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서로의 짐 각각의 짐 (갈 6:1-10 ) 본문
제 6 장 ( Chapter 6, Galatians )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
무거움
무게
귀찮음
힘듦
땀
인내
남을 위한 짐
그리스도의 법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짐
짐을 지는 것은 인생의 원칙이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으되
그 고난이 자기 만을 위한 것이면 의미없는 일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위해 지어야 할 짐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신의 이익 만을 위해 노력하다가 생기는 고난은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라 표현되어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예수님'을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지는 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과 짐을 참는 노력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성령을 위하여 ' 주님을 위하여 짐을 지는 노력은
'영생'을 받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오늘의 묵상 포인트는 '짐'과 '성령'이다.
짐은 숙명처럼 질수 밖에 없는 자신 만의 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주님의 명령 순종 차원에서
기쁨으로 감당해야 하는 불편이라는 의미의
성숙한 '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함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전제조건이라는 말씀처럼 묵상이된다.
그렇다면 '짐'은 어찌 지어야 하는가?
내 짐과 타인을 위한 짐은 어찌 구분해야 하고
그 짐을 지는데 무게로 인하여 주저 앉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내 자아가 주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앞서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영생을 거두기 위한 '짐'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짐을 지는 짜증남으로 인해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신실한 마음은 어찌 유지해야 할 것인가?
물론, 성령의 도우심이면 가능하지만
그 성령의 지속적 도우심으로 한결같이 기쁨으로 짐을 질 수 있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말씀 묵상의 시간이 길어지며
나는 많은 부분 생각이 변했다.
그 변함은 내 자유를 의미한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편해졌음을 의미하고 있지만
아직 타인의 짐을 지는 부분에서는 거부감이 업지 않다.
그 거부감은 한번씩 올라오는 짜증이나 그들에 대한 속상함을
견디지 못할 두려움 탓인듯 싶다.
하지만 최근에 그도 서서히 마음이 바뀌고 있다.
'양같이 나를 맡겨 버림의 영성.'
정확한 표현인지는 자신이 없지만 한번씩 깨달음으로 오던 것이다.
퇴근 후 '수영'한다.
장애인 복지관에 있는 수영장이 가까워 버스를 타거나 걸어가기도 한다.
가면 2500원의 돈을 내고 50분 정도 자유수영을 한다.
그때 몰려나오는 '장애아'들의 모습은 한편으로 가련하기도 한편으로 사랑스럽기도 하다.
개중에 어떤 아이는 무서운 아이도 있다.
아이들 대부분은 '자폐아' 인 경우가 많고
그 아이들의 특징은 혼잣말을 하고 반복적인 이야기를 되풀이 하기도 하고
뜻없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소리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순진하다.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경향이 있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순진무구한 아가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없지 않다 .
그럼에도 '특질'이 조금씩 달라서
어떤 아이는 뺀질 거리고
어떤 아이는 철저히 사람에 대하여 민감한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아이는 체격이나 풍기는 분위기가 '조폭'같이 무섭기도 하고
그 아이는 되풀이 하는 소리도 겁주는 소리 비슷하기도 하다.
마치 두사람의 영혼이 한 육체에 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혼자 대화를 하며 그 세계에 빠져 있다가
가끔 세상의 우리들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창현이라는 이름의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의 남자 아이가
나와 같은 시간에 수영을 하고 있다.
이 아이 역시 자폐아다.
혼자의 세계에서 머무는 강도가 다른 아이보다 더 심하다 .
말도 잘못하고 발음도 4살 아이 같다.
만나도 아는 체도 안하고 시켜야지만 '안냐세요~'하고
고개만 까닥하고 만다.
수영하다가도 갑자기 중간 쯤 가서는 '가만히 있는다.
물속에서 누구랑 대화하듯 멍하니 올스톱하고 있다.
안타깝기도 하다.
얼굴은 시선을 잘 맞추지 못하고 '멍'한 표정이다.
