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제야 장미라 불리리라 ( 갈 3:24-29 ) 본문
제 3 장 ( Chapter 3, Galatians )
밤에도
장미는 장미다
아름다운 것은
어둠이
꼭 가리지 못한다
하지만
밝은 낮이 되어야
장미는
그 아름다움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
구원을 받은 장미 같은 존재이지만
날로 날로
믿음의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합해야 한다
그제야
우리는
장미라 불린다
붉은 장미라 불릴 것이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장미라
불릴 것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우리가 해야 할 부분.
믿음.
믿어드림.
아내가 '새차'를 뽑았다.
진 주황색의 디자인이 감각적인 S..
13년 덜덜 거리던 마티즈를 타고 다니다가 지난 겨울 한번 전복 사고 당할 뻔 한 후
큰 마음 먹고 조금 큰 차를 선물했다.
그 차는 시동거는데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었다.
세상에나..^^*
소리도 나지 않고 드르릉..
좋은 씨스템이 단지 누르는 액션하나로..ㅎ
믿음은 버튼을 누르는 작업이다.
우리 주님 그 분께서 우리 인생에 예비하신
그 구원과 축복의 궁극의 세리모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엄청난 기회가
내 인생에서 펼쳐지기 위해서는 '믿음 ' 스타트 버튼을 눌러야 한다.
시동은 한번만 걸면 끝나는 게 아니다.
매일 매시간 꺼지면 또 걸어야 한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오늘 묵상에는 '그리스도 '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입어'
그리스도와 합한다는 의미.
나와 그리스도의 영혼이 하나로 합해지는 상상.
그리스도로 옷입는다.
그리스도 예수표 명품 중의 명품 옷으로 SF 영화의 그것처럼
몸에 피부처럼 들어 맞는 맞춤 옷.
그옷은 믿음이라는 영적 버튼을 누르는 '세례' 후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이 내 영혼에 합치 되고
마치 '아이언 맨의 갑옷의 유형'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전신갑주 입게 되는 .......^^;;
그런 상상을 하게 되면 너무 죄송스러운 일인가?ㅎ
어찌되었든 간에 오늘 묵상은 조금은 멀티미디어적 감성으로
나에게 이해가 되어 온다.
그런데 '믿음'이 그토록 말처럼 쉬운가?
믿음이 자동차 버튼 누르듯이 쉽기만 하다면
예수께서 세상에 성육신 한지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어찌 아직도
저리 안타까운 말씀을 하셔야만 하던가?
나름 지난 당직 서는 중에
주님 앞에 아주 약간 덜 죄를 지었고,
아니 그 보다 더 아침에 주님께서 피곤치 않도록 일찍 깨우셔서
아침 기도와 묵상을 인도하신 전적인 주님의 사랑 탓에
영혼이 조금은 맑아져서
저러한 비교적 유쾌한 상상적 묵상을 진행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경우는
주님의 십자가 , 믿음, 그리스도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무겁고
덜컥하는 마음이 들어 얼른 도망치듯 다른 부분으로
묵상하는 눈길을 돌리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적 삶 속에 가장 중요한 진리인
이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 와의 합일된 신행일치의 삶은
피해가서 되는 말인가?
그러기에 오늘처럼 기쁘고 가볍고 힘있게
묵상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죄'에서 멀어야 한다.
죄.
원죄의 상처로 인하여 이 죄는 벗어날 수가 없는 바
죄를 짓고 죄에 대한 의식이 있고
죄에 대한 싸움이 있는 한 어찌 '늘' 상쾌할 수가 있을까?
나.
늘 고백하지만 '죄책감'을 훈련시켜오며 자라던 역기능 출신이다.
그러기에 겉으로 드러난 '죄'는 크게 짓지 못하며 자랐지만
나를 누르는 죄책감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매일이 죽음보다 힘든 삶이었고
늘 비교와 질시와 부정의 무게로 눌려
나이 들어 빨리 죽는 것이 내 소원이었을 정도였던 사람이다.
그러던 내가 예수님 영접하던 날 , 그 첫사랑의 홀가분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사단은 내 상처를 빌미로 자꾸만 내 영혼에 무게를 더해주었고
그러기에 난 그 첫사랑의 감동을 기억하고
늘 더 주님 말씀 앞에 서려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믿음의 부족함은 나의 영성을 빨리 자라지는 못하게 했고
믿기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난 '영적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 추후 죽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난 그 싸움을 멈출 수 없을 것임은 알지만
이제는 조금은 '승기'를 잡는 방법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믿음'
그 믿음을 크게 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지만
그 믿음 마져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음이 문제다.
