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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갈 길 저 앞에 있다(갈 3:10-18 ) 본문

신약 QT

내 갈 길 저 앞에 있다(갈 3:10-18 )

주하인 2010. 6. 17. 11:39

제 3 장 ( Chapter 3, Galatians )

 

하늘은

아직 저리 아름다운데

벌써 내 앞길은

이리 뉘역해지는 구나

 

날은

아직 빛이 남아 있지만

벌써 등은 저리

하나 둘 켜져만 가는구나

 

무엇이 문제던가

무엇이 잘못이던가

 

하늘을 바라보고

등불을 켜주신 은혜를 보기보단

깔리는 어둠에

더 초조해 하고 있지 않던가

 

이제 눈을 들어 하늘보자

이제 마음열어 길을 찾자

이제 믿음다해 성령받자

 

주님 인도하실 그길

믿음으로 바라보자

가만히 바라보자

 

그러고 보니

저기 저 앞에

나갈 문이 있지 않더냐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늘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

그것이 어쩌면 내 인생을 허겁거리게 만드는 이유였을 지도 모른다.

예수 믿고 터질듯한 해방감을 첫사랑으로 경험 한 것은

그 저주같은 '해야 사랑받는 다는 강박'의 끈이

끊어지는 경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늘, 그랬다.

자라오면서 난 형이 못하던 어떤 것까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역기능의 사슬이었다.

돌아보면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업적'을 위해 매진하다가 어디갈지 모르고 죽는 것,

워크홀릭, 중독, 우울, 자살, 유혹에 탐닉, 의미없는 것에 대한 파리떼 같은 집착.......

모두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강박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이게 율법의 소리다.

우리 머리 속을 지배하는

세상의 원리랑 크게 다름없다.

그게 '율법'에 매인 자들의 속성이고

그게 사단의 소리고

그것을 모르고 살지만 그대로 사는게 인간의 속성이고

그것은 불행이다.

죽도록 사람을 몰아가는........

그것을 오직 유일하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보혈'이다.

예수님의 복음 뿐이다.

 그 복음을 복음 답게 만드는게 '믿음'이고...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

믿음이 의인을 만든다.

믿음 만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한다.

성령 만이 이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연단을 마치고 나갈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서만 받을 수 있는 '성령'

그 성령을 내 안에서 원할케 운동하시게 할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의 권리이자 '의무'인 영역.

'믿음'이다.

'믿음'은 복음을 내 삶에 펼쳐지게 한다.

 

 

 SOS라는 모방송국 프로그램이 있다.

노예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아직도 있는데

그들을 풀어주어도 그리 행복해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지도해줄 '속박'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해 한다.

적응하는 데 한참 걸린다.

 유명한 '압살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무기형이 감형되어 풀려난 자가 사회에 적응 못해 자살하는 것을 보았다.

 코끼리를 사육할 때 어린 코끼리를 쇠사슬로 묶어 놓고 훈련시킨 후

커진 후에도 실같은 것으로 묶어도 탈출을 하지 못한다 한다.

 동물을 다루는 TV프로그램에서

조그만 치와와에게 어릴 때 부터 물리면서 큰 세퍼드가

커서도 그 개 소리만 들어도 꼼짝 못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율법은 사람을 묶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해야 살 수 있다고 강제적으로 압제하는 것이다.

그 압제를 되풀이 하다보면

영혼은 크질 못하고 거기에 묶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행동'을 하지 않고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그 위협이 사라진다해도 '행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그를 꼼짝 못하고 그 행동을 되풀이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찌 '폭행'이 진실이 될 수 있으며

어찌 '실이나 쇠사슬'이 진실이 될 수 있고

어찌 '감옥'이 진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조그만 치와와의 짖는 소리가 진실이 되는가?

 율법이란 이런 것이다.

법.

어쨋든 사람들이 살다 부딪히면서 보니

이렇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비교적 사회문제 덜 생기도록 한

구속적인 효과를 가진 '제도'가 아니던가?

거기에 오랜 기간 걸쳐 지배자의 편리를 위해

다양한 욕구들의 분출을 막기위해 적절히 변해오면서

틀을 잡아가던것.

어찌 거기에 '생명'이 있을 수 있으며

어찌 거기에 '진리'가 담길 수 있단 말이던가?

 율법은 율법 자신의 생태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기에 그 율법에서 '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표현을 하며 구속의 힘을 강화 시키고 있지 않던가?

거기까지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저주의 도구다.

불행의 씨앗이다.

도덕의 한계가 거기다.

 

사람들.

깡통같은 존재다.

며칠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 즉 이제  육체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라 하신 바

 이 고깃덩어리 육체에 사는 우리들은

그 육신이 움직일 어떤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에 손쉽고 빠른 ,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인

가까운 힘있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취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율법적인 것이 힘이 들고 어려우면서도

그것을 벗어날 의욕조차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사회마다 달라진다.

'상황 원리'라는 EBS의 심리 실험을 본적이 있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상황에 의하여 변해 버린다.

안과에서 '코'를 잡고 빙빙돌게 시키거나

기괴한 일을 시키는 실험을 한적이 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적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과인데..........

그외에 실험임을 알리면서 '죄수'와 '간수' 시험을 십수년전에 하면서

경악할 일이 벌어진 유명한 심리 시험도 있었다.

