 정의 파의 멋스러운 듯한 자기변명이었다 ㅜ.ㅜ;

나도 예외는 아니고

그 예외가 아님은 내 아버지 , 내 형, 심지어는 내 동생도 똑같았고

그 똑같음은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어 왔다.

그러기에 그러는 나 자신이 심히 싫으면서도

어떤 상황에 달하면 예외없이 타인을 향해 정직한 '의분 ^^;; '을 터뜨려 사람들에게

상처를 어쩌면.. 입혀왔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어가며 그 분의 말씀과 내 속의 상치되는 이러한

적당한 변명 사이에서 생기는 이 괴리에 대하여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비단, 이 분노 뿐일까?

살면서 느끼는 여러가지 육신적 제한점, 결점 들,

유혹 ( 예를 들면 쎅시한 여성을 보면 스치고 지날 수 밖에 없는 가슴 떨리는 환상들..이런 것 모두

죄가 아니던가? ) 이 말씀에 걸리면

그 죄의 육체적 소욕과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 평강의 '성령'의 열매에 의한 평강의 유혹 사이에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한동안 수도적 성향의 교회에 다니면서 '율법적 노력'을 많이 하던 초기의 신앙생활에서

난 그 괴리가 점점 더 벌어짐에 많이 힘들었었다.

이제야 생각하면 그것은 나의 영적 훈련,

초기의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을 정확히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 그 노력하며 자신을 치던

목회자들과 동료들의 선한 의도를 가슴 앓이 하듯이 안타까워 하고는 있다.

 나.

말씀 앞에 서며

점차로 성령이 운행하시며

훨씬 육체적 소욕이 날 흔들 기회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성령의 열매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내 속에서 조금씨 자라가는 것이 '사랑스럽다' ^^*

내 스스로 그런 내가 기쁘기도 하다.

그것이 성령의 주신 평강의 기쁨임을 매일 같이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ㅜ.ㅜ;;

 

 

 지난 월요일.

멍한 마음의 상태는 어제 묵상에 설명했고

그 와중으로 '자유자'가 되려는 선택으로

아버지 학교의 월요 스텝모임에 가던 중이었다.

차 안에서 나와 비슷한 이름을 가져

'형님'이라고 애교를 부리는 ^^* 동료 산부인과 의사에게서 전화가 왔기에 받았다. 

같은 샘 재단이지만 산부인과 전문병원인 샘여성병원에 근무하는..

' 김샘.. xx환자 아세요?

'외과 KYS선생이  맹장수술을 하면서 혹있는 것을 안보았는지 괜찮다고 했다가

 퇴원하고 며칠 있다가 보니 혹이 있다고 저한테 보냈어요.'

당황된다.

그 과 의사들이 전부 불신자들로 바뀌면서 반드시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어쨋든 이전 선교 열정에 불타던 샘들과는 너무 많이 다른 캐릭터로

이합집산, 좌충우돌...이다.

 아니.. 내가 본원에 있는데 왜 .. 굳이..그 환자를 그 멀리...

물어 보았다.

'왜 그랬대요?'

글쎄요.. 하며 망설인다.

나는 그 외과 선생이랑 그리 연관이 있을 처지는 아니고

나이차도 많아서 그리 교류가 없던 분이긴 하다.

망설이던 선생이 얘기한다.

자기도 이상해서 전화를 해보니

'여성병원이 잘하는 것 같아서....'라는 뜬금없는 대답이라고 하였다 한다.

순간 속상함이 밀려온다.

'아니... 날.. 무시..

 아니.. 특별한 캐릭터들..

 아니.. 아마도 자신의 실수를....'

확..하고 올라오는 것을 퉁명스러운 말로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그 친구에 대한 미움이 날 사로잡으려 한다.

가쟤 속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사단이 '육적인 자극', 육신의 소욕을

팍팍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찬양인도를 못하게 막는 부대낌임이 분명했다.

이전 같으면..ㅎ

그래도 했다.

성공한 것은 어제 고백한대로다.

가끔 난 이런 남들과는 다른 나 만의 체험을 시키신다.

그것은 '내 속의 드는 생각이나 감정의 헝크러짐'과는 상관없이

은혜는 주님의 뜻대로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내 속의 폭팔 시키고 싶은 압력이 줄어든다.

성령의 운행하심이

내 육신의 소욕을 이긴 것이고

그것은 나의 어느 정도의 '올바른 선택' 탓이었다.

 안될 것이라는 내 모든 판단 을 접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주님의 일을 했던 선택을

주님은 기뻐하시며 오히려 찬양을 통해 큰 은혜를 주신 것이다.

 문제는 아직 그 마음이 정리가 안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집에가서는 또다른 '선택'을 잘했다는 것은

어제 묵상에 설명했다.