하지만 굉장히 귀엽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애정'이 간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가 귀티가 나게 생긴 탓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깨달은 게 있다.
심한 자폐성향을 보이는 아이는
배우는 것도 아주 아주 느리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한다'
인사하라면 인사한다.
자유형하다가 머리를 번쩍 번쩍 드는게 영 안되어 보여서
자주자주 '머리' '머리' .. 하고 소리치면 영 안될 것 같은 그 아이는
그대로 따르려는 노력을 한다.
그때는 기쁘고 이쁘다.
그러다가 '화이팅' 외치며 하이 파이브 하면 아이는 다가와서
손을 번쩍 들어 맞추고는 화사한 웃음을 짓고는 또 수영한다.
분명코 창피할 나이의 그것임에도 아이는 순종하며 아기처럼 기뻐한다.
어제는 머리 쓰다듬어 주니 그것을 그리 순박하게 기뻐하더니
한번씩 레인끝에서 마주칠 때마다
머리를 들이 밀면서 '칭찬'해달라는 어눌한 말로 부탁을 한다.
귀여워서 쓰다듬으면서 남들이 들을까 무서워 조용히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
창현이를 잡고 있는 사단은 떠나라' 하고 기도를 하니
아이는 갑자기 눈을 위로 번쩍 들더니
그 어눌한 소리로 '아멘' 하는 게 아닌가?
감동이 밀려온다.
아이는 또 습관처럼 얼른 수영해서 나가지만
아이를 귀여워 하는 내 마음의 이유를 알 만도 했다.
아이는 예수님 믿는 가정에서 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장애를 겪고 있지만
맑아 보이는 것이었다.
또한 아이는 '순종'적이다.
자폐란 순종을 할 수 없는 성향의 병임에도
아이는 순종적이다.
깨달았다.
주님이 날 보실 때 어떤 것을 진짜로 이뻐 할 것인가?
비록 자폐아 처럼 보일 위험성이 있을 때까지라도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는 것.
그러면서 그 순종을 '양'처럼 순종하는 것...이란 것을
아이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오늘 '목요일'
막내처제가 지난 주 전화 왔다.
'형부 , 매주 목요일 큐티 모임에 와주세요.
찬양인도자가 필요합니다. '
역삼역이라면 전철만 50분을 타고 가야한다.
정말 오랫만에 외부인도를 나간다.
아버지 학교 스텝모임 인도나
교회의 찬양대.. 등으로 찬양은 늘 했지만
초빙 받아 나가는 것은 근 1년 만이다.
찬양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 있다.
이전에는 내가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주님이 찬양을 받으실 것이시며
그 받으심을 내 감정이 꼭 인식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는 다이나믹한 인도도 가능했지만
어떤 경우는 굉장히 당황하다가 내려오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다.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등골에서 식은 땀..........
하지만 아버지 학교 리딩을 통해
다시한번 말씀 앞에 부담만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는 주님이 인도하시고 부족한 내 영적 청결함 마져
찬양을 통하여 깨끗게 하시는
그 원리를 깨달은 후로
마음의 부담은 덜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찬양리더.
주님 앞에 가까이 서서 나팔 부는 레위인의 입장이기에
주님의 주시는 영적 감응이 누구보다 클 수도 있지만
인간이기에 인간의 갈채를
주님 앞서서 받아 가로채는 위험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늘 말씀으로 중심잡음이 필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차하면 '자아'가 그대로 드러날 위험성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영장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세계에만 갇혀 있느냐
외부와 교통하느냐 하는 것이 표출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주님과 교통하기 위하여서는
내 자아를 들 쑤시는 사단의 소리에 집중되면 안된다.
그것을 벗어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마치 내 짐도 모자라 남의 짐까지 지고 가라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조금 성숙하고 회복된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내 하고 싶은 것 다 내려 놓아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짐을 지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보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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