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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배담은 질그릇이다[고후4:1-4: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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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배담은 질그릇이다[고후4:1-4:18]

주하인 2013. 4. 7. 16:00

 

 

 

7. 우리가 이 보배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는 '질그릇'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투박하고 태어난 그대로의 거친..

그게 나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주님의 말씀이 담길 수 있다.

주님은 '보배'시다.

심히 큰 능력을 가진 분은 그 분 밖에 없다.

내가 질그릇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질그릇은 보배가 담길 수가 없다.

보배가 우리에게 담겨야 우리는 '보배담은 질그릇'이 된다.

큰 능력이 있는 것이 우리다.

보배 그릇이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때문이다.

하나님때문에 우리는 큰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질그릇으로 보지 않고

보배 그릇으로 본다.

하나님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바로 '나'다.

나는 질 그릇일 뿐이다.

그때의 질그릇은 투박하고 조악하기 그지 없는것,  말그대로 희망 없는 질그릇이다.

길거리에 깨져 뒹굴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질그릇이다.

그러기에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내가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배가 담길 가능성을 기뻐해야하는 '인지'를 가져야 한다.

그 자유로움...

나는 약해져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임하시고

그제야 내가 강해지는 이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보배그릇의 칭찬을 받을 때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남들이 나를 칭찬할 때 나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내안의 담기신 하나님의 향기를 맡고 그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매일이 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안에 늘 계셔서 날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질그릇이다.

속이 빈 질그릇이다.

아무 것도 없는 나.

빈 나.

아무 것도 없는 나.. 를 그래서 난 기뻐해야 한다.

내가 빌수록 더 큰 능력,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는

큰 보배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보배 질그릇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이게 맞는가?

우겨쌈을 하는 것은 나의 대적 들일 텐데 쌓이지 아니한다...는 말이..

기적으로 쌓을 수 없다는 말이던가?

아니다.

맞다.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그런 희한한 기적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연약한 감정적 상처 마져도 건강을 회복하게 하시사

받아 들이지 않도록 하시는 것도 주님의 기적이시다.

 어느 책에서 '선물'을 주어도 받지 않는 것이 자유이듯,.

누구의 핍박이나 놀림도 받아 들이지 않으면 그들이 줄 수 없다고 한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맞다.

누구에게 심리적 우겨쌈을 당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상황에 처할 수는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왕따'가 얼마나 느는가?

악플들은...

그러함에 일일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우겨쌈은 사람으로 하여금 극단적 선택을하게 한다.

그러한 우겨쌈도 받지 않으면 그만이란다.

이런 '질그릇'이란 인식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보배채운 질그릇으로 자신을 재 인식하게되면

하나님께서 강한 자존감으로 다시 자신을 세우게 하신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되 하나님의 사랑받는 보배그릇으로 다시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한다.

그러한 건강한 자존감은

타인의 괜한 손가락질 , 사단의 중재하는 우겨쌈을 받아 들이지 않게 한다.

그냥 그럴 수 있는 가벼움으로 내려 놓아 버리게 한다.

그것.. 멍에를 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던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이것.

홀로하면 도저히 않되는게 사회의 구조다.

세상의 원리다.

인간의 심리를 배운 의사로서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대처를 찾아서 풀어야 한다.

그 대처가 친구가 되고 멘토가 되는 것은 

술이나 마약이나 대체물로서 섹스탐닉이나... 옳지 않은 해결보다는

그나마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들은 유한하고 그들 역시 부족한 원죄적 존재다.

어디까지 나를 도울 것인가?

그들의 변심은 더욱 큰 상처를 가져올 뿐이다.

낙심하지 않음은

자신이 질그릇이지만

보배 질그릇임이 가슴 깊이 인식되어 있는 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의 하나님.

놀라우신 내 하나님... 뿐이시다.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박해도 마찬가지다.

다리걸어 넘어짐은 또 어떤가?

육체의 상처나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심리적 압박이

이전 시대보다 훨씬 강하다.

트라우마가 세진다.

무한 경쟁시대.

너무나 빠른 물질적 성장의 대한민국.

잘못을 그냥두지 않는 네트워크의 시대...들은

그 트라우마를 통해 재기하기 힘든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포인트처럼...

내 선택으로 '버린 바되지 아니하고 망하지 아니한다'한다.

능동태다.