 직장에 출근하면 어쩌면 맞닦드리게 될

나이차이라는 쉬운 상대와

그리 현명치 못한 의술적 판단에 대한 짓누르고 들어 갈 수 있는 이유가 있고

멀리 보낸 판단 착오와

나를 무시했던 잘못된 의도...에 대한 명분이

'화'라는 육신적 소욕이 쉽게 터져나올 대상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그 닥터는...

그러기에 난 조심스러웠다.

내 '성품적 특질'을 잘 안다.

분명코 잘못된 것은 집고 넘어가고 회복시켜야 된다는

아주 오래된 습관이 있다.

 하지만 말씀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결심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정말 그릇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을 위한 '길임을 알고는 있다.

'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을 ..기뻐하라' 

그 명분 충분한 대상에 대하여 '인내'하는 것이야 말로

능욕이 아니던가?

약하여 지는 것 아니던가?

상대방은 그런 의도가 있는 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상관이 없다.

내 마음이 문제다.

그냥 '선택'했다.

'그를 내 마음 속에서 풀어 놓고 아무 생각 않기로.. '

 

  마음을 먹고 묵상집을 들여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님은 내 마음을 그대로 아신다.

'성령의 열매'

'육신의 소욕'

'성령의 소욕'

'성령의 열매'

'성령으로 살며'

..........

말씀 순종은 '성령'의 은혜를 받을 지름길이다.

그것이 내 영혼을 풍성히 하고

내 삶을 기름지게 한다.

그것은 마음이 풀어짐을 의미한다.

참 오래된 역기능의 후유증이 자근자근 풀어져 녹아나가는 지름길이다.

영혼이 살아나는 것 같다.

 

 아침의 출근길이 맑다.

마음이 맑아서 그렇다.

더욱 맑아 보인다.

월요일 아침하고는 또 다르다.

이런 후련하고 통쾌한 마음이 지속되는 것이 '심령천국'이 아니던가?

난 이 땅을 살되 천국을 지향한다.

난 이 땅을 걷되 천국의 삶을 산다.

그를 향해 간다.

그것은 성령의 성령을 성령에 의한 성령으로 사는 길이다.

 

 

적용

1. 끝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내 사는 삶의 폭이 좁아도 이 삶 속에서 그러한다.

 약해지고 낮아지고 궁핍하고 좌절해도 예수님 위해 산다.

 그것을 기뻐한다.

 가슴이 아플 수는 있다.

 그러함을 주님의 성령이 위로하시길 기다리자.

 그게 주님을 위함이다.

 

2. 성질 부리지 않는다.

 무조건 참는다.

 오늘 하루는 최소한.. .

 특별히 환우들에게는 차분하다.

 

3. 나에게 더 여유롭고 자비로와 지겠다.

 나 스스로 자책을 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성령이 운행하시는 나다.

 난 주님의 사랑 받는 자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이유를 가진 자다.

 더욱 낮아지고 주님 만을 바람으로

 내 자존감은 높아지고 보람차 진다.

 

4. 성경을 세장 읽겠다.

 성령의 운행을 지켜보는 것은 성경 뿐이다.

 성경을 읽음은 감동을 읽음이다.

 

5. 내 자식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길 기도한다.

 

5. 내일 있을 역삼동 집회에 찬양인도를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원 가겠다.

 오랫 만에 집회 인도 요청 받아 기쁨으로 가지만

 오래 만이라 긴장된다.

 사람보지 않고 그들에게 내 기쁨을 알려주고 올 기회임 만을 믿자.

 하나님을 보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다.

 

 

 

 

기도

 
주님.

전요.

주님의 성령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 만 같습니다.

그게 힘이 들지만

그게 다행임을 압니다.

주님이 안계시는 일상의 삶은 생각하지 못하는

진실의 삶이 제 앞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전 깨달고 있습니다.

비단 저 뿐아니라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하고 깨닫고 이해하고 사는 자...

저 말고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곳에 드시는 모든 분들이 저같은 자들임을 전 압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풍성하게 하시고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 어려운 세상.,.

이 어지러운 세상..

이 끝없이 치닫는 세상..

이 말세의 세상에

칠천 선지자 같이 그들을 만지소서.

제 자식들 그리하시고

제 아내 그리하소서.

부디 바라옵기는 제 부모님들 이제 영접하시기 시작하셨으니

그들을 붙들어 인도하시고 제 평안을 알려주소서.

주님.

이 나라 너무 어지럽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이없는 일로 이합집산 , 

자기들이 옳다고 이곳 저곳에서 들 끓습니다.

하나로 뭉쳐서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할 이 나라...

제사장의 나라로 세상의 마지막 크리스찬의 보루가 될 나라.

굳건히 잡아주시고

당신의 자녀들로만이라도 뭉치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라 되게 하소서.

남북이 하나되게 하시고 강대국되게 하소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으로

성령의 강권적 임함이

저와 제 가정

제 나라와 이곳에 임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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