참으로 어려웁다.
의심이 많은 자들은 매사에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한다 .
주님 앞에 내려 놓는다는 개념은 내 수중의 모든 것을 털리고
길거리에 나앉아 버리는 쫓겨나는 것같은 두려움이 엄습할 수 밖에 없다.
매사에 그렇다.
자식은 안그런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그대로 기도만 하고 방치하는 것 처럼 느껴질 때
어느때 그것은 아버지 의무의 자기 방기 아닌가 하는 부대낌과 싸워야 한다.
재산.
의사로서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기 위해 투자에 대하여 더 연구하고 매진하면 좋겠지만
그 마져 주님을 믿음으로 내려 놓는 다는 것은
'인생 후반'을 어쩌면 떨거지가 되어 살..위험에 자신을 노출 시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친구
더 열심히 관계 형성하고 매진하면 좋겠지만
그리하기 위해 일정부분 '기도생활'이나 '말씀 묵상'의 타격을 감수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주님이 인도하실 부분까지만 맡겨놓고 덜 찾아다닌다는것은
사회적 도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져
또 믿음과 싸워야 할 부분들이다.
이처럼 조금의 예를 들었지만
난 내 걱정과 죄책감과 믿음을 위한 내려놓음과
매사에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 싸움은 당연히도 '말씀 묵상'을 전혀 놓치지 않으려는 약간의 결심을
주님은 기뻐하셨다.
그 기뻐하심은 말씀에서 나오는 대로 ' 내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 잠잠히 나를 사랑하사.....' 하는 것같은
그 따사로움이기도 했고
오늘 묵상의 '그리스도로 합하는' 경험이기도 했고
'그리스도 갑옷'으로 옷입는 것 같은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를 진하게 옭매이고 있던 '감정'의 찌거기들이 벗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깨달았다.
'난 우선 말씀'을 선택하는 '선택'을 매일 기도하듯이 되풀이했다.
내 감정에 상관없이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으로 인도하시길 기다렸다.
그러면 말씀은 내 감정상태랑 상관없이 살아서 내 영혼에
'영감. 감동, inspiration' 이라는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감정을 역으로 '순화'시켜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말씀이 우선임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말씀이 시작이고
말씀이 끝이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이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아직 '죄'가 날 붙들고
내 안의 상처가 그 죄를 물고 죄책감으로 강한 드라이브로 걸려나오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때도 난 선택을 한다.
'말씀'을 내 모든 영혼의 움직이는 흐름의 기준으로 삼겠다.. 는...
그러고 나면 금방 맑음이 회복된다.
얼마전 '야베스'님께서 '모태 신앙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히 주위에서 호흡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함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들었다.
그렇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강골 불신의 삶을 살던 자들은
대신 '강력한 하나님의 샬롬'을 영혼에 경험시킨다.
주님의 임재감이 느껴지지 않을때,
오늘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합해진 느낌이 소실 되는 것 같을때
그리스도 명품 옷이 벗겨진 것 같이 느껴진다.
발가 벗겨져 살을 에는 메마른 추위나 더위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실은 그리될 까 두렵다.
그러기에 말씀 앞으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고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은
나로 하여금 다시 '심령천국'의 그 샬롬을 허락하신다.
나.
믿음이 부족한 자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음악적 시각적 영감은 허락되고
그것은 다시 주님의 영혼에 임하심을 조금은 민감하게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아
지금까지 왔지만
감각에 의존하는 믿음이
이제는 조금은 더 깊이있고 의지적인 믿음으로 성장하길 원한다.
주님
그리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은 성령을 성령의 성령으로 (갈 5:13-26) (0) | 2010.06.23 |
---|---|
성령 사랑 믿음 자유 ( 갈 5:1-12 ) (0) | 2010.06.22 |
내 갈 길 저 앞에 있다(갈 3:10-18 ) (0) | 2010.06.17 |
내 앞의 십자가를 보다(갈 3:1-9 ) (0) | 2010.06.16 |
나 비록( 갈2:11-21 ) (0) | 2010.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