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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여 나를 삼키소서[고후5:1-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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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여 나를 삼키소서[고후5:1-10]

주하인 2013. 4. 9. 09:18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땅.  우리의 장막집.'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

육신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

온갖 욕심과 살수 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들과 버리지 못하는 정념들로 뭉쳐있는

육신을 껍데기로 해서 살아가는 나'.

 그 나.. 가 이제 서서히 무너져 간다.

세월로 무너지고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한계를 인식함으로 무너지고

관계의 찢어짐으로 무너지고...  무너져 간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만'은 않다.

아직.. 온전치 못한게 문제지만...

 

이유는 말씀을 앎이고

은혜를 깨달음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생을 눈치챔이다.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조금씩 뚜렷이 믿어가기 때문이다.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그 영생의 내 집.

이 쇠잔해져가고 늙어가는 육신,

그토록 노력하지만 나를 아직도 '죄'의 욕심에서 완전히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이 육신 장막.

이것을 벗어버리는 것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확신'이 없다.

죄송하지만 진실이다.

은혜로 더욱더 깊이 침잠해져 가기 전에는

그래서 매사 하나님의 은혜로만 젖기 전에는

하늘의 처소로 온전히 '입혀' 지는 것을 바라지만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탄식한다.

간절히도 탄식한다.

하나님 말씀 앞에 이렇게 앉아서 묵상하고

주님의 성령으로 인도 받을 때는 이렇게 탄식한다.

더욱 바라기는 매시 매초 주님의 처소로 '덧입혀 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아니다.

'덧입기'다.

그것은 '주체적 능동적 옷입기'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 덧 입는 다'는 표현에서

난 희망을 더 본다.

옷입는 것..그것도 덧입는 것은

굳이 온 몸이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하지 않아도 동일한 '이쁨'으로 타인에게 보인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아직 내 육적 성질이 더덕더덕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구원하신 자격으로

하나님의 처소를 덧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꼭 내가 완전히 깨끗지 않아도

영생, 하나님의 처소, 천국을 간절히 사모해도 된다는 이야기고

그럴 자격이 있고

또 그렇게 되면 남들이 날 부러워하고

아름답게 여길 것이란 이야기다.

 

나머지..

내 속은 덧입는 순간 더욱 정화될 것이 분명하다.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덧입다.'

그 말씀을 넘어

생명에 '삼킨바 되다' 라고 표현하신다.

 

나...

참 좋다.

의지 박약하고

생각이 이리저리 너무 많아

내 혼자 무엇을 하라고 강제로 명령을 내렸으면

아예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십자가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내 가슴에 팍 꽂혔었더라도

이제.. 살려 주었으니 너혼자 가봐라.. 했더라면

나 진즉에 넘어져서 실족하고 말았을 것을..

오늘 말씀처럼 '덧입도록' 하시고

거기에 당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아주 약간의 마음을 기뻐하시사

이렇게 생명으로 '삼켜주셔서' ...ㅎㅎ..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나.

곧 생명으로 삼킨바 되고 말 것이다.

이 육신이 54년 째 쓰다보니

디스크 3군데 꼬리뼈 한군데 퇴행성 디스크 관절..  오고

혈압 높고 눈은 다촛점 렌즈 아니면 보이지도 잘 않고..

장막이 헐대로 헐어버리려 하고

 생각은 자꾸만 내 못이룬 것만

'너 이래서 안되.. 이러니.. 너 어쩔래.. '하는 비교의 소리들만

자꾸 그득하려 하니

이 '땅의 장막' 속에 거하는 '나'에게만 신경쓰고

정말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없는

홀로 거해야 하는 '불신의 나'였거나

그냥 십자가 예수님의 구원 덕택에 '자격'만 부여 받은 자로

그럭 저럭 살아가는 자라면

'이 하늘의 처소를 덧입고 , 생명에 삼키울 것' 이 내 운명이란 것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며

따라서 , 내 삶이 계속 나락과 힘듦 사이에서 허덕이며

눈은 겨우 주위의 잘나가는 자들에게 고정시켜

비교와 속상함 등으로 허덕이고 마는

썩어져 가는 육신 장막에 갇힌 자로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ㅜ.ㅜ;

 

감사하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주님.. 성령으로 보증하신단다.

인치시고 보증서류로

날 생명에 삼키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할렐루야...

나.

삼켜진 생명덩어리고

하늘 처소로 옷입을 자다.

 

 

적용

 

1. 성경 세장 읽겠다.

 

2.  이 땅의 장막의 쇠퇴를 기뻐하자.

 늙음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덜 늙기 위해 악을 쓰기보다는 받아 들이고 다스리자.

 그리고 감사하자.

 약함이 강함이다.

 예수님을 전제로 해야만 알수 있는 감사함을 깨달음이 감사하다.

 

3. 하늘의 처소를 덧입자.

 사모하자.

 내 부족함, 내 부끄러움에 아무 상관없다.

 덧입으면 내 죄 덮어지리라.

 내 부족함 가려지리라.

 하늘의 처소로 그러신다니... 냄새도 안나리라.

 

4. 생명으로 삼키움 받을 자다.

 나.. .

 얼마있으면 생명으로 삼키움 받을 것이다.

 이쁜 아기 깨물어 주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날 깨물어 삼키신단다. .. 조금쑥스럽지만

 상황은 이해가 간다. ^^;

 기뻐하자.

 난 생명에 삼키우일 자다.

 

5. 생명이 내 안에 넘치면 난 육신의 나이랑 상관없을 것이다.

 그 생명을 주실 때

 과연 내 삶을 나에게만 집중하라시는 것일까?

 주님은 생명으로 삼키시면서 

 나의 모든 관점을 다 바꾸실 것이다.

 삶의 패턴도 썩을 장막이 인도하던 방향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완전히 바꾸실 것이다.

 기쁨으로 그곳을 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으로 삼키우고 옷으로 덧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6.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다.

 주신 성령님, 계신 성령 하나님을 다시한번 보증으로 느끼게 하시는 것이시다.

 감사하다.

 

기도

 

주님.

감사하나이다.

자꾸만 들어가는 나이에 따라

육신도 버걱거리고

아주 오랜시간 수영을 통해 열심을 보이지만

버퍼가 줄어서 더 이상 늘지 않는 한계점도 봅니다.

모두 땅의 장막의 쇠하는 현상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 ... 세상 사람들처럼 더 더더 유지하려는 욕구도 없습니다.

그 쇠잔하는 육신의 약함을 통하여

강할 하나님의 처소, 하늘의 처소가

내게 덧입혀질 것을 조금 조금씩 더 바래져 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하나이다.

이제 매일 매순간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날 삼키우실 것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길 원합니다.

내주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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