절대로 망하고 버림 받은 가련한 수동적 처지가 아니다.

그런 능동태는 모두 내가 질그릇이지만 보배 질그릇임을 인식하고

진정 큰 능력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보배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모든 게 진실과 진리로 작용한다.

할렐루야다.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이라신다.

우리는 '우리 조금 더 선택 받은 자'.. 말씀을 사모하고 매일 말씀에서 거듭나려 노력하는

세상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을 말한다.

'항상' 보배를 느끼고 사는 우리들 말이다.

그들에게 위의 말씀을 하고 계심이다.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던가?

예수께서 죽으심은 아프다. 너무 너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들은

도저히 믿는 우리로서도 이해할 수없는..

아니 어쩌면 주님을 믿는데도.... 너무 아픈게 이해할 수 없을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그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

우리의 자아도 매일 죽어야 한다.

내 것.

내 소유.

내 문제

내 마음

내 속상함...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아프지만 죽어나가야 한다.

우리 자아가 죽어나가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

나.

지금까지 내가 질그릇임을 깨닫고 그 사실이 내 영혼에 박히게 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오랜 시간을 연단을 허락하셨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씩 마음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이제... 좀더 확실히

이 삶속에서 내가 도저히 이해할수 없고 깨닫기 힘든 것 같은 것도

아... 이것이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처럼

내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기 위함이었구나.. 고백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조금 조금 이해가 된다.

어쩌면 그러한 예수님의 생명의 기쁨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내 영혼의 그릇 안에 보배로 쌓여 가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난.. 살아 있다.

육신이 살아 움직임을 넘어서 영혼이 살아 있다.

육신은 날로 쇠퇴하여 힘이 빠져 나가고 관절은 곳곳에서 삐걱거리지만

내 영혼은 날로 날로 새로워짐을 느낀다.

이 죽을 육체에 하나님의 영, 예수의 생명이 그득하길 바란다.

아직은 내가 '죽음에 넘겨지는' 상황,

순교의 상황...

나를 온전히 죽여서 나를 질타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짐은

생각만으로도 겁이 나긴하지만...

이제 더 바라는 것은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은혜가 그 상황에서 더 커지면

주님의 성령으로 매일 내 영혼이 충만해진다면

과감히 내 죽음을 주님의 살아계심을 위하여

이 죽어갈 육체를 내 놓을 수 있길 바란다.

 

 

 

 오늘... 주일.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버릇이 무섭다.

그래서 '주일'임을 깨달아 나만의 장소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묵상집을 펼쳤다.

참으로 은혜로운 구절이다.

마음에 깊은 깨달음을주신다.

시간이 부족하고 게으른 육체로 아침 일찌기 묵상을 올리지는 못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노트북을 펼쳐들고 정리하려다 보니

내일 묵상할 부분이 아니던가?

그래... 그것도 하나님이 그러신 것이다.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오늘 나에게 하실 말씀을 통하여 더 큰 필요가 있는 분이 있으셔서

하나님께서 바꾸신 것이겟지 .. 하고 묵상을 올린다.

내일은 또 내일 알아서...

 

묵상을 진행하다 보니 .. 참 감사하다.

이 부족한 자.

내가 질그릇 같은 자임을 난 오래전 부터 너무너무 잘알았었다.

그러나, 그게 겸손으로 이어지면 참으로 좋으련만

한편으로는 또 너무도 교만한 부분이

높고 낮음으로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이 날 정신차리지 못하게 했다.

또한 낮은 질그릇 개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난.. 내가 낮은 질그릇 같은 자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소리내어 보배그릇인체 가리는 것이었다.

보배가 있는 듯한 반짝거리는 '유리 그릇'.. 아니 은그릇 금그릇 인 것 처럼

질그릇이 아닌체 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다시 표현하면 '낮은 자존감'과 다른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달아도 중심잡기 힘든 것이었다.

순서였다

내가 질그릇임을 먼저 깊이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였다.

그리고 그처럼 약하고 볼품없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보배 그릇임은 보배이신 하나님 탓이지

내가 이쁜 그릇이어서가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인정할 수있음은 나에게 은혜로 다가오셔서

틈날 때마다 기쁨,, 평강으로 채우시는

은혜의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이귀한 원리를 알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믿음의 시간이 지날 수록 '감사'할 조건들이 늘어감을느낀다.