단지 실험인데 진짜로 간수와 죄수의 그것으로 행동하면서

잔인한 고문까지 마다않던 .......

그것이 이란에 진출한 미군들의 가혹행위에서 그대로 나왔다.

사람은 그렇다.

사람은 '율법'에 묶일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것을 '육체'에 갇힌 '나'라는 비어있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로 '심리'실험에서는 성공이 되질 않는다.

 

 성경은 명쾌하다.

말씀은 인간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도바울님의 말씀대로 그 영혼에 무엇인가 담으려 하는 존재가 우리이기에

상황이라는 율법을 담으면 죽도록 거기에서 그대로 끌려다닐 수 밖에 없어

(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

온갖 일을 항상 허덕이며 행하다가

저주 받지 않으려다가 죽어가는 게

불쌍한 불신자들의 영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다고 다 해방되었던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이전의 그러한 율법의 끈은 끊어졌지만

그 후의 삶은 또 매번 사단의 공격으로 얼룩지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남아 있는 과제이다.

 매일 매일 기도와 말씀의 삶을

'믿음'으로 시행하여 '성령'이 매일 '거룩한 사죄은총'을 주셔야 한다 .

그래야 영혼이 정결화 되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

 그렇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라는 사도 바울님의 고백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어제 기도원 에서 기도하며 어제 주신 말씀묵상 중

아직도 '나' 자신 뿐 아니라 '내 자식'들에 대하여

조건적 사랑을 강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들들에 대하여 기도하여왔으면

당연히도 나 자신 뿐 아니라

그 아들들이 잘될 희망에 부풀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늘 부족한 듯 변화없는 현실에 대한 속상함이

내 속을 스침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 말로 '율법'의 생각이 아니던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

나, 아들들 .. 온갖 일을 항상 더 더 점점 잘 하지 않기에

저주는 아니더라도 자꾸 무엇인가 잘못될 것 같은

불안한 미래가 연상이 되어오고 그것이 날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 기도하며 깊이 묵상했다 ^^* - 확실한데

난 아직도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 안에 운행하시도록 ' 열어놓지 못하고

그것은 다시 믿음이 현실로 드러나도록 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나는 이리도 '행동' '실적'위주이고

그렇다고 더욱 적극적으로 하지도 못하고 주저 앉는

힘없는 불평 중년으로 있어야만 하는가?
 율법적 성향이다.

그것은 내 자라오던 과정에도 문제가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심하지 않다.

많이 흐려지고 좋아졌다.

그렇기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깨닫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선택을 하면 된다.

'믿음.

 성령의 약속.'

그렇다.

믿고 기다리면 된다.

기도하고 믿고 기다린다.

나머지는 성령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나는 십자가 예수님의 확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앎과의 괴리는 무엇인가?

왜 알면서도 율법적인 눈으로 돌아가는가?
처음 예를 들었던 사람들 같은 '허전함'이다.

손쉬운 율법을 놓기에 겁이 나는 것이다.

이전에 배워왔던 것을 버리자니 서운하고 안타깝고 겁이 나는 것이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주님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변해왔던 지난 시절처럼

이제 더욱 더 그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해야한다.

그 사랑.

그 놀라운 감동.

그 사랑을 주신 실체가 뚜렷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 분이 날 , 내 자식을 더 '선'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난 믿는다.

모두가 잘될 것이다.

성령의 약속이 있으시다.

성령이 약속됨은 내 믿음에 달렸다.

 

 

 

적용

 

1. 기억하자

   오래된 내 잘못된 생각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한다.

   그렇지 않다.

   믿음이 '모두'다.

   믿음으로 감동을 놓치지 않음이 모두다.

 

2. 믿자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그렇다.

  믿음은 어렵다.

  최소한 평생을 의심하고 분석하는 습관이 있는 나에겐 더 그렇다.

  손해봐도 믿자.

  내 자식은 잘 될 것이다.

  나도 잘 될 것이다.

  주님이 믿기만 하면 성령의 약속을 퍼부어 주신다하시니 믿자.

  잘 될 것이다.

 

3.  인내하고 기다리자.

  나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조급하지 말자.

 

4. 성경 세장 읽는다.

 

5. 당직 .

 최선을 다해 선다.

  큰일 없도록 하여 주소서.

 

 

기도

 주여 .

귀하신 주여.

너무 당연한 귀절이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사람들.

나.

모두 다 율법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이 강박적 성향.

어디까지 구분짓고 믿고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는 무지.

적은 용량의 버퍼로 인해 효율적으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지혜 부족함.

주님.

저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말씀대로 살려 노력하면서도

가만히 분석해보면 어찌 이리 많은 부분 왜곡이 되었는지 놀랄 뿐입니다.

너무도 눈에 쉽게 보이는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십자가 달리심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저 이리 어리석습니다.

용서하시고 부디 회개 케 하소서.

주여 .

절 지혜 많게 하시고

절절한 의욕을 주시사

주님 닮게 하소서.

주님께서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영광위해 전력 투구하신 것처럼

저도 그리하게 하소서.

그래서 율법적인 추구를 다 벗어버릴 수 잇게 하소서.

주님.

도우소서.

믿음을 주소서.

부족한 믿음마져 성령이여 허락하소서.

주님 도우소서.

믿음을 주시사 성령께서 약속의 운행을 더 크게 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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