이제.. 거기에 난 보배그릇으로 인정받을 자임을 확신하게 되어간다.

난. . .나로서는 절대로 보배같은 자가 될 수 없는 인격을 가졌다.

그것은 진정 맞다.

나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있다.

의사다.

키도 크다.

목소리도 크다... ...

그러나 그것 뿐이다.

나이 들어 육신의 흔들림이 심해지는 50이후의 중년들에게는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아름다운게 얼마나 차이가 있을 것인가?

조금 작고 조금 덜 아름다운 ... 젊은이들에게 비교할 아름다움이 되지 못한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그러기에 나이가 들어가면 '수치심'이 더 늘어가고

작은 자극에도 슬프고 부끄럽고 잘삐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그러한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하나님은 소망으로 다가오신다.

그래도 '너는 보배 그릇이다.' 하신다.

그것..

나의 자연적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안에 보배로서 담기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임을 알기에 그렇다.

아..

소망이다.

 

오늘은 주일이다.

거룩한 주일이다.

주님은 주님의 날에 또 이렇게 다가오셔서 감사할 거리를 남겨 두시고 가신다.

 

 

 

 

주님.

놀라우신 제 주님.

제 생명의 주님.

절 깨우치시고 알게 하시고 능력으로 다가오시는 내 주님.

주님의 날에

주님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나도 모르게 돌아가고 있느 타이프 위의 손가락을 보면서 느낍니다.

그 손가락을 이끌고 있는

제 머리속에 폭죽처럼 떠오르게 하는 생각의 선한 순환을 보고 느낍니다.

그 생각을 밀어올리는 행복하다는 감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기쁨임을 느끼는 잘 조화된 '통합'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통합의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큰 능력'임을 눈치채기에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거룩하신 보배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는 질그릇임을 다시한번 들어내서 세상에 외치고

그것을 제 영혼에서 다시한번 정리하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없으시면

절대로 홀로 이렇게 설수 없는 투박한 자 맞습니다.

유약칠도 되지 않은 투박하고 부족한 자입니다.

길거리에 던져놓아도 누구하나 돌아볼 만한 가치가 없는 자 올시다.

그러함에도 전 이런 저를 부끄러워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전 에 상처라는 이름으로 달라붙어 내 부족함을 가라고자 하였던

모든 헛된 노력을 다 내려 놓으려 합니다.

그냥 받아 들입니다.

내 놓고인정합니다.

이제 .. 주님이 보배로 제 안에 오심을 기대하고 또 그러하심음 믿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제 안에 존재함 만을 알면

저는 이제 보배그릇, 보배담은 질그릇임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주님.

세상향해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나는 ... 보배 담은 질그릇,

예수님 만을 알고 예수님으로만 제 앞으로의 삶이 이끌어질 것이

그리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하고요.

제 가진 지금의 위치...

그럭저럭 나를 꾸미는 의사.... 노래하는 자... 조금 짙은 눈썹...........

다 내려 놓습니다.

주님...

순간순간 잊고 부끄러워 하려는 내 모습에 대하여

주님이 보배로 오실 빈공간이 커짐으로 오히려 감사하게 하소서.

제가 낮을 수록 주님은 높아지시고

제가 약해질수록 주님은 강해지시고

제가 곤란할 수록 주님의 나라에 가까워 짐을 감사하고 느끼게 하소서.

제자식들도 그리하게 하시어

보배 그릇으로 평생을 잘 살게 하시옵소서.

그들의 그러한 깨달음 그들에게 머물지 않고

그들의 자손들.

그들의 주위에 널리 펼치는 올바른 보배그릇으로 살게하소서.

그들의 삶의 에너지가 타인에 대한 올바른 모습을 보이는 자.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자로서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하소서.

그래서....지금 받는 환란의 작은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 바꾸게 하소서.

낮아지는 것 같은 좌절감을 예수를 위한 십자가로 받아 들이게 하소서.

절벽같은 어려움도 타인을 위한 주님이 허락하신 십자가로 받게 하소서.

그래서.. 그들의 그릇이 하나님의 보배로서 그득그득 차게 축복하소서.

저.

아버지로서 현실의 눈으로 보는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이 주일.. 주님의 말씀을 힘입어 마음을 바꾸게 하소서.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믿음으로 인내하게 하소서.

